식민지 시대의 우리 민족사를 한 소년의 성장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대하소설. 국권을 상실하고 사회구조가 와해되어가는 1920년 전후를 무대로 그 속에서 우리 민중이 어떻게 뿌리를 지켜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또한 제국주의 압제 아래서의 민족해방 운동과 피압박 민족의 참담한 정황이 주인공의 빈민 운동, 3 1운동, 항일 독립 투쟁 속에서 탁월하게 재현된다. [전3권]
김원일
1942년 경남 김해 출생.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분단문학의 대표적 작가. 월북한 공산주의자를 아버지로 둔 멍에를 문학적 화두로 승화하여 빛나는 작품들을 다수 창작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6·25 이전 남한에 살면서 가족에게도 자신의 활동을 숨기고 지하활동을 한 공산주의자였다. 전쟁 전 남로당 경남도당 부위원장, 인공 치하 서울시당 재정경리부 부부장을 지내다 서울 마지막 철수팀으로 월북했으며, 유격대 간부로 남하, 52년 3월까지 태백산맥 등지에서 활동했고, 제네바 남북 포로교환협상에 북한 대표단으로 참가했다니 고위급 인사였던 모양이다. 1953년 남로당 숙청 후 몰락과 복권을 되풀이하다 1976년 강원도 요양소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데올로기를 쫓아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김원일의 가족에게는 당장의 생존이 절박한 문제로 떠올랐다. 어린 시절 배가 고파 대구 시장 바닥에서 과일 껍데기를 주워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춘문예로 등단했던 막내 동생이 요절한 원인도 그 시절의 지독한 가난에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김원일의 생각이다.
그러나 분단의 멍에를 진 궁핍한 가정이 김원일의 문학에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1950년 아버지와 이별할 당시 겨우 여덟 살에 불과했지만, 등단 이후 김원일은 아버지를 상정한 `빨갱이`나 `공산주의자`를 작중 인물로 등장시키며, 아버지를 문학적으로 복원시켜 나갔다.
1998년에 들어서야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만, 김원일이 소설 속에서 그려 낸 아버지의 모습은 실제의 아버지와 흡사하였다. 30년 넘게 김원일의 문학세계를 지배했던 `분단문학`은 초기작 <어둠의 혼>과 장편 <노을> <불의 제전>, 그리고 , <마당 깊은 집> 등에 잘 표출되어 있다.
동생 김원우씨도 1998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곡기를 끊다시피 했던 백 군수인 은곡 백하명은 망국의 통분으로 생을 마감한다. 백 군수의 둘째 백상충은 박상진의 백부 박시룡에게서 수학하며 양정의숙, 보광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익히면서 의병운동에 뛰어든다. 후에 오른쪽 무릎에 총상을 입고 사선에서 탈출하지만 끝내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 백 군수 댁의 종으로 살림을 살고 있는 석부리의 셋째아들 어진이는 백상충과 함께 동운사로 들어가 상충에게 글을 익히며 산문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 와중에 상충의 심부름으로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몇 차례 모진 고문까지 받기에 이른다. 결국 어진이는 속세를 벗어나 스님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때부터 법명인 ‘주율’이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된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표충사라는 절에서 그는 다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고, 거듭 투옥과 고문으로 심신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속세를 잊고자 했던 주율은 자신이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속세라는 것을 깨닫고 법의를 벗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을 위해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부산감옥에서 출옥한 후, 가난한 사람들과 제 한 몸 돌보지 못하는 병자들과 함께 농장을 꾸려가며 불교와 야소교의 종교적 인류애와 비폭력주의를 몸소 실천하고자 한다.
백 군수 댁의 묘지기인 김 생원의 아들 김기조의 부추김으로 주율은 그의 행적을 쫓아다니는 강 형사가 쏜 총에 맞게 된다.
주요 등장인물: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백인백색의 인간 군상들
〈늘푸른 소나무〉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그 인물들에 있을 것이다. 대하소설의 형식을 띤 작품이니만큼 이 작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는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물도 많지만 작품의 뼈대를 이루어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늘푸른 소나무〉는 주인공에 해당하는 석주율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고 고뇌한 여타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두루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 이들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일제하 조선인들의 삶에 관한 풍부한 보고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무엇보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들을 만나 그들과 생생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주율의 스승이자 개신 유학자로서 평생을 바쳐 투쟁적 자세를 잃지 않는 백상충이다. 그는 본래 선비로서 구한말에는 신교육을 받고 새로운 문물에의 소양을 닦았으며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의병으로 종군하여 다리에 총상을 입을 정도로 행동적인 삶을 살아간 지식인이다. 그 사상적 바탕은 비록 구시대를 이끌어온 주자학에 두고 있으나 스스로 구태의연한 사상적 한계를 혁파하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입고도 백절불굴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 그의 형상은 독자들에게 선연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백상충과 같은 인물은 그 일개인의 존재 이상의 매개적 역할을 하고 있다. 백상충의 집안은 언양과 울산 근동에서 명망 높은 양반 집안으로서 그의 조부는 울산 군수를 지낸 바 있다. 그러나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노출된 그의 집안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다.
그의 형 백상헌은 지사적인 풍모와는 거리가 먼 유약한 장남으로 가산을 탕진해 가고 있으며 백상충 자신은 국권회복 운동의 일선에 뛰어들어 가문과 일신의 안위는 안중에 없다. 바야흐로 그의 집안은 몰락의 기운에 휩싸여 있는 바 이는 시대의 급류 속에서 수많은 사대부 집안에 찾아든 보편적인 운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양반계급 속에서도 새로운 체제를 수용, 기정 사실화하면서 그에 영합함으로써 이권을 누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장순후나 한 초시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그에 따라 그들의 집안은 엇갈리는 부침 속에 놓이게 된다.
또한 백상충을 따라 박상진, 박호문, 함명돈 같은 당대의 지사들과 표충사의 애국적 승려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감시와 억압에 시달리면서도 강력한 일제 통치력에 맞서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간다. 그들을 따라 이야기의 무대는 멀리 간도로까지 확장되면서 당대를 파노라마적으로 그려내는 역할을 한다.
주율을 중심으로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백상충을 주축으로 개신유학파 내의 입헌주의적 경향과 공화주의적 경향 등 당대에 부상하던 국권회복 운동의 흐름이 드러나고 이것이 만주와 중국대륙의 여러 독립운동 조류들로 이어진다면 주율을 매개로 삼아 나타나는 인물들은 당대 조선과 조선인들의 삶의 실상을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 물은 삼월이(흥이 엄마)와 김기조, 두 사람이다.
어린 주율을 좋아하던 삼월이는 백상충의 장인인 조익겸을 따라 부산에 나가 여관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조익겸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 등 시대의 어둠에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김기조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작품의 말미에 가서는 삶의 행로를 극적으로 전변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 그의 이미지는 극히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명민한 머리로 출세를 꿈꾸는 그이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모럴 의식이 없다. 그에게 여자란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유희의 도구일 뿐이고 흥이 엄마의 불륜행각은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한 호재일 뿐이다. 지식은 출세를 위한 장식이 되고 지사들의 투쟁은 자신과는 별 무관한 일이다. 그들은 일찍이 채만식의 〈탁류〉나 박태원의 〈천변풍경〉 등에 나타났던 어둠의 인물들과도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진과 백상충에게 혹독한 고문을 선사하는 강오무라 형사 역시 민족적 양심을 망각한 존재로서 삼월이와 김기조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어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뿐이 아니다. 주율의 구도자적인 풍모는 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를 불도에 귀의케 하였다가 독립투쟁에 뛰어들도록 하고 감옥을 경유해서는 다시 계몽 및 농민운동가로 나서게 한다. 그의 행동반경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수많은 인물들이 작품을 새롭게 수놓게 된다. 독자들이 그의 어머니 너르네와 아버지 부리 아범, 형들, 누이 율포댁과 선화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당대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과 정서일 것이다.
율포댁과 맺어져 주율의 자형이 되는 곽돌은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일로 매진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무기를 구입하는 임무를 띠고 곽돌 및 주율과 함께 북지로 파견되었던 경후는 이후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시종 주율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잃지 않고 헌신해 가는 정심네의 형상에서 독자들은 시대의 어둠에 휩쓸리지 않는 순수를 엿보게 된다. ‘궁형’을 당한 후 개심, 주율의 추종자로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마침내는 강오무라를 처단하기에 이르는 김기조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
일제시대 같은, 또는 한국전쟁기 같은 시대적 격변기를 배경으로 대하소설에 육박하는 대장편소설을 쓰면서 영웅 아닌, 고뇌하는 개인을 창조해 낸 작품은 흔치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사회적 문제를 자기 문제화해 가면서도 시류에 직접 좌우되지 않는 고유성을 간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개인주의적 체질의 인간이 사회적 문제에 눈뜨기 어려운 것과 이치가 같다. 그럼에도 주율은 성격과 환경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유형의 인물이다. 일제시대 비평가인 임화의 어법을 빌리면, 내성과 세태의 분열을 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인물을 내세웠음에도 의지적으로 그 조화를 추구하는 인물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 그럼으로써 개인은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어떻게 대응해 가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늘푸른 소나무〉가 지닌 일차적 의미일 것이다. 이 작품이 제공하는 적나라한 일제시대상과 함께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 주율이 고뇌와 고통 속에서 그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늘푸른 소나무〉는 무엇보다 이 같은 상승의 구조를 구축한 수준 높은 교양소설이다.
–― 방민호(문학평론가)
“완벽한 정리란 있을 수 없지만 힘써 손을 본다면 그동안 지고 있던 마음의 채무에서 벗어나리란 결벽증이 일을 부추겨, 1년 가까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 소설은 장년기 한 시절을 바친, 어느 작품보다 애증이 남은 소설이기에, 자신을 다룬다는 마음으로 애써 다듬었으나 더 정련하지 못했다면 이는 내 능력의 한계일 것입니다. 큰 줄기와 주요 장면은 초간본 그대로 살렸으되 결과적으로 4할 정도를 추려낼 수 있었습니다.
이순을 맞아 개정판 정본을 출간할 수 있으니 초간본이 나온 지 아홉 해 만이고, 마음의 부담에서 놓여나는 해방감에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