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아닌 서사의 실험! 소설의 경계점에서 소설로 글쓰기를 말하다!
김태용 장편소설『숨김없이 남김없이』. 2005년 <세계의 문학> 봄호로 등단한 김태용의 첫 장편소설로 소설의 경계와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작품이다. 문학 계간지 <자음과모음>에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서사 아닌 서사의 시험, 언어 아닌 언어의 실험을 화두로 소설의 경계에 있는 ‘글쓰기’에 관한 커다란 이야기를 펼쳐낸다.
김태용
2005년 [세계의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오른쪽에서 세 번째 집」을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한국일보문학상, 웹진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 시집 『뿔바지』를 펴냈다. 사운드텍스트 그룹 A.Typist 와 파괴4중주에서 활동 중이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있다.
제-1장 때늦은 모든 것
제0장 뜻밖의 모든 것
제1장 엇나간 모든 것
제끝장 모든 것의 모든 것
믿을 수 없이, 믿을 수밖에 없이 – 김태용과 나눈 좌담의 이름과 구멍들 (문학평론가 최정우)
글쓰기는 약이자 독이기도 한 무엇,
약이기 때문에 독이 되는, 독이기 때문에 약이 되는 무엇.
“너는 약으로 무장한 치명적인 병균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문학에 이런 소설은 없었다!
서사 아닌 서사의 시험, 언어 아닌 언어의 실험!
소설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소멸되고 생성되는 언어를 통해
‘글쓰기’를 말하다!
“허공의 구멍으로 물이 빠지는 소리가 엇것 엇것 들린다.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아가미를 연다. 읽는 순간 의미가 사라지는, 사라지면서 또 다른 의미를 교란시키는 언어의 지느러미가 파닥거린다.”
■ 소설의 경계와 최전선에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다
언어란 무엇일까? 서사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글쓰기란 무엇일까?
2005년 『세계의 문학』 봄호로 등단한 후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를 출간하고,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김태용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 나왔다. 서사 아닌 서사의 시험, 언어 아닌 언어의 실험을 화두로 소설의 경계에서 끝없이 소멸되고 생성되는 언어를 통해 ‘글쓰기’에 관한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구성해낸 작가의 새 소설은 문학 계간지 『자음과모음』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 언어의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풀어내다
김태용 작가의 소설 안에서 활자화된 언어들은 차가운 얼음을 뚫고 수면 위로 올라온 빙어의 날뛰는 생동감과 마치 시의 언어를 품은 듯한 운율감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 안의 언어들은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논리를 깨뜨리거나 없애버려도 그것 자체가 다른 어떤 길을 만들어주고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시켜준다. 지우면서 동시에 써나가고, 써나감으로써 오히려 지워가는 단어들은 기존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새로운 명명법을,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면서 이야기를, 장면을 계속해서 표백한다.
■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단어들의 짧은 나열, 부조리한 대화의 형식들, 괄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언어, 시점의 모호한 변환, 잠언적인 언어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에 더 근접한 듯 보인다. 일반적인 소설론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이 『숨김없이 남김없이』 안에서는 모두 무기력해지고 무능력해진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이라는 트랙을 교묘히 유지해가면서 서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대해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순차적인 서사의 진행이 때로는 중단되고, 지연되며, 시간을 시간 속으로 말고 감아서 다른 시간으로 토해놓는 기법을 통해 뒤틀린 서사를 표현한다.
■■■ 줄거리
“그가 걸어 들어간 곳으로 그녀도 걸어 들어갔다.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처럼”
세계의 끝도 시작도 아닌 어중간한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던, 개들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곳에 위치한, 미친 노파, 즉 미파가 살고 있는 그곳에 그는 십오 년 만에 다시 흘러들어간다.
며칠 동안 빈 방을 배회하던 그는 밖으로 나가 매트리스와 의자와 책상을 가져온다. 삐꺼덕 삐꺼덕 소리를 내며 그를 보듬어주는 매트리스에 앉아서 책상과 의자를 바라보던 그는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의자를 밟고 있다가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해 밖에 존재하는 모호한 문장으로 그에게 치유할 수 없는 내면 통증을 안겨준 작문 선생과 작문 시간, 자신이 집착하던 글 등을 떠올리던 그는 자신의 지난 이십 년을 돌아보면서 이십 년 동안 자신을 살아남게 했던, 그 무언가를 생각한다.
노트에 산보라는 단어를 쓰고 밖으로 나온 그는 은단 냄새에 대한 생각으로 은단을 사기 위해 약방을 찾는다. 약방은 언제나 거기에 있지만 지금 여기엔 없는 곳이다. 부재함으로써 존재하고 부재와 부재 사이를 왕복하고 반복함으로써 다시 존재하는 그곳. 약도를 보고 명확히 찾아갈 수 있지만 그렇게 찾아간 곳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곳. 약방을 찾아가는 길에 그는 그녀를 만난다. ‘약방으로 데려다줘요’라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그곳으로 데려다달라는 그녀를 그는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온다.
그와 그녀의 동거. 전혀 다를 줄 알았던 그와 그녀의 관계는 진부한 연애 궤도에 진입해 정해진 수순을 착실히 밟아 나갔다. 점점 보편이라는 상태로 미쳐갔던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개체였다가 점점 하나의 유형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날 약방에 다녀오겠다며 그 방을 나간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떠난 척하며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온다. 개들의 언덕을 이미 내려가버린, 그가 없는 그의 방 안으로.
그녀는 미파의 카레를 먹으며 출산을 준비한다. ‘뭐’라는 말을 남긴 채 아이를 낳고 죽자 미파와 아이, ‘뭐’만 남는다.
‘뭐’는 언어를 배우지 못한 입장에 서 있는 언어 사용자다. ‘우리’라는 미지의 존재가 ‘뭐’를 선택한 것도 어쩌면 ‘뭐’가 언어가 없는 혹은 목소리와 시선만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또 바로 그 때문에 ‘뭐’에게 실험 아닌 실험을 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도 언어를 사용해 무언가를 명명하고 지시한다. 명명을 하는 순간 바로 그게 또 그 ‘것’이 된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큰 것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작은 것으로, 미시적인 것으로 들어가 나중에서 추상적인 시간 개념으로 다시 돌아가며 서사를 풀어간다. 제목 그대로 숨김없이 남김없이.
추천사
▶ 이 소설은 끝없이 생성되면서 소멸되는 특이한 괴물이다. 이 소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장은 이루어지자마자 지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모든 이야기는 언제 그런 이야기가 있었냐는 양 꼬리를 감추고 다시 변형되어 생성한다. 그렇다면 작가의 생각은? 작가의 사유는 이 특이한 괴물의 미궁(몸-텍스트)에 영원히 갇혀 맴을 돌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이 괴물 자체의 형식이 그의 사유일 것이다. 이 반복되고 지워지고 사라지는 형식이야말로 소설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그러니 작가는 멈출 수 없이 계속 다시 쓰는 운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 이준규
▶ 이것은 외로운 전쟁이다. 빛의 속도만큼이나 분주해진 문학과의 전쟁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천 번의 담금질이 담겨 있다. 이때껏 우리에게 이런 문학이 있었던가. 고독하며, 질기고도 질긴 울음이 새겨져 있다. 우리 이제 한 번쯤은 솔직해지자. 그동안 우리들이 외면하고 부인했던 문학의 순수함을. 문학은 그림으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나노 기술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단어와 단어의 조합, 문장과 문장의 배치, 문자와 사유의 결합체임을. 문학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문자밖에 없음을. 숨김없이, 남김없이 보여주는 순수함의 결정체를.
-소설가 박성원
▶ 언제나 기다려왔고, 언제고 그 기다림을 중지하고 싶었다. 따옴표로 가둘 수 없는 말들, 괄호로 가릴 수 없는 말들, 누구나 들을 수 있으나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들, 그것들이 오늘 내게로 왔고, 긴 기다림의 눈을 소란한 침묵과 고요한 수다로 감겨주었다. 그러니 눈으로 보지 말고 혀로 읽어야 할 것이다. 숨김없이, 남김없이. 그렇게 언어의 얼굴이, 아니 얼굴의 언어가 드러난다. 나와 당신이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것)들을 우리는 여기서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당신들도 눈을 감지 않겠는가, 뜨지 않겠는가. 숨죽이고서, 그(것)들의 혀를 자유로이 놀릴 수 있도록…….
-소설가 한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