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시간을 기록하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삶의 이면에 있는 어두운 진실을 파헤쳐온 이현수 소설가의 네 번째 장편소설 『사라진 요일』. 그동안 여성, 노인, 가족, 동성애 등 사회적 문제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거나 한국전쟁 중에 벌어진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통해 시대의 비극적 진실을 그려온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는 우리 삶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함정들, 그리고 함정에 빠진 사람들을 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는 검은 세력의 실체에 접근했다.
주제와 스타일에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이 작품은 계간 《자음과모음》2013년 겨울호부터 2014년 가을호에 ‘용의자 김과 나’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작품으로, 3년의 퇴고 과정을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낯선 편지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미스터리적 기법은 독자를 충격적인 결말로 숨 가쁘게 몰아간다.
이현수
라디오 구성작가로 일하다가 1997년 제1회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송순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무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토란』 『장미나무 식기장』과 장편소설 『사라진 요일』 『나흘』 『신 기생뎐』 『길갓집 여자』 등이 있다. SBS 드라마로도 제작된 『신 기생뎐』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 3개 국어로 번역 출간됐으며, 2015년 프랑스 르몽드에 리뷰가 실리기도 했다.
문단에 요리 좀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틈틈이 요리와 책, 삶에 관한 폭넓은 칼럼을 썼다. 이 책은 조선일보에 2년간 연재한 요리 칼럼을 모은 글이다. 그동안 눈앞의 산해진미에 홀려 전통 음식을 홀대하진 않았는지, 이대로 가다간 그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향토 음식 조리에 관한 기록을 작정하고 남겼던 참이었다. 최근 음식의 간이 점점 짜진다는 아들의 평가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해로 꼭 예순 해를 살았다.
프롤로그
사라진 요일
에필로그
작가의 말
“어차피 세상은 선과 악이 공존한 채로 굴러가는 거야”
일상을 무력화시키는 검은 세력의 실체!
『사라진 요일』은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소설가 ‘나’에게 동료 작가인 ‘정원’ 선배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불안한 듯 보이는 정원 선배는 한 권의 노트를 나에게 건네주고 황급히 사라진다. 그 노트에는 한정원 자신이 고향인 ‘동동섬’에 가기까지 주위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과 ‘동동섬’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 그리고 그 이후에 경험한 믿지 못할 일들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떠오르는 건 동동섬뿐이다. (……) 벽이, 의자가, 책상이 조금씩 조여오고 샤워를 하다가 목이 샤워 호스에 졸리는 환각에 빠질 때면 나도 모르게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럴 때마다 ‘제거’라는 말이 떠올라 발길을 돌리긴 하지만. 이런 증상에 대해 전문의와 상담하고 싶지만 그건 안 된다. 사건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저들과 약속했으니까. (12쪽)
나는 위기에 빠진 정원 선배를 위해 노트에 기록된 내용을 소설로 재구성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평생 함구하기로 ‘보안 유지’ 각서에 사인을 한 동동섬 사건을 세상에 폭로함으로써, 정원 선배와 친구들을 검은 세력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소설에 나오는 한정원과 고향 친구들은 가명으로 표기했다. 지명조차 동동섬으로 바꿨지만 당신들은 얼마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줄 믿는다. 혹시 모르는 이가 있다면 당장 인터넷 검색창에 ‘라론 증후군(Laron syndrome)’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알게 될 것이다. 소설 속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15쪽)
시간이 멈춰버린,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들!
그 미스터리한 존재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진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소설은 어느 날 ‘정원’에게 날아든 낯선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널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 복수할 그날을 위해 난 또 오늘을 산다”라는 협박 편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정원은 친구들과 고향인 ‘동동섬’으로 향한다. 주희와 대호 그리고 의사가 된 상협과 함께 머물게 된 동동섬 펜션에서 ‘영원히 늙지 않도록 방부 처리된 듯한’ 모습의 김경훈과 대면한다. 그리고 의사인 상협으로부터 그가 유전자 돌연변이로 성장이 멈춰버린 라론 증후군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계를 차지 않았어. 주체하지 못할 만큼 넘쳐나는 시간. 시계를 쳐다보면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간격이 넓어지지. 어떨 땐 시계가 달리의 그림처럼 축 늘어져 보이기도 해. 너 따위가 그걸 알겠냐고? (……) 만약 우리 미경이가 살아 있다면 나도 그럭저럭 살았을 거야. 희망 없이 근근이 연명하는 이런 삶은 아니었을 거라고.” (171쪽)
동동섬에 고립된 정원과 친구들은 김경훈으로부터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에콰도르에 머물던 김경훈이 자신을 연구 실험 대상으로 이용하려는 전 세계적 조직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탈출한 것도, 정원과 친구들을 동동섬으로 불러들인 것도 모두 복수를 위한 그의 계획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예상치 못한 위험에 처하게 된 정원과 친구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에 가까스로 구조된다. 그리고 구조된 수송기 안에서 정원은 자신이 더 큰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지막 반전까지 치밀하게 계산한 이현수 소설가는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무력화시키는 거대한 힘에 주목한다. 일상을 섬세하게 그려낸 전작들과 달리 파격적인 소재와 속도감 있는 전개가 다소 낯설기는 하지만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놓는 외부의 힘을 예민하게 감각해온 작가이가에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또한 작품의 결말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은 그 힘으로부터 우리의 일상도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