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안개소년’
진실과 허위가 뒤섞인 칼날 같은 욕망의 세상을 만나다!
『수상한 식모들』로 2005년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박진규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이 작품은 안개로 뒤덮인 얼굴로 태어난 한 소년이 세상에 발을 내디디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특별한 주인공 소년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눈으로 보이는 현실 이면의 진실, 허위와 진실이 뒤바뀌는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안개소년’은 잘생긴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은, 가스등 같은 안개가 뒤덮인 얼굴로 태어난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그는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낯선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자신을 괴물로 여기게 된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것은 물론, 이름도 없이 ‘달걀귀신’이라 불린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거기에 타인의 목소리를 그대로 복사해 내는 재주는 더더욱 그의 존재를 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이와 같은 기이한 상황들은 그에게 주체로서가 아닌 타자로서의 삶을 남긴다.
그의 삶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안개소년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흥미로운 대상으로 물화(物化)시켜 바라보고, 주인공의 인생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되고 윤색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간다. 작가는 이처럼 안개소년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를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 이면의 존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그의 기구한 이야기 속에서 욕망에 의해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고 뒤섞이는 오늘날의 현실을 꼬집는다.
박진규
1977년 북한방송 전파가 종종 흑백텔레비전에 잡히던 경기 파주 금촌에서 태어났다. 2005년 단군신화 설화를 패러디한 호랑아낙을 등장시킨 장편소설 『수상한 식모들』로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며 본명 박진규로 등단했다. 2014년 장편소설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를 출간하면서 박생강이란 필명으로 문학 활동을 새로이 시작했다. 생강이란 필명은 생강이 몸에 좋다는 어떤 건강 서적의 표지를 서점에서 보고 충동적으로 정했지만, 성자saint와 악당gang의 혼성, ‘생각의 강’ 같은 심오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대한민국의 한물간 상류층들이 주로 드나드는 멤버십 피트니스 남자 사우나의 사우나 매니저로 잠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장편소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로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2012년부터 최근까지 엔터미디어를 통해 대중문화 칼럼 [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를 연재했다.
차례
1부 밤의 거리
2부 낮의 도시
3부 안개로션
작가의 말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작가 박진규의 신작 장편소설
안개얼굴의 달걀귀신, 나는 안개소년. 쉿!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안개가 흩어지는 순간 소년은 성숙한 어른의 얼굴을 찾는 걸까?
아마 답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린 모두 안개의 시절을 겪었을 테니.- 작가의 말 중에서
『보광동 안개소년』은 『수상한 식모들』로 2005년 제11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박진규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2010년 6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인터파크에 연재한 이 소설 속에서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진실과 허위가 뒤섞인 사회 현실을 흥미롭게 담아내었다. 작가의 눈을 통해 진실과 허위가 뒤섞인,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카오스적 현실이 눈앞에 그려진다.
『보광동 안개소년』은 안개로 뒤덮인 얼굴로 태어난 한 소년이 세상에 발을 내디디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다룬다. 칼칼한 성격의 ‘로즈마리’, 냉혹한 ‘회장’과 그의 통역사 ‘안’, 캐스팅 매니저 ‘윤덕호’와 ‘강만호’ 등 소년을 둘러싼 인물들이 보여 주는 현실은 아름답고 눈부신 것만은 아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 이면의 진실, 허위와 진실이 뒤바뀌는 부조리한 현실이 그들을 통해 드러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계적인 인물인 안개소년은 그런 현실과 몽상을 뒤섞는 역할을 한다.
『보광동 안개소년』에서 박진규 작가의 화법은 짧고 경쾌하며 심중의 말을 감추는 것 같으면서도 가감 없이 모두 드러내는 식이다. 그래서 독자는 마치 모든 이야기를 작가에게 직접 듣는 듯한 기분으로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 낸 아주 낯선 존재, 안개소년
『보광동 안개소년』의 주인공은 그 출생부터 기이하다. 잘생긴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은 그는 가스등 같은 안개가 뒤덮인 얼굴로 태어난다. 막 태어난 그를 대하는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답이 없는 수학 문제처럼,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완전히 낯선 존재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안개소년의 외모와 목소리는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낮의 세상에 대한 그의 욕망을 억누른다.
나는 불쾌함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존재입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에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나를 출생신고하지 않았으니까요. 없는 사람이나 귀신이나 다를 바가 뭐겠어요. (……) 양재기 속 쓸쓸한 삶은 달걀처럼 나는 반지하방에서 낮에 홀로 빈둥거려요. 곰팡이 냄새 그득한 반지하방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이 내가 아는 유일한 빛. – pp. 14~15
안개소년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 후 모두 떠나 버린다.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안개소년은 이름도 없이 외할머니 로즈마리에게 ‘달걀귀신’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싫었던 그는 자신의 안개얼굴에 실마리를 얻어 스스로를 ‘안개소년’이라고 칭한다. 성도 없이, 이름인지 별명인지 모호한 이 단어가 그의 이름인 셈.
우리가 태어났을 때 부여받는 이름은 사회 속에서 ‘나’를 지칭하는 수단이며 나를 대신하는 것이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기호이다. 우리는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무수한 상징들로 이뤄진 사회 속에 하나의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처럼 이름은 사회라는 현실 공간 속에 나를 기입할 수 있는 나만의 상징이다.
그러나 성도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안개소년은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제도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언어로 나타낼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 그 자체, 일종의 ‘공란’이며 ‘물음표’다. 많은 사람들과 활보하는 낮의 세상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좁은 트렁크 같은 반지하방과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어두운 밤의 세상이다.
나는 나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어. 반지하방에서 어떻게 지내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복사하게 되었는지. 모든 걸 낱낱이 털어놓자 나란 존재가 진짜 괴물 같았어. 결국 여러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는 달걀귀신에 불과하니까. 난 풀이 죽어 버렸지.- p. 28
안개소년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복사해 그대로 흉내 낼 수 있는 기이한 재주를 지녔다. 대상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한 번 들으면 그대로 그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처럼 낼 수 있다. 목소리만 보자면 그는 ‘송혜교’이면서 ‘원빈’이고 ‘현빈’이다. 하지만 정작 안개소년의 실제 목소리는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탁한 쇳소리가 섞인 금속성의 아주 불량한 목소리다. 자신의 생각마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서 나타내는 그의 행동에 상대?은 그저 신기해하거나 혐오스러워한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주인공은 사회 속에서 완전한 주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자기 존재의 불확실성이 안개소년으로 하여금 삶의 주체로서 설 기회를 박탈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안개소년의 삶은 주체로서의 삶이 아닌 타자화된 삶이요, 언어로 상징화된 사회 속에서 안개소년은 아주 낯선 존재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물질이며 괴물인, 21세기에 등장한 또 다른 프랑켄슈타인이다. 작가는 안개소년을 통해 현실 사회 속에서 주체로서가 아닌 타자로서 살 수밖에 없는, 불확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드러낸다.
진실과 허위가 뒤섞인 칼날 같은 욕망의 세상을 만나다
여고생 ‘지나’와의 만남은 안개소년에게 밤의 세상에서 낮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 지나는 성형외과 남 원장과 안개소년이 만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남 원장을 통해 만나게 되는 ‘회장’과 그의 통역사 ‘안’은 안개소년에게 위협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현실의 냉혹함을 몸으로 체득하게 하는 존재이다.
회장은 태연한 얼굴로 말없이 당신의 장기와 뼈를 들춰 보고 헤집었어요. 심지어 위나 간을 갈라 보자고 제안해서 담당의가 그를 말리느라 진을 뺐다고 들었어요. 담당의는 신체구조상 당신과 평범한 인간 사이에는 아무런 변별점이 없다고 강조했어요.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으로 덮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너무나 담담하게. 담당의는 나에게 클레임이 걸린 제품의 문제점을 확인하고 폐기 처분 시키라는 눈빛이라고 표현했어요.- p. 139
자신의 다리에 핀 안개를 극도로 혐오하는 회장에게 안개소년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 달성을 향한 그의 맹목성은 수단과 방법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지워 버린다. 자신의 목적 달성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그것이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도려낸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그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안개소년을 자극하기 위해 멀쩡한 로즈마리를 치매에 걸린 것으로 꾸며 노인 요양원에 격리한다. 안개소년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뒤바꾸기 위해 다른 안개남자들을 찾아내 죽게 하거나 평범한 남자들을 독약으로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회장에 의해 인사동 거리에 버려진 안개소년은 캐스팅 매니저인 윤덕호와 강만호를 만나게 된다. 그들을 통해 낮의 세상으로 나가게 된 안개소년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윤덕호가 시키고 강만호가 써준 레퍼토리대로 담담하게 내 인생을 읊어댔어. 알고 보니 강만호는 데뷔만 못 했을 뿐 쌓아 둔 시나리오가 몇 박스나 되는 작가였어. 그는 낭만적이면서 슬프고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를 칼국수 썰듯 쓱쓱 써 갈겼어. 그의 손끝에서 안개소년은 역경을 디디고 세상에 나온 씩씩한 안개소문으로 변한 거야. 로즈마리 역시 희생정신으로 손자를 돌본 여인으로 둔갑했지. 그는 내가 털어놓은 말들을 요리조리 잘라 내고 덧붙여서 그럴듯한 드라마를 만들었어.- p. 119
새로이 안개소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서 안개소년의 일상은 극적으로 뒤바뀐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마치 신기한 물건을 바라보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은 안개소년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흥미로운 대상으로 물화시켜 바라볼 뿐이다. 그들에 입맛에 맞게 안개소년의 삶은 각색되고 윤색되어 버린다. 진실과 허위가 뒤섞인 또 다른 진실은 안개소년을 안개소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안개소년은 삶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이후 회장에 의해 조작된 안개남자들의 죽음 이후 안개소년은 다시 한 번 안개소문에서 안개장애로, 안개전염병으로 최후에는 안개로션으로 변하게 된다.
변신의 과정을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안개소년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대상, 그래서 신기하고 괴물이나 질병, 그리고 오물처럼 터부시되는 대상이다. 작가는 안개소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대상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안개소년의 눈에 비친 현실은 거짓과 모순이 진실인양 꾸미고 앉아 있는, 자신보다 더 괴물 같은 곳이다. 작가는 『보광동 안개소년』을 통해 욕망에 의해 진실과 허위가 뒤바뀌고 뒤섞이는 오늘날의 현실을 꼬집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과연 그러한가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언론으로 통해 보도되는 완전한 진실은 없다는 것이다. 허위가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입맛에 맞지 않은 진실이 거부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