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괴물에게 널 뺏기고 싶지 않아!
한국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성취한 작가 최인석의 장편소설『그대를 잃은 날부터』. 문화웹진 ‘나비’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괴물’ 같은 세상에 몸과 마음을 훼손당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준성은 술집에서 선배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다짜고짜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진이를 만난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사람은 연인이 되고 동거를 시작하지만, 준성이 그녀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케이블 쇼핑 방송국에 모델로 취직한 진이는 필요하지도 않은 온갖 물건들을 사들이고, 준성은 그런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1부
2부
3부
에필로그
작가의 말
“널 잃고 싶지 않아, 저 괴물에게 널 뺏기고 싶지 않아!”
욕망의 세계에 중독된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한 순간 세상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소설은 작가 최인석의 간절한 절규다!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우린 모두 어떤 마술에 사로잡힌 존재들 같아. 마술에서 풀려나야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될 그런 존재들. 어떻게 해야 이 악착같은 마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최인석 작가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 『그대를 잃은 날부터』는 문화웹진 <나비>에 다섯 달 동안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철저한 욕망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에 절망하며 사회에 이익이 되는 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려는 남자와, 연예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그 세계의 권력자들에게 성상납을 하며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물거품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려는 여자의 위태로우면서도 끝내 훼손되지 않은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나는 가치 같은 것을 창출해내고 싶은 생각이란 별로 없었다. 나는 파괴할 뿐이었다. 이익을.(53p)
그녀가 하는 일은 욕망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이런 거 너 없지, 하고 약 올리는 일이었다. (…) 벌거숭이 몸으로 그녀는 이놈의 세상에 물거품 같은, 흙탕물 같은 욕망을 만들어 보태고, 스스로 그 욕망의 물거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117p)
■ 욕망에 압도된 세상을 경멸하는 남자,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를 사랑하게 되다!
해커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준성. 그는 삶의 목적도, 존재의 이유도 뚜렷하지 않다. 세상은 의미 없는 것투성이고, 온통 가짜인 것들만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 시스템에 길들여져 진짜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소모될 뿐이다. 준성에게 세상은 ‘괴물’이며 사람들은 덧없는 환영에 사로잡힌 노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끄고 싶다. 세상에 반발하고 싶지도, 그 안에 복속되고 싶지도 않다. 그런 그가 한 여자를 만난다. 이름 없는 패션모델이자 배우의 꿈을 안고 있는 진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준성은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빚을 내서라도 최고급 가전제품에 명품들을 사들이는 쇼핑 중독인 여자, 스스로 상품의 일부가 되어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홈쇼핑 채널의 쇼 호스트 일로 돈을 버는 여자, 어떻게든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자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주는 여자, 그런 삶을 회의하면서도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는 여자. 진이는 그런 여자다.
준성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괴물’의 성장에 일익을 하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괴롭기만 하다.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준성은 끝내 그녀를 버리지 못한다. 그녀의 죄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죄는 이 괴물 같은 세상에 있다. 그녀를 망가뜨리는 건 허망한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압도되어 있는 세상 그 자체다.
세상에 대한 준성의 경멸과 분노는 극에 달한다. 하지만 결국 그가 자유로워지게 된 건 그러한 세상의 파괴가 아니라 괴물을 괴물로만 보는 이상 자신 역시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 안에도 괴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였다. 괴물이 아닌 존재로서 괴물을 경멸하는 이상 싸움과 파괴는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 싸움과 파괴의 열망이 내포하고 있는 ‘대상을 잠식하려는 욕구’가 결국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이 악착같은 마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누가 마술에서 풀어주냐고 물었지? 아직도 모르겠냐? 괴물이 괴물을 마술에서 풀어주는 거야. 당연하지. 왜? 우리가 다 괴물이거든. 괴물과 괴물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를 마술에서 풀어줘야 하는 거야. 싸우고 죽일 게 아니라. 인간은 모두 괴물이니까.(107p)
■ 최인석 작가의 이 시대를 향한 간절한 절규
순수 리얼리즘에서 출발, 한국문학 최초로 마술적 리얼리즘을 성취한 작가 최인석. 환상적 ? 신화적 요소를 참담한 현실과 절묘하게 버무려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해왔던 최인석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는 환상성을 배제한 순수 리얼리즘을 선택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작가는 작품 전체를 통해 이 시대는 ‘환상’을 사고파는 시대이며, 우리 모두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모른 채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가 조장하는 욕망이라는 ‘마술’에 걸렸다고 이야기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양식’을 통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렸던 그가 이번에는 양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들, 예컨대 자신의 것,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이 환상에 불과하다’라는 문제의식 자체를 서사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로소 그녀는 준성이 말한 괴물이 무엇인지 짐작할 것 같았다. 그녀가 어떤 괴물의 마술에 휘둘렸는지 알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녀는 난폭하고 무모했다.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값비싼 물건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패션쇼도, 런웨이도, 영화배우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서진의 것이 아니었다. 마약류 관리법 위반 범죄자라는 누명이 그녀의 것이 아니듯이. 준성의 말은 옳았다. 그녀가 진정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명과 같았다. 그녀는 남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믿었다. 이 세상이, 이 구렁텅이 같은 세상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원했다. 그것을 구별할 줄 몰랐다. 그녀는 타인들의 그 어마어마한 욕망에 압도당했다. 작은 의심이라도 해볼 틈이 없었다. 구렁텅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가 구렁텅이였다.(331p)
준성이 자신 역시 괴물임을 인정하는 순간 위태로웠던 자신의 사랑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처럼, 진이 역시 그동안 자신이 사로잡혀 있었던 욕망이 진정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 끝없는 추락을 멈출 수 있게 된다. 『그대를 잃은 날부터』는 그 두 사람이 그러한 발견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한편 그것은 그들이 비열한 욕망의 세계에 몸과 마음을 훼손당하며 결국 자신의 것을 모두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므로 참혹하며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참담한 밑바닥, 바로 그 지점을 직면하고 통과해야만, 그 밑바닥을 스스로의 힘으로 품어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추천사
내면화된 천민자본주와 사랑의 생리를 파고드는 최인석의 문체는 날카롭고 매혹적이다. 그것은, 그녀의 몸과 생리에 스며들어 그녀의 존재를 제멋대로 농락하는 비열한 욕망의 촉수들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그의 속 깊은 감수성과 맞닿아 있다. 그녀의 몸을 숙주로 삼은 소비문화의 화려한 이미지들과 그것들의 통로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디지털 시인’의 의식이 때로는 쓰리게 맞부딪히고, 때로는 소리 없이 교신하며 칠흑 같은 밤하늘에 푸르스름한, 그러나 눈부신 홀로그램을 띄운다. 거울들의 감옥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 웅크린 그녀의 몸과 마음에 순수 감각이 조금씩 움트고, 오랜 기다림과 침묵의 교신 끝에 훼손될 수 없는 사랑이 다시 피어오른다. ―황광수(문학평론가)
■ 줄거리
준성은 술집에서 선배인 김영규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맞은편 쇼파에 앉아 다짜고짜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진이를 만난다. 두 사람은 이 인연으로 연인이 되고 동거를 시작하지만, 훗날 그녀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케이블 쇼핑 방송국에 쇼 호스트로 취직한 진이의 취미는 쇼핑.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온갖 물건들을 사들이는 그녀를 준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진이의 직업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진이도 다시금 다른 일을 찾으려 하고, 그런 와중에 ‘육정수 감독’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다시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온다. 진이는 거절하고, 그 모습을 지켜본 준성은 그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한다.
준성과 진이가 동거를 하게 된 것은, 진이의 카드빚 때문이다. 과도한 쇼핑으로 불어난 카드빚을 감당할 수 없어 진이는 전세방을 빼서 카드빚을 갚고는 준성의 아파트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진이는 육정수와 계약적으로 몸을 섞어온 관계였다. 진이는 그의 말을 잘 들으면 자신에게 기회를 줄 거라고 믿었고, 육정수는 진이의 그러한 욕망을 이용하여 그녀를 마음껏 유린했다.
진이를 만나기 전, 준성은 정우와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영화의 시놉시스를 이야기했고, 이틀 뒤 서울로 돌아와 실제로 준성은 정우의 영화사와 시나리오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진전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자 잊게 되었는데 진이를 만나고 다시 그 일이 떠올랐다. 준성과 정우가 영화 속에 담고 싶어 했던 메시지가, 진이의 삶을 보며 강렬하게 자극되었던 것. 그리고 곧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던 준성은 괴물 같은 이 세상에 대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욕이 인다. 그 일환으로 해커 일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준성은 친구 정우로부터 진이가 정우의 아내에게 돈을 여러 번 빌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진이의 일기장을 통해 준성이 진이를 처음 만난 날에 관한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날 진이는 두 번째 낙태수술을 받았고, 호텔방에서 뭔가에 취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준성은 육정수와 진이의 관계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낀다. 하지만 준성은 진이에게 그 일을 추궁하고 책임을 묻는 건 잘못된 거라고 여긴다. 홀로 마음속에서 괴로워할 뿐이다. 한편 진이는 사채까지 끌어다 쓴 상황이 오고, 준성과 진이는 내심 각각 상대가 자신을 떠날 거라는 불안에 떤다. 준성은 괴로워하다 진이를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빚을 갚아주기로 마음먹는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둘은 오랜만에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지만, 어느 날 그녀가 마약 관리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