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발불량 청춘에 대한 우아한 원산폭격
『군대 이야기』는 ‘군인’과 ‘군대’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성들이라면 빛나는 청춘에 한 번씩은 거치는 군대. 힘든 만큼 이야깃거리도, 추억도 많이 있다. 이 책은 군대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에 집중하며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군대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군대 안에서의 친밀감과 소통, 더 나아가 군대 문화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들에 대해 조명한다.
김종광
197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수학했다. 1998년 계간 『문학동네』 문예공모에 단편 “경찰서여, 안녕”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해로가”가 당선되었다. 작품으로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2000) 『모내기 블루스』(2002) 『낙서문학사』(2006) 『처음 연애』(2008), 장편소설 『야살쟁이록』(2004) 『율려낙원국』(2007) 『첫경험』(2008) 『착한 대화』(2009) 『군대 이야기』(2010) 등이 있다. 대산창작기금과 신동엽창작상, 그리고 제비꽃서민소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여자가 다짜고짜 군대 이야기를 해달라면 남자는 기분이 어떨까? ‘이게 뭔가?’ 싶어 처음에는 기억에 남는 군대 이야기 한두 개쯤 들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들의 기억 속에 군대란 결코 웃고 떠들며 이야기할 만한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여자와 마주 앉은 소개팅 자리에서 느닷없이 군대 이야기라니……. 적잖이 황당할 것이다.
김유정, 채만식에서 이문구, 성석제로 이어지는 ‘이야기 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는 김종광 소설가의 장편소설 『군대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작가는 그간 전작들에서 해학과 풍자를 통해 인간 세태의 이모저모를 탐구해왔다. 그리고 이번 소설에서 그는 ‘군인’과 ‘군대’라는 대상에 대한 유쾌한 통찰을 선보이고 있다.
아마존보다 먼 곳, 그들이 살고 있다.
아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군인은 강하지 않다. 그들은 온갖 장비와 무기로 무장하고 있지만, 어떤 첨단 무기로도 보호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혹 잊어버리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소설은 바로 그 지점을 짚어내고자 한다.
“물론 나의 이야기와 관점은 코끼리를 만졌던 여러 장님 중, 한 장님의 객소리에 지나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들, 가장 역동적이어야 마땅한 나잇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로 까마득하게 높이 축척된 연장자들에게 눌려 있는, 그들을 위한 얘기가 드문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사실에 가까운 코끼리가 그려지려면, 만져보는 장님이 많아야 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 먼 군대를 소재 삼아,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군대와 군대 경험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고민하는 이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았던 군대라는 공간에 대한 ‘친밀감 회복’을 바라고 있다.
더불어 그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군대문화’에 대한 풍자를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요소요소에서 독자들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군대를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유한다.
이 소설은 ‘군대’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고 있다. 시나브로 우리 사고와 인식을 지배해온 군대 문화라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조롱과 폭력, 까라면 까야 한다는 말로 표상되어왔는데, 그러한 인식은 ‘비인간적인, 너무도 비인간적인’ 상황들을 초래하기도 했다.(이 소설에는 군대 자살자에 대한 수치가 나오는데, 그 수가 한 해만도 백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가장 강하고, 튼튼하고, 안전한 곳이어야 할 군대에서 자살로 죽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니 아이러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서 군대라는 곳이 왜 폭력이 성행하는 곳인가,라는 물음을 묻기 전에 왜 폭력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물음을 물을 수 있다. 요즘이야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는 말들도 많지만, 언제 요즘 아닌 적이 있었던가.
물론 이 소설에도 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어떻게 군대를 닮아 있고, ‘군대’와 ‘사회’가 서로에게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지 그 옆모습을 비춰준다.
< 줄거리 >
이 남자 소판범, 연무대로 향하는 그의 곁에는 형이 함께하고 있다. 남들은 애인이다, 여자친구다, 심지어 부인이 와서 배웅해주는데 ‘남자’라니……. “많이 먹어둬라. 니가 먹는 마지막 사제밥이다.” “사제밥이 아니라 사자밥이구만.”
입교대에 간 소판범은 거기서 ‘김검프’라는 작자를 만나게 된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별명을 따온 김검프는 유독 숫자에 약했다. 피티 체조를 할 때마다 그가 속한 소대는 남들보다 배를 더 했다. 그러던 그가 소판범에게 고백한다. “그래야 밥을 제일 늦게 먹지. 제일 늦게 밥 먹는 소대가 제일 많이 먹더라고.”
그렇게 소판범은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남들 다 받는 주특기를 받지 못하고 ‘일빵빵’ 소총수가 되어 강원도 어느 바다 마을 ‘암비면’으로 자대배치를 받는다. 그곳은 저 유명한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지역’이다. 하지만 “이병! 소판범!”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언제 침투할지도 모를 간첩이 아닌 항시 대기 중이며 ‘타격’과 ‘요가’를 적절히 제공해주는, 그의 친절한 고참들이었다. ‘오공막사’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집합이 걸리면 “오늘은 맞아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그의 자비로운 고참들은 “야 이 멍멍이들아, 그래도 우리 때 비하면 이건 안마야”라고 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외박 날이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쾌순’이었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짐짝 같은 친구놈 하나와 남자 선배와 함께, 그것도 돈 한 푼 없이 면회를 온 것이었다. ‘암비면’이 그렇게 먼 곳일 줄 몰랐다는 거다. 선배와 친구는 쾌순과 소판범을 여관방에 밀어 넣고는 세 시간 동안 사라지는데, 핑계는 “배가 너무 고파서 오징어를 잡으러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소판범은 그 세 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겠지만, 별 사이 아니었기에 별 얘기도 못한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루는 어느 멋모르는 중대장이 까지지 않는 소초로 들어갔다가 툭 하고 지휘봉을 갖다댄 게 글쎄, 오함마로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강력했던지 소초가 와르륵 무너져 그 아래 깔려 죽게 되었다. 이를 본 소판범 당연히 비상연락을 취하려고 하는데, “나의 사고를 알리지 마라. …… 알리면 내가 아니라 니가 죽는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랬던 것이다. 작전도 아닌, 본인 부주의에 의한 사고였으므로 그 중대장의 입장에서는 상부에 알려봤자 좋을 일 하나 없었다. 어찌저찌 다른 소대원들과 돌무더기에 깔린 중대장을 꺼내놓고 보니, 가히 피에 젖은 산삼 같은 자태였다.
그리고 그는 제대 후, 소설을 한 편 쓴다.
< 추천사 >
김종광 소설의 첫 장을 넘기는 일은 늦은 밤 어느 사랑방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열어젖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 하루도 땀 흘려 일했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람들 틈에서 함박웃음을 터뜨리게도 하고 눈물을 쏙 빼놓게도 하는 이야기꾼을 보았다면 그가 틀림없는 김종광이다. 김종광이라는 이야기꾼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소설 안에서 농성 중이다. 그가 소설이라는 작고 허름한 사랑방을 지키면서 하는 일이란 우리들의 지루하고 사소한 일상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변함이 없다. 수다스럽지만 귀가 따갑지 않으며 정치적이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미학적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 변함없음을 우리 시대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소설 정신의 상수(常數)라 해도 좋을 듯하다.
– 손홍규(소설가)
출판부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소개 글을 무명작가에게, 그것도 후배에게 부탁하는 바보가 또 있을까. 김종광은 바보 같은 작가이다. 바보 같다는 것은 착하다는 뜻이다. 『군대 이야기』는 작가를 닮아 착한 소설이다. “람보 같은 주인공이 나오거나, (…) 돈으로 떡칠마케팅을 하거나, (…) 코미디화”하기는커녕, 인정받는 찌질이들과 주먹 받는 꼴통들이 수많은 ‘사실적인’ 사건사고를 풀어놓는다. 특히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양서들을 쓰고 나서야 군대에서 원하는 ‘불온서적 리스트’ 작성에 성공했다는 책벌레 사병의 이야기. 제대 후에는 본의 아니게 그 책들이 새삼 베스트셀러가 되는 꼴을 봐야 했다지. 이래서 착한 소설은 슬프다. 고문관의 답답함이 결코 개인의 성격적 결함에서 오지 않았음을 시나브로 일깨우니까. 한국 남자들은 왜 사십이 넘어서도 군대 다시 가는 꿈을 꿀까? 입대했던 놈은 많아도 제대한 놈은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보편에서 떨어져 있으면 면제거나 방위였으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초면이라도 나이와 학번을 물어보지 않으면 대화의 상상력조차 고갈되는 사회. 나의 ‘체질’임이 분명한 이 사회에서, 이 소설이 ‘불온서적 리스트’에 포함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충, 성!
– 노희준(소설가)
< 책 속으로 추가 >
사람이 살려면 그렇게도 사는 모양이었다. 수천 킬로짜리 천장에 깔려 쥐포가 되었어야 마땅할 중대장, 살려고 보니 벽 잔해물과 천장이 기가 막히게 개구멍만 한 삼각형을 하나 만들었고, 중대장은 거기에 꼭 끼어 있었다. 철모 쓴 중대장 얼굴은 벽과 땅 사이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일단 본부에 헬리콥터를 요청할 셈이었다. 내가 “현망에 병아리 병아리, 귀소가 어미닭 어미닭(여기는 철거반인데 본부 나와라!)……”까지 다급히 말했을 때,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사고를 알리지 마라!”
중대장이 밖으로 삐져나온 오른손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던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 와중에 피식 웃었다. 중대장은 다시 한 번 간절히 외쳤다.
“나의 사고를 알리면 너부터 죽는다. 제발 부탁이다!”
이해는 간다. 나라 지키는 큰일 하다 다친 게 아니고, 소초 까는 데 얼쩡거리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알려져 봐라. 진급 관련 점수 깎이는 것 둘째 치고 쪽팔려서 못 살 테다.
“상태가 어떠십니까? 살 수 있겠습니까?”
질문이 이상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중대장은 나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에 재수 없이, 개구멍에서 꺼내는 사이에 중대장이 죽어봐라. 구급 헬리콥터가 왔다고 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손 치더라도, 나는 본부에 연락 안 했다는 죄로 크나큰 고초를 겪을 수 있었다.
중대장이 어쨌든 크게 안 다치고 살 수 있다면, 나의 무전 연락은 중대장의 경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테다. 내 처지를 생각하면 무조건 무전을 때려야 했고, 중대장을 생각한다면 어찌해야 옳을지 헛갈렸다.
중대장이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고함질렀다.
“나는 안 죽는다!”
“죽으시면 책임지십쇼!”
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뭐라고 뭐라고 시끄러운(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뭐하고 자빠졌냐는) 무전기에다가는 “귀소측 감도 네 개 네 개 이상(본부 무전기 소리 겁나게 잘 들린다)!”라고 했다. ‘중대장 구출하기’에 돌입했다. 우리 열 사람의 힘으로는 천장 벽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중대장이 인솔해 온 중대원들을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밑에 깔린 중대장을 놔두고 천장 벽을 쪼개겠다고 해머질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중대장 턱 밑을 팠다. 중대장 얼굴 아래로 굴을 파고들어갔다. 바위 밑자락으로 파고든 칡뿌리 캐는 것 같았다. 역시 삽질이 최고였다!
가까스로 중대장을 빼냈다. 피 흘린 산삼 같은 자태였다. 상체는 괜찮은 것 같은데 하체는 온통 피칠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곧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제야 그 중대장의 부하들이 나타나서 경악을 했다. 어떤 미친 중대원 놈 하나가 “구급차 불렀냐?”고 했다. 그 중대장 밑에 그 중대원이시다. 오토바이도 못 올 산골짜기에 무슨 구급차를 부르라는 거야. 내 뜨악한 얼굴을 보더니, 나보다 계급이 높았던 중대원은 “시발새꺄, 헬리콥타 불렀냐고?”로 정정했다.
중대장이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울먹이며 뇌었다.
“내가 부르지 말라고 했다!”
중대원들은 긴 나무 막대기 사이에 포대를 끼어 만든 들것에 중대장을 실었다. 중대장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에 가까웠다. 군대에서는 흔히 단까(중국어 담가 擔架의 일본어 발음)로 불리는 들것 하나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라 세 개를 포갰다.
중대원 중 가장 빠른 병사는 약 1킬로미터 산속 길을 지나고 다시 약 1킬로미터의 모래밭을 지나면 있는 방파제 인근 민박집으로 달려갔다. 그 민박집은 사고 지점으로부터 일반 전화가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인 동시에 119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119와 중대원들은 각각 빈 간이침대와 중대장 실린 들것을 들고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에서 만나자마자 모두 퍼져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으로 이송된 중대장은 전치 8주밖에 안 나왔단다.
중대장의 부상 사유는 수색훈련 도중 솔선수범하다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것으로 정리되었다. 포상도 받았다! 중대장은 우리 작업반의 입을 막기 위해서인지 목숨을 구해준 것이 고마워서인지, 포상휴가 나가기 전에 집합을 걸더니 냉동식품을 잔뜩 사주었다.
P. 179~183
나는 병장 단 이후로는 졸병에게 손을 대본 적이 없다. 하지만 바로 몇 달 전 상병을 달고 있을 때는 졸병들을 무지하게 타격했다. 나는 주먹이나 발로 때리기보다는 택견 기술을 사용했다. 뛰어올라 무릎으로 타격하는 것이었는데, 졸병들 사이에서 ‘택견씹새’라고 악명이 대단히 높았다.
더욱이 하필이면 나랑 한 조가 된 이병 녀석은 나한테 제일 많이 맞은 녀석이었다.
사람 눈이 그렇다. 겉만 보고 딱 어떻다고 판단해버린다. 그것도 모두가 똑같이. 녀석은 객관적으로 행동이 굼떴고, 주관적으로 자대 온 날부터 엄청 빠져 보였고, 며칠 생활해보니 ‘개념’조차 없었다. 나만 그렇게 본 게 아니라 고참들이 전부 그렇게 봤다. 그런 선입견을 뒷받침하는 사고도 쳤다.
내무반에 들어온 지 일주일 되었을 때다. 녀석은 당연히 각을 잡고 앉아 있었다. 병장 하나가 녀석에게 외쳤다.
“거기 딸딸이 좀 줘라!”
슬리퍼를 가리키는 말이 왜 딸딸이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경상도 사투리인지 군대 전통 말인지. 하지만 모르는 것도 죄다. 녀석은 당황해서 멀뚱히 병장을 쳐다보았다. 병장이 다시 한 번 요구했다.
“딸딸이 좀 주라고.”
순간 녀석이 피식 웃어버렸다. 모르는 것도 죄인데, 제가 알고 있는 다른 것으로 바꿔 생각하기까지 했다.
사실 녀석은 죄가 없다. 얼마나 웃겼겠는가? 병장이 자기한테 딸딸이 쳐보라는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쳐 보일 수는 없고 웃을 수밖에. 그러나 군대에서는 왜 웃었는지 묻지 않는다. 자대배치 일주일밖에 안 된 놈이 병장이 뭐 달라고 하는데, 딴생각하며 웃기나 했다는 죄로 맞아야 할 뿐이다. 녀석은 그때부터 딸딸이 이병이라고 불렸다.
“딸딸아, 되게 무섭지?”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이 총으로 꼭 공비를 잡아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시발, 우리 지금 매복하고 있잖아. 개섀끼야, 왜 소리를 빽빽 질러! 정말 더럽게 개념 없네!”
P. 218~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