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28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스물여덟 번째 안내서. 2015년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소설집 『아이젠』으로 독자들을 만난 김남숙은 그간 “날것의 감성 혹은 타고난 (듯 보이는) 감각”(소설가 조해진)을 발휘해 이미지를 잡아나가는 소설을 써왔다. 2024 젊은작가상 수상작 「파주」가 수록된 김남숙의 두 번째 소설집 『파주』는 “어둡고 건조한, 어쩌면 지독하기까지”하지만, “종내에는 산뜻하게”(노태훈 평론가) 다가오는 세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불가피하게 쓸쓸하고 여지없이 슬프지만, 결국에는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여기에 펼쳐져 있다.
■■■ 출판사 리뷰
한없이 시시하고 끈질기며
영원히 궤적을 남기는, 시시한 복수
2024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파주」는 크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남자 친구 ‘정호’와 동거하는 나의 이야기다. 그들의 앞에 어느 날 ‘현철’이 나타난다. 현철은 정호의 군대 후임으로, 정호에게 군 시절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호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들에 대한 보상으로 1년 동안 매달 100만 원을 주기를 요구한다. 정호는 그 경고를 무시하려 하지만 현철은 소심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그를 몰아붙인다. 그가 겨우겨우 들어간 회사에 괴롭힘을 알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그를 협박할 것이라면서. 그걸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단돈 100만 원을 1년간 주는 것이라면서.
「파주」에서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차가운 겨울날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평범한 청춘의 모습이다. 주변에 산재한 이들의 모습은 평범하고, 시시하고,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의 삶에 갑자기 찾아온 복수심으로 가득한 시시한 ‘현철’ 때문에 나는 그간 “선명하고 무해한 눈동자”를 반짝인 ‘정호’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고, ‘현철’이 궁금하지만 그는 그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어딘가 슬프게 울고 난 사람”의 얼굴만을 보여준다.
“현철은 내 친구도, 가족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나타났고, 그저 기억하는 사람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현철의 말을 기억한다.
가끔씩은 보게 될 거야.
나는 현철이 한 말 중 그 말을 제일 좋아한다.”
논술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나’는 정호가 현철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하지만 그것을 끝끝내 알지는 못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현철을 떠올린다. “번거롭고 사치스럽고, 말하자면 슬픔에 가까운 그런 기분. 그리고 그때마다 귓가에는 서걱서걱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소리를 혼자서 파주 소리라고 부”르면서.
아무것도 아니기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두 번째 소설 「그런 사람」은 후아힌에서 휴가를 즐기는 ‘나’의 이야기다. 리조트에 체크인해 두 달간 수영장과 피자집을 오가며, 맥주를 마시는 일상은 나른하고 즐거워 보인다. 후아힌에서의 생활은 시시하고 평온했다. 갑작스레 나를 ‘선생님’으로 호칭하며 연락해온 ‘원석 씨’가 아니었더라면. 원석 씨는 몇 년 전 ‘나’의 소설 수업을 받았던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는 잊고 싶었던 기억들을 깨우는, 심지어 적극적으로 발굴해내려 하는 인물이다. 겨우 몇 달간 수업을 받은 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성 소설가인 ‘나’에게 집요한 접근을 시도하고, 선생님을 아끼고 좋아한다고 말한다.
“아니요. 선생님은 계속하실걸요. 지금 잠깐 쉬시는 것 같아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잖아요. 제가 알거든요, 그걸.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너무 좋아한 거예요.”
‘나’는 이제 그가 좋아한 선생님이 아니다. 소설도 쓰지 않는다. 소설을 쓰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만남을 요청하고, 끝내 자포자기하듯 만남을 수락한 ‘나’에게 선언한다.
“저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선생님은…….
그가 중얼거리듯 다시 한번 말했다.
아니요. 저는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을 뱉자 얼굴이 열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합석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속이 타는 것처럼 뜨겁고 손에서 땀이 묻어나왔다. 이 불쾌한 심장 소리.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뭔데. 나는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고, 잠시 멍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내가 잊고 싶어 했던 것, 선배라 믿었던 이와 좋아한다 믿었던 이들에게 당한 폭력을 목격했음을 고백한다. 또한 자신이 그 끔찍한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오지랖을 선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 ‘나’는 그저 술을 마시고, 잠시간 무엇인가를 잊고, 시시한 삶을 이어가고 싶을 뿐이다. 이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원석 씨’의 도움 따윈 필요 없이. 그리고 그 순간부터 후아힌은 도피의 장소에서 도피해야 할 장소로 변모한다.
폭력 속에서 헤매기
혹은 폭력의 미로를 따라 그리는 방식으로
마지막 소설 「보통의 경우」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데일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송 외주업체에서 일하는 ‘지수’가 등장한다. 그녀는 방송작가라는 피라미드의 맨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데, 자신의 위에서 그나마 친밀했다고 느끼던 희수 언니의 퇴사로 막내 생활을 계속해왔다. 희수 언니는 퇴사하기 전에 비밀을 고백하듯 그를 불러 “한번 볼래?”라고 말했고, 전등이 나간 주차장 일층에서 모자와 가발을 한꺼번에 벗었다. “언니의 머리는 정수리 왼쪽의 한 줌 정도 남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솜털도 없이 민둥했다. 두피가 전체적으로 붉었으며 울퉁불퉁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놀라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일하는 그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없는 야근과 지난한 회의, 업무와 무관한 듯한 잡일. 그러나 모든 것은 ‘융통성 있게’라는 말로 포장된다. 융통성 있게 살아가는 일은 그를 어느새 희수 언니와 같은 위치에 서게 한다. 끊임없이 두피가 간지럽고 머리카락이 빠져 병원을 열 군데쯤 돌아다니는 생활.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도 이를 고백하지 못하고 그저 사무실에 빼곡한 인원들에게 “혹시 가려우세요”라고 묻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
“화면이 꺼지자, 축축하고 음습한 얼굴이 검은 화면에 비쳤다. 화면 속의 내가 화면 밖의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 같은 걸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충동에 더불어, 모두가 스트레스로 과밀된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괴롭힘이 시작된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를 한 번에 풀 수 있는 열쇠는 없었다. 이 작은 사무실 안에서 작지만 확실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으며 동시에 대리만족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장난감 같은 존재였다. 먹으라고 한다면 나는 먹어야 했다.” 남은 음식들을 먹으며 몸무게가 불어난 나를 그들은 비웃었고, 이후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해주겠다는 이유로 협찬 코너에 가짜 사례자로 등장하게 한다. 그녀는 이제 다시 굶어야 하고, 10킬로그램을 빼야 하고,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빠지며 두피는 간지러웠다.
『파주』에 등장하는 삶의 공통분모는 비루함이다. 김남숙은 어둡고 건조한 문체로 비루한 인생들의 시시함을 지속적으로 복기해나가나, 그 속에서 번뜩이는 날것의 감성은 날카로운 이미지로 다가와 박힌다. ‘전망 없는 세대’로 일컬어지는 청년들의 무기력한 태도의 기저를 저릴 만큼 훑어나가는 이 소설은 언젠가 소진될 밝음을 우리에게 명시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삶을 이어나가는 태도와 그 끈질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 “시시하지만 시시하기 때문에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나갈” 자세일까? “대단한 기쁨도, 거대한 슬픔도 시시한 인생에는 끼어들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삶은 이어지기에 그 자체로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
김남숙
소설가. 소설집 『아이젠』, 산문집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을 썼다. 2024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차례
소설 파주
그런 사람
보통의 경우
에세이 나무의 주인
해설 시시한 나―노태훈
■■■ 책 속에서
거실은 전등불이 약해 아무리 켜놓고 있어도 절반은 어두웠다. 마치 절반은 늘 밤인 것처럼. 전등을 갈아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잘못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전등을 다시 갈지 않았다. 어차피 새 전등을 갈아도 잠깐만 밝을 뿐 이내 어두워지곤 하니까.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고 무소용이라고 불렀다. 지랄 전등이라고도 불렀다.
(「파주」, 12쪽)
날씨 한번 존나 춥네. 족발 시켰지? 언제 온다냐.
정호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바닥에 앉아서 간간이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사람한테 뭘 했어. 뭘 했길래. 이렇게 찾아올 리가 없잖아.
나는 말했다. 그러자 정호가 한바탕 다시 웃어 젖혔다.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순박한 웃음을 짓곤 했던 정호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뭘 하긴 뭘 해. 다 똑같았지. 일 못하면 몇 번 때리고, 군기 잡고 그게 끝이지. 그것도 못 버티면서 군 생활한 사람이 있기나 한 줄 아냐. 저 새끼는 심지어 괴롭힌 것도 아니야. 더한 사람도 많이 봤다고. 그리고 그게 언제 적…….
(「파주」, 24쪽)
이런 얘기 진짜 웃기지만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해본 적 있어요?
현철이 말했다. 엉성하게 담배를 피우며, 엉성한 말투였다.
전 없어요. 매번 고비의 고비의 고비. 이거 넘으면 또 이런 게 기다리고 있고. 근데 조금은 나아질 수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 그 방법이 비열해 보이고 엿 같아 보여고 역겨워 보여도. 어쩌겠어요. 그렇게라도 보상 받고 싶은걸……. 그게 진짜 존나게 받고 싶은걸…….
(「파주」, 47쪽)
그리고 그의 반갑다는 말에 답장하지 않았다. 나는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누구든 기억이 나든 나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그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니까. 낯선 곳에 지금 막 뿌리내린 사람 같은, 멀뚱멀뚱한 채로 방금 태어난 새끼 고라니 같은 표정을 짓는 게 나에게는 필요했다. 가벼워지기 위해, 더 가벼워지기 위해.
(「그런 사람」, 62쪽)
이만 일어나실까요. 전 이전부터 마시고 있었어서요.
나는 말했다.
벌써요? 아쉬워요. 저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사실 제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은요…….
저, 원석 님. 저는 소설 얘기해도 이제 잘 몰라요. 안 쓴 지도 됐고 안 읽은 지도 됐고 무엇보다 그냥 그런 얘기들이 이제는 재미가 없어요.
거짓말.
그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런 사람」, 90쪽)
어두운 주차장 일층에 언니가 뿜는 담배 연기가 겨울철 입김처럼 가득 찼다. 언니는 담배를 피우면서 돌연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뜬금없는 곳으로 간다고도 말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 언니는 어떤 설명도 붙이지 않고 나에게 언젠가 나도 그곳으로 오라고 말했다.
환해서 눈이 멀 것 같은 곳이라더라. 너도 언젠가 꼭 와. 나 보러.
(「보통의 경우」, 122쪽)
가려움을 참는 건, 내가 아니라 편집실에 있는 그들이어야 했다. 그들은 대개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자를 쓰고 있기에 그들의 머리와 두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들의 화장실 진열장을 가득 수놓은 탈모 샴푸와 진정제와 염증제, 그리고 그들의 주머니를 차지하고 있는 독한 스테로이드 연고를.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백열전구 밑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새빨간 두피와 당장이라도 거울을 깨부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순간들을 그들도 겪어야 했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 그들도 그런 생각을 할까. 그런다면, 정말로 그런 거라면, 그들도 나처럼 같이 가려움을 참고 있는 거라면 한번은 봐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경우」, 147쪽)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수야. 너 방송하고 싶다며. 작가하고 싶다며. 그럼 너도 그만큼의 의지를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보통의 경우」,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