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해질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이름들을
다정하게 감싸는 결연한 빛의 이야기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안윤 소설집
■■■ 책 소개
소중해질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이름들을
다정하게 감싸는 결연한 빛의 이야기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열네 번째 작품으로 안윤 작가의 『방어가 제철』이 출간되었다. “섬세한 자각과 심리의 교직이 우아하게 펼쳐지는 수작” “묵묵한 성찰, 근래 보기 드문 내공”(제3회 박상륭상 심사평 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안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수상작을 통해 (“심상과 감각을 자극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작품”을 선보인 작가는 신작 『방어가 제철』로 “각별한 관찰력”(해설, 김보경 문학평론가)과 “디테일에 대한 천착”을 보여준다.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이름들에게 전하는 안부
그 애도의 기록, 재생의 기록
「달밤」은 화자가 애정을 가지고 아끼는 ‘소애’의 생일상을 차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소애’가 먹고 싶다고 했던 육개장을 “인생 마지막 과제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서 요리”(16쪽)한다. 화자는 음식을 하는 중간중간, 소애에 대해 생각하는 중간중간, ‘언니’를 호명한다. 화자가 ‘언니’라고 부르는 ‘은주’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화자는 ‘은주’의 장례식장에서 먹었던 미지근한 육개장을 떠올린다. ‘소애’를 위한 생일상은 자연스럽게 ‘은주’를 위한 제사상과 연결된다. 화자가 두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정성 어린 마음과 사랑을 표현하는 일”(해설, 김보경 문학평론가)이나 다름없다. ‘소애’와 ‘은주’는 화자를 가운데 두고 연결되어 있다. 화자와 ‘소애’의 관계는 ‘은주’와 화자의 관계와 유사하게 반복된다. ‘은주’가 화자가 시 쓰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화자는 ‘소애’가 음악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은주’와 화자의 사랑은 화자와 ‘소애’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재생되며 기억되고, 기록된다.
살아 있는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언니가 없는데, 언니가 스스로 없기를 원했는데 살아 있는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나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달밤」, 30쪽)
표제작 「방어가 제철」의 화자는 과거에 한 시절을 함께 경유했던, 오빠 ‘재영’의 친구 ‘정오’와 재회한다. ‘재영’과 ‘정오’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세 사람은 영화, 음악, 책을 공유하며 취향 공동체를 이루면서 외로움을 나눴다. ‘재영’과 ‘정오’가 대학에 가면서 관계가 소원해지던 중, 건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재영’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완전히 와해된다.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대에 가고 싶어 하던 화자는 자신의 미술 학원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재영’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어느덧 삼십대가 된 화자는 지병으로 돌아간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정오’에게 연락해 ‘재영’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재회한다. 방어가 제철인 계절에 만난 ‘정오’와 화자는 방어를 먹는다. 「달밤」의 화자가 죽은 ‘은주’를 생각하며 제사상을 차렸던 것처럼, 이후 두 사람은 3년간 매 계절 만나 제철 음식을 먹으며 ‘재영’을 기억한다. 함께 식사를 하는 일상적인 의례를 통해 두 사람은 ‘재영’의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그렇게 혼자서는 할 수 없던 애도를, 함께 완수한다.
나는 오래전 나 홀로 은밀하게 간직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그 순간을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방어가 제철」, 72쪽)
「만화경」의 초점 화자 ‘나경’은 이혼 후 혼자 전세로 빌라를 구해 살고 있다. ‘나경’은 입주 첫날부터 집주인 ‘숙분’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다. 불쑥불쑥 나타나 참견을 한다든지, 외출할 때마다 내려다보는 등 지나치게 감시받고 있는 듯해 시달린다. 그러던 중 ‘숙분’이 혼자 집 안에서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 다행히 ‘숙분’의 친구 ‘단심’이 늦지 않게 119를 불러 위기를 모면한다. 함께 병원에 따라간 ‘나경’은 ‘숙분’이 자신에게 보였던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된다. ‘나경’의 전 세입자였던 젊은 여성 ‘이미리내’가 집 안에서 혼자 외롭게 생을 마감했고, 이후 ‘숙분’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방법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나경’은 그제야 ‘숙분’을 이해하고 집에 남아 있는 ‘미리내’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녀를 애도하고, “이름을 모르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다는 것”(116쪽)을 담담히 깨닫는다.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환풍기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야광별 스티커를 세어본다. 서른다섯 개, 미리내의 나이보다 두 개 많고, 나경의 나이보다 하나가 적었다. (……) 나경은 서른셋의 미리내를 상상해본다.
왜 하필 여기에 붙였을까. 그 궁금증은 끝끝내 물음표로 남았다.
(「만화경」, 115쪽)
안윤 작가의 세 소설은 ‘애도’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각기 다른 애도의 방식을 보여준다. 음식에 관한 디테일로 연결되기도 하는 소설들은 안윤 작가 “특유의 훈기”(해설, 김보경 문학평론가)로 감싸여 있다. 죽은 누군가의 기억을 안고 “다른 삶의 여분”을 살아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소중해질 기회조차 갖지 못했”(에세이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던 것들을 위로하고 위안하며 지금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부드럽게 등을 밀어준다.
안윤
2021년 장편소설 『나지라, 쿠르만, 이카티리나』로 제3회 박상륭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작가의 말
당신에게는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서서히 멀어졌거나 뒤돌아 떠났거나, 결코 돌아올 수 없을 이름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주 그 이름들을 부른다. 묵독을 할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때처럼 호명한다. 그 이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지만 당신은 선명하게 듣는다. 고유한 말투. 희미한 미소, 가만가만한 고갯짓을 본다.
달밤
방어가 제철
만화경
■■■ 해설
「달밤」의 화자가 은주를 생각하며 올려다본 달, 「방어가 제철」의 화자 기억 속 정오, 재영과의 바래지 않는 눈부신 장면, 「만화경」의 화자가 야광별 스티커를 보며 떠올리는 미리내(은하수). 이 각각의 광원에서 흐르는 빛은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의 심연을 건너 지금 이 자리를 비추며, 누군가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안윤의 소설은 그렇게 어떤 애도의 기록은 재생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보경(문학평론가)
■■■ 책 속으로
가끔 그 애가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게 기대어 왔으면 할 때조차 고집스럽게 혼자이기를 자처할 때요. 그런 면이 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가파른 내리막길로 점점 사라지는 소애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던 기억이 나요. 그 밤에 떴던 달 모양도요. 방구석 어딘가에 잠자코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잘린 손톱 모양의 가는 그믐달이었어요.
언니. 언니는 거기서 어떻게 지내요?
_「달밤」, 11쪽
우리는 우리 가난을 안주 삼아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죠. 그날 소주가 왜 그리 달았나 몰라요. 술이 달면 늙은 거라면서요. 내가 언니 빈 잔을 채우며 그랬죠. 술이 써도 늙어. 술맛을 몰라도 늙고. 다 늙어.
그날 후로 한참 동안 언니를 만나지 못했어요. 전화를 걸어도 문자 메시지를 남겨도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언니는 종종 그렇게 사라지곤 했으니까. 세상에서 흔적을 지워버린 사람처럼 지내다가 어느 날 불쑥 밥 먹을까, 하고 연락해오곤 했으니까요.
_「달밤」, 14~15쪽
언니를 알고 지냈다는 낯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미지근한 육개장을 떠먹으며 앉아 있었잖아요. 질긴 대파를 오래 씹으면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잖아요. 옆자리에서 언니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말들이 들려오는데, 하나같이 정확한 사실은 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어서, 가서 면전에 소주를 뿌리고 싶은 걸 참고만 있었잖아요. 분명했던 건,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언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거예요. 나조차도요.
_「달밤」, 29~30쪽
‘잘 지내?’나 ‘잘 있니?’ 그는 그렇게 묻지 않고 마주 선 채로 눈길을 피하는 사람처럼 잘 있나, 하고 묻는 사람이었다. 반찬 용기들의 뚜껑을 닫아 쇼케이스에 집어넣고 라텍스 장갑을 고무장갑으로 바꿔 꼈다. 조리대를 행주로 훔치고 수세미에 거품을 내 프라이팬을 닦으면서 지난여름 장례식장 뒷마당에서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내뿜던 그의 옆얼굴과 땀에 젖은 이마, 고깃고깃한 검은 양복을 떠올렸다. 그는 내 인중께를 보며 물었다.
잠은 좀 잤나?
_「방어가 제철」, 36~37쪽
무엇이 그토록 그 두 사람을, 그리고 우리 셋을 서로 끌어당기게 했는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었다는 것, 일찍부터 엄마 없는 집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다는 것, 뭐 하나 특출난 것은 없지만 특별하기를 원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는 것,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우리 세 사람은 안전한 집에 모여 앉아서 멀리 떠나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낯선 언어와 감정이 우리를 꼼짝없이 포위하는 곳으로. 그도 아니라면, 그저 외로운 아이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_「방어가 제철」, 47~48쪽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더는 내게 묻지 않는다. 언제부터 묻지 않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왜 오래전 연락이 끊어진 정오의 연락처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엄마의 장례식 소식을 그에게 전했는지, 그가 왜 다시 내게 연락을 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사주었는지, 우리가 왜 3년 동안 만남을 이어갔는지.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그 일들의 이유가 모두 같으며 그러므로 단 하나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방어가 제철인 계절이 온다.
_「방어가 제철」, 70~71쪽
정말 그런 생각을 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면 필규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정말 그런 생각을 한다고? 나경아. 생각은 생각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잖아.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해봐. 악의라고는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 지치지도 않는 한결같은 말투. 필규가 나경의 어깨 위에 다정하게 손을 얹으면 나경은 되레 말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긁힌 자리를 또다시 긁힌 것처럼 가슴속이 따끔거렸다.
_「만화경」, 88쪽
이사 오기 전부터 설치되어 있던 구형 환풍기에는 가장자리를 둘러 빼곡하게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떼어버릴까도 싶었지만 밤이 되면 은은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며 담배를 태우는 맛이 나쁘지 않아 그대로 놔두었다. 누가 붙였을까. 왜 방 천장이나 창문이 아니라 베란다에, 그것도 누렇게 변색된 환풍기에 야광별 스티커 같은 걸 붙여놓았을까. 나경은 궁금했다.
_「만화경」, 89쪽
알게 된 후에는 그것을 모르던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리는 일들이 있다. 아파트 수위로 일하던 아버지가 맨손으로 택배 상자를 나르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상자들을 우르르 길바닥 위로 쏟는 모습을 나경이 멀찍이서 목격했을 때처럼, 수진이 신부 대기실 문을 걸어 잠그고 눈화장이 번지도록 우는 것을 아무 말도 못 하고 지켜봤을 때처럼, 법원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필규의 서늘한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처럼.
_「만화경」, 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