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소개
| 신성과 세속, 숭고와 사랑
양극단에 놓인 두 초점 사이에서 포착되는 처연하고 아름다운 삶의 궤적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서른다섯 번째 안내서.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소설집 『어린 심장 훈련』, 장편소설 『키오스크 학교』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소설가 이서아의 연작소설집이다. 여기 천천히 소멸해가는 바닷가 마을, 신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있다. 단짝 할머니 향자와 미자, 백반집을 운영하는 지애와 지환, 요양보호사 혜란 그리고 이 마을에 새로 온 ‘나’까지. 세 개의 연작 속 여섯 인물의 삶은 서서히 그러나 매우 깊이 얽혀들어 마을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를 직조한다. “생은 직선적이거나 선형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확고하게 규정하기 어렵다”는 작가의 말처럼, 삶의 슬픔은 파도처럼 겹겹이 밀려온다. 거듭 포개어지는 실패와 낙담 사이, 우린 모두 언제나 풋내기 서퍼일 따름이다. 다만 이 이야기 속 사람들같이 따스한 온기를 지닌 이들이 곁에 있어준다면, 끝 모를 서핑 수업이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으리라. 마음 없는 신의 형상 앞에 사랑을 되묻는 쓸쓸한 심장 첫 번째 소설 「방랑, 파도」는 해변 마을의 도착한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식당을 운영하는 남매 지애와 지환(백과 반)의 집에서 하숙하며 요양원으로 출근하는 ‘나’는 그곳에서 향자 할머니를 만난다.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던 와중에 할머니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나’는 자신과 주변인들의 슬픔을 반추한다. 그리고 남매로부터 서핑을 배우면서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세계의 고통을 감당코자 한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거대한 존재가 절을 하듯이 두 손을 바다에 댄 채 엎드려 고개를 돌렸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존재였다. 나는 볼품없이 작았다. 손톱만큼 작았다. 모래만큼 작았다. 신의 앞에서, 나는 초등학생보다도 작았고 어렸으며 슬픔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성한 일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일도 아니었다. 그건 단순한 일이고, 무심한 일이며, 초라한 일이었다. — 「방랑, 파도」 177쪽 그렇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나’는 마침내 신을 만나게 된다. 해변에 강림한 그 거대한 존재는 두 손을 바닥에 대고 엎드린 채 고개를 돌려 누워 있는 ‘나’를 무심히 바라본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관심을 두지 않는 신의 형상. 하나 차라리 그것이야말로 어떠한 궁극적인 구원일지도 모른다. 숭고의 체험 속 밀려오는 압도적인 체념과 무력감,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종종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아홉 번째 파도를 지나는 풋내기 서퍼의 상실과 회복 두 번째 소설 「빗금의 논리」는 「방랑, 파도」의 백반집 남매 지애와 지환의 이야기이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성장하면서는 어머니와 자기 자식을 잃은 지애가 고향으로 돌아와 혜란을 만난 뒤, 서핑을 즐기며 상실감으로부터 점차 마음을 회복한다. 세상의 모든 서퍼는 바다를 정복하려 하지도, 파도를 통제하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 몸의 흐름을 파도의 흐름에 기꺼이 맞출 뿐이다. 혜란의 눈에 지애도 그러했다. 지애는 파도를 타고 또 타며 무수히 많은 물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 「빗금의 논리」 92쪽 무심한 신을 향해 대답 없는 물음만이 허공으로 흩어지던 어느 밤, 남매는 짐짓 신의 시야를 흉내 내어 세상을 굽어보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이들의 안간힘은 이윽고 한 장의 연(鳶)이 되어 하늘로 비약한다. 창공으로 날아오른 연 위에서 세상의 비극을 내려다보는 시야 속,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하는 얼레를 쥔 듯한 전능감으로 인해 흐느낌은 곧 잦아든다. 반복되는 비극을 ‘운명’이라는 낯설고 또 낯익은 낱말로 번역해내려는 그 어설픈 흉내,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지 않나. 낙담과 희망, 멸시와 존엄, 삶 그리고 죽음 양극단을 오가며 생을 유영하는 순례자들 세 번째 소설 「향자」는 젊었을 적 옷 만드는 법과 음식 짓는 법을 알려준 친구 미자가 쓰러지고 홀로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 향자의 삶을 그린다. 그 둘이 호시절에 나눴던 우정과 사랑 그리고 각자의 비밀을 다룬다. 모두가 서로를 의식해 행복을 가장하는 세상 속에서도 불가사의한 존재는 늘 태어나는 법이다. 타인을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은 생을 건축하는 사람들. 남이 떠들거나 말거나. 내 생이 어떤 시선 속에서 초라하거나 말거나. 나는 나의 작은 정원을 사랑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 미자는 그런 여자였다. 미자는 이 마을에 이 세상에 이 지상에 흠결 없는 생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이한 여자 취급할 때 그 마음의 근원이 미자의 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향자」 107쪽 향자와 미자를 비롯해, 세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들을 끈끈하게 결속하는 아교는 바로 그들이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모종의 죄책감이다. 그렇게 소설은 신성과 세속, 숭고와 사랑. 양극단으로 놓인 두 개의 초점 사이, 진동하는 망설임 속 포착되는 어떤 아름다움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그 과정에서 이서아 작가는 능숙하게 작품의 렌즈를 조절한다. “무의미의 바다 위에서 방랑하듯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하는, 인간 삶의 근원적 비극성과 고귀함을 향한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헌사”(강동호 문학평론가)라는 평처럼, 『방랑, 파도』는 그 숭고의 체험을 정확히 현시한다. |
■■■ 지은이
이서아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어린 심장 훈련』, 장편소설 『키오스크 학교』가 있다.
■■■ 목차
방랑, 파도
빗금의 논리
향자
에세이_ 슬픔에 관한 소회
해설_ 신을 흉내 내는 아이들(안세진 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내게는 쓰기도 일종의 살풀이인데, 사실 여행이나 씀을 통해서—이 기묘한 살풀이를 통해서—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생은 단계별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슬픔이나 울분이나 딱히 어떻게든 홀가분하게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생이란 건 차곡차곡, 한 줄기의 명확한 계단처럼, 혹은 일자로 죽 이어지는 트랙의 형태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생이란 것에 어느 정도 단계가 있기를 소망했다. 그런 식으로 사고하면 어떤 슬픔이든, 종착역으로 향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역이 되기 때문이다. 종착역이란 게 죽음에 대한 적확한 은유는 아니다. 실은 정체도 불분명한 그 종착역을 위하여, 그 미지의 성취를 위하여, 나는 내 슬픔들이 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일종의 낮은 계단이기를 바랐다.
― 에세이 「슬픔에 관한 소회」 중에서
■■■ 책 속에서
저 끝에서 저 끝까지 이어지는 물결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생각했다—그 노인의 장례는 지금쯤 끝이 났을까?/ 노인의 영혼을, 하늘의 노동자들이 데려갔을까?/ 하늘의 노동자들이 새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왔을까? 갓 태어난 영혼이 담긴 보자기를 입에 물고 날아와 땅에 도착했듯이, 노인의 영혼을 하늘로 데려다주었을까?/ 아니면 차를 타고 거기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운전을 해서. _「방랑, 파도」 중에서
퇴근 시간에 향자 할머니의 방을 지나쳤을 때, 할머니는 또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자글자글한 손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웬만한 슬픔은 이미 오래전에 견뎌봤다는 듯이./ 웬만한 굴곡은 이미 수십 번도 더 건너봤다는 듯이. _「방랑, 파도」 중에서
그날도 나는 공터로 갔다. 플라스틱 의자에는 빗물이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의자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다 바다야./ 비가 내리니까./ 나는 생각했다. _「방랑, 파도」 중에서
신의 관점에서 우리는 작은 새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의 관점을 따라 하는 것, 그건 불경하고 쓸쓸한 짓이다. _「방랑, 파도」 중에서
그건 또 하나의 수업이었다: 슬픔은 전문성과 세련됨을 박탈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전문적이고 세련된 슬픔만을 환대한다. _「방랑, 파도」 중에서
어머니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자, 이건 바다야.”/ 그리고 어머니는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쥐었다가 풀면서 말했다. “자, 이건 파도야.”/ 어머니는 잠시 침묵을 지킨 끝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말했다. “자, 너희도 이렇게 해보아라.” _「빗금의 논리」 중에서
어떤 삶은 그렇다. 혹은, 삶의 어떤 시절은 그렇다. 불행이 도미노처럼 쏟아진다. 지애는 산책을 하며 생각했다: 아이의 자전거를 밀어주면서 내가 말했었는데. 괜찮아, 너를 믿고 자전거를 믿어. 너는 훨훨 나아갈 거야, 라고.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지애는 생각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자신의 모든 말, 행동, 생각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다. 지애도 그러했다. 지애는 자신의 존재가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만 같았다. _「빗금의 논리」 중에서
얼레가 돌아갔고, 바퀴가 굴러갔고, 세상이 운행되었다. _「빗금의 논리」 중에서
그때 저 높은 곳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혜란은 고개를 들어 새를 보았다. 혜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던 것은 지애도 마찬가지였다./ 새가 된다면, 하고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새가 된다면 그들은 새의 눈으로 하늘을 감상하고 바다를 내려다볼 것이었다./ 저편의 세계에 종종 놀러갔다가/ 천연덕스럽게 돌아올 것이었다. _「빗금의 논리」 중에서
“미안하구나.” 미자가 말하며 두 손을 뻗었다. 향자는 미자에게 안겼다./ 그것이 신의 포옹 같다고, 향자는 생각했다. 신의 포옹은 냉정하다. 신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 용서한다. 그건 안온한 것이 아니라 끔찍한 것이다. _「향자」 중에서
불행한 사람은 불행으로 인해 고통받고, 불행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인해 한 번 더 고통받는다. 불행한 사람이라는 낙인은 고약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각자 불행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마음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신의 불행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감추는 요령을 고요히 단련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고백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으며 고급 도자기처럼 집 안에 고이 모셔두고 아주 정성스럽게 갈고 닦는다. 누군가 이걸 알아채거나 눈치채지 않도록 비밀스럽고 신중하고 교묘하게. _「향자」 중에서
맞는 일은 짐승이 되는 일이자 인간이 되는 일이다.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며 들짐승처럼 아파하는 동시에 끔찍한 —지극히 인간적인— 수치심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기 때문이다. 또한 맞는 일은 육체를 얻는 일이자 육체를 잃는 일이다. 온몸 구석구석 위치한 모든 뼈의 존재를 알게 되는 동시에 가혹한 고통으로 인해 몸이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쳐지는 감각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_「향자」 중에서
■■■ 추천평
작중 단속적으로 노출되는 전지적 시점의 아포리즘(aphorism)과 기호화된 도상(圖像)들은 소설이 채택하고 있는 미학적 전략을 방증하는 몇 개의 사례들이다. 어쩌면 그러한 처리를 통해 이서아의 소설이 미필적으로 획득하고 있는 ‘쾌(pleasure)’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고전적인 의미의 ‘숭고’에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안세진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