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발랄하게 넘나드는 전환의 경계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트릭스터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열 번째 작품으로 심너울 작가의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가 출간되었다. “2020년대 초, 한국 SF 황금기를 상징할 만한 표본”(곽재식 소설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왕성하게 활동 중인 심너울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거리낌 없이 횡단한다. 이러한 횡단은 세계에 균열을 일으켜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심너울 작가는 SF라는 장르와 소재를 과감하게 활용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인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내심 기대하잖아요.
그리고 인생은 그 기대가 조각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죠.”
과감한 횡단을 통해 다다른 위태롭고 즐거운 세계
「대리자들」은 “어릴 때 운이 좋아 반짝한 퇴물”(21쪽) 배우 ‘강도영’의 재기를 위한 새로운 도전으로 시작된다. ‘강도영’은 지지부진한 연기 실력으로 극단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던 중, 유혹적인 제의를 받는다. 과거에 컴퓨터그래픽 회사였던 영화사 ‘비나인 스튜디오’에서 ‘강도영’의 “얼굴을 쓸 권리”(26쪽)를 요청한 것이다. ‘강도영’은 직접 연기하지 않고도 자신의 목소리, 얼굴, 눈을 가진 ‘가짜 강도영’의 연기를 통해 유명한 배우로 거듭난다. 하지만 ‘도영’은 후배 배우 ‘나영’의 열정적인 무대 연기를 보고 자신의 ‘가짜 연기’에 회의를 느낀다. 심너울 작가는 “SF가 만들어왔던 관습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독자를 사고실험의 장으로”(해설, 이지용 평론가) 독자를 이끌고, “진짜와 가짜, 예술과 창조의 고귀함”에 대한 작가의 질문은 세계로 향한다.
사고가 없었다면 여전히 빛나고 있었을까? 도영은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의 도영은 찬란히 빛났으나, 진지하게 연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카메라를 가만히 주시하기만 해도 어른들은 그 신비한 표정에서 수백 가지의 감정과 수천 가지의 비밀을 추론해냈다. 사고가 없었더라도 잊히는 속도는 별다를 바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리자들」, 18쪽)
표제작인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에서 어린 시절 우주비행사를 꿈꿨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수지’는 “우주 개척 사업에 관심이 많”(78쪽)은 선배 ‘위랑’을 만난다. ‘위랑’은 기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수지’에게 “화성과 그 너머”(83쪽)를 잇는 ‘블록체인 시스템’ 관련 일자리를 제안한다. ‘위랑’의 회사에서 근무하게 된 ‘수지’는 “우주산업의 발전에 기생하고 있”(94쪽)다며 ‘위랑’을 비난하고 자조한다. 그러다 회사의 과장된 허위 광고가 “불법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온 외계인”(해설, 이지용 평론가)을 맞닥뜨리고, “몇 개월 전에 영업을 시작”하고도 “50년 원조라고 광고하는 것이 인간의 관습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우주비행사가 되어 외계인을 만나고자 했던 순수한 꿈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 “의미 없음의 어쩔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떻게 우주를 선망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어떻게 중력의 족쇄에서 벗어나 그토록 광막한 공허 속을 둥둥 떠다니는 자신을 꿈꾸지 않는 게 가능하죠? 우리는 우주개척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 세대는 진정한 우주 개척의 불씨와 함께 태어났어요. 우주적 혁신의 세대라고요. 민망하긴 하지만, 저는 외계인을 보고 싶었어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우리와 어떻게 다르게 생겼을까,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죠.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69~70쪽)
「문명의 사도」는 “외계 행성에서 황제를 대리하는 집정관”(114쪽) ‘호라티아’의 이야기다. “제국적 세계관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설, 이지용 평론가)하고 있다. ‘호라티아’는 문명을 전파하고 개척하기 위해 당도한 ‘미로 행성’의 “생태계를 독점하고 있”(124쪽)는 거대한 공생체 식물 ‘실피움’을 발견한다. ‘실피움’에게서 “제국과 닮”(136쪽)은 강력한 생명력을 엿본 ‘호라티아’는 “이 아름다운 생물을 해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호라티아’는 ‘미로 행성’을 파괴하라는 황제의 명을 어기며 제국을 배신한다. ‘실피움’을 통해 작가는 “국가나 권력의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지향점이자 세계관 혹은 담론의 형태”를 떠올린다. 제국주의라는 서구적 세계관을 끌어와 “2020년대 한국” SF로 이야기의 방향성을 비틀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주의 탐험가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행성이 있으며, 그 모든 행성은 제각기 겹치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 실피움은 아름다운 존재일까? 모르겠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다.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 버섯 숲을 이루는 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말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나는 문명의 사도로서 주어진 의무를 다했을 뿐이니까. (「문명의 사도」, 150쪽)
심너울 작가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특성을 구현하면서도 “조금 더 동시대적인 감각들을 가지고 와서 동시대 너머를 지향”(해설, 이지용 평론가)한다.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 ‘트릭스터’의 면모를 지닌 심너울 작가는 이번에도 경계와 질서, 권위를 넘나들며 자유로이 세계와 세계를 횡단하며 균열을 일으켜 위태롭고도 즐거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심너울
SF 소설을 쓴다. 소설집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등을 냈다. 장편소설 『우리가 오르지 못할 방주』를 준비 중에 있다.
대리자들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문명의 사도
에세이 세 편의 글로 자기를 소개하기
해설 한국 SF의 트릭스터를 만나는 시간―이지용
■■■ 작가의 말
모든 사람이 그렇듯 저번 달의 심너울과 지금의 심너울이 다르고, 작년의 심너울이 지금의 심너울과 다를 겁니다. 그래야만 하기도 하고요. 2019년, 2020년, 2021년 각각 제가 쓴 세 편의 작품에는 차이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각 해에 쓴 세 작품을 보내기로 했어요. 그렇게 하면 독자님들께 시간에 따른 제 변화와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저만의 축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종단적 자기소개서일지도 모르겠어요.
■■■ 해설
작품에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시선은 용감하다. 용감하게 현실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의 세계를 바라보고 흡수하여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자신의 사고실험과 뒤섞어 세상에 내놓는다. 가볍다고 말할 수도 있고 위태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과감한 움직임들이 언제나 세계에 균열을 내고 지금이 아닌 그다음을 향하게 만들어준다. 심너울과 함께 전환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지용, 「한국 SF의 트릭스터를 만나는 시간」
■■■ 책 속으로
이제 적어도 우리 스튜디오에서는, 고전적인 촬영보다 컴퓨터그래픽이 더 싸졌어요. 촬영 로케이션을 잡고, 수많은 사람의 일정을 조율하고, 감독의 구질구질한 예술적 자아 때문에 밤늦게까지 똑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고, 그렇게 열심히 찍은 물건들이 포스트 프로덕션 중에 반토막이 나고… 다 헛짓거리죠. 앞으로 우리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로 만들 거예요. ‘진짜로 찍은’ 것과 구분할 수 없을 거예요. _「대리자들」, 25~26쪽
“나도, 강도영 너처럼 명배우가 될 거야.”
그 말이 도영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도영은 충동적으로 나영을 떨쳐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나영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희박한 공간이었지만, 나영이 의아해하고 있다는 것을 도영은 느꼈다. 말해야 했다. 언제까지 오해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좋다, 이 시트러스 향이 마지막이어도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_「대리자들」, 62쪽
물론 아직 나영에게 완전히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솔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자신의 기만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두통을 견디고 멍하니 앉아서, 무대 저편에서 나영이 재잘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지만 무엇인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_「대리자들」, 65~66쪽
대학에 갈 때 즈음해서 저는 우주비행사라는 꿈을 공식적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꿈이라고 한다면 응당 이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요. 그 꿈은 제게 천문학과 항공우주기술에 대한 좀 집착적인 애호만을 남겼답니다. _「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71쪽
이렇게 광막한 우주에 사람이 빌붙어 살아갈 지구도 있는데, 어떻게 이 수많은 회사 중 제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어요. 무슨 그런 생각을 다 했냐고요? 원래 사람은 자기 인생은 뭔가 특별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일이 있을 거라고, 자기가 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내심 기대하잖아요. 그리고 인생은 그 기대가 조각나는 하나의 커다란 과정이죠. _「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72쪽
우리가 돈을 벌어 먹고사는 것도 별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요. 그래도 꾸밈을 좀 과장해서 하는 건 뭐 어때요? 저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주문명의 첨병에 선 회사에서 일하는 거예요.
물론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얼레벌레 살아가고, 자기가 원 하는 게 뭔지도 몰라요. 그러니 헛소리가 확실하더라도 할 수 있다고 그냥 떠벌리는 편이 더 낫겠다 싶었어요. _「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96쪽
그렇다. 실피움은 제국과 닮았다. 제국의 각 권역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제국은 웅장한 하나의 국체를 이룬다. 실피움 또한 통합을 통해 한 행성의 생태계를 통째로 독식하는 데 성공했다. 제 국의 중심인 태양계에서 황제의 뜻이 퍼져나가듯 실피움의 뇌가 품는 뜻은 말단 전체로 퍼진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포도 불안도 아니었다. 희열이었다. 표본을 채취하지 않고, 천천히 탐사정을 돌렸다. 막 속에 둘러싸인 뇌는 매우 연약해 보였다. 나는 이 아름다운 생물을 해하고 싶지 않았다. _「문명의 사도」, 136쪽
그러나 그런 부차적인 문제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황제로부터 지켜야 했다. 내가 추구하는 제국의 이상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문명의 사도로서 제국의 이상을 유지해야 했다. 반물질 어뢰가 발사되기 전에 정거장의 격납고로 향했다. 그곳에는 태양계로 소식을 전할 때 쓰는 파발선이 한 대 있었다. 파발선을 타고 릴레이 스테이션으로 가속했다. _「문명의 사도」, 144쪽
은하수의 광채, 그리고 그 광채마저 집어삼킬 것처럼 막막한 심연이 보였다. 그 심연을 배경으로 떠 있는 인공물, 토성을 연상시키는 고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리는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계였다. 항성의 빛을 받지 못하는 고리의 한쪽 면은 어두웠다. 고리의 빛을 받지 않는 면은, 배경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별의 부재로만 인식할 수 있었다. 웜홀 릴레이 스테이션이었다.
꽤 자주 보아온 것인데도, 그 광경의 비현실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_「문명의 사도」, 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