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대한 감각(트리플12)

저자1 민병훈
저자2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일 2022-04-15
분야 한국소설
정가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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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하고 불연속적인 감각만이 유일한 논리로 작용하는 세계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의 세계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열두 번째 작품으로 민병훈 작가의 『겨울에 대한 감각』이 출간되었다. “아직 명명되지 않은 세계의 유일한 작가” 민병훈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작가는 세상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재인식’되는 것이므로, ‘구성’이 아닌 ‘재구성’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신작 『겨울에 대한 감각』에서도 익숙함을 거부하고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해설, 박혜진 평론가)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한다. 이처럼 “익숙한 세계의 작가이기를 거부”한 민병훈 작가는 이미 “만들어진” 보편적 세계가 아닌 “만들어질” 세계를 선보인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상관. 연관. 한없이 생각하면 모두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걸 끊어내기엔 계절이 제격이었지.”

 

아직 불리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

 

표제작 「겨울에 대한 감각」에는 사물의 이미지들이 불연속적으로 출현한다. 화자가 보고 떠올리는 생각을 독자가 그대로 지켜보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국에서 보내는 나날, 화자와 어머니의 일본 여행,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 등. 그러다 문득 그 이미지들 사이로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끼어든다. “소나무를 심었다. 백조라고 말했다”(9쪽)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중심 이미지는 어딘가에 잠겨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소나무’와 ‘백조’다. 소나무는 “땅 위의 백조”, 백조는 “물속의 소나무”다. 소설 후반부에 화자는 눈에 잠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화자는 눈송이를 일괄적인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이름 모를 도형들”(18쪽)로 인식한다. 이는 화자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과 같다. 화자에게 세상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파편화된 이미지”(해설, 박혜진 평론가)로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상관. 연관. 한없이 생각하면 모두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걸 끊어내기엔 계절이 제격이었지. 한 계절에 오래 머무르는 상상을 했다. 오래 머무른 것처럼 시간이 지났지. 겨울이 왔네, 말하지 않았지.

(겨울에 대한 감각, 21)

 

「벌목에 대한 감각」의 화자는 산속 집에 살며 밤마다 나무가 쓰러지는 환청을 듣는다. 벌목 작업이 중단되는 한밤중에 화자가 환청을 듣는 이유는, 자신이 자른 나무에 동료가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후 이모 집에 살며 시간을 보내지만, 이모 집이 위치한 산에 벌목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화자의 환청은 비단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공포”(해설, 박혜진 평론가)가 아니다.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한 공포에서 촉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트라우마로 화자의 상태를 환원시키지 않는다. 잘려나가는 나무와 화자가 머물고 있는 산속 집까지의 거리를 연상시키며 사건을 “공간으로 이미지화”한다.

 

새벽 같은 공기 속에서, 별안간 한 아이가 내 앞을 앞질러 뛰어갔다. 아이는 붉은빛으로 뛰어가며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느리게 걸음을 떼면서, 불현듯 어떤 결심을 했는데, 이제 남은 방법이라곤, 이곳을 떠나거나, 이곳을 떠나게 만들거나, 이곳이 떠나거나, 이곳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시도는 가능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 무리에 섞여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벌목에 대한 감각, 62)

 

「불안에 대한 감각」은 선원이 되기를 희망하여 요트를 타고 항해하던 중 겪은 사고를 현재의 화자가 기억하는 이야기다. 화자는 의도치 않게 겪은 사고로 인해 인명 피해를 목격했다. 사고 당시 물 위에 떠 있던 시체들을 현재의 화자는, 유년 시절 보았던 감전돼 죽은 개구리 사체의 이미지와 나란히 떠올린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고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점프한다. 화자는 사건을 서사로 이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 관찰하며 “서사에 대한 회의”에서 탈출한다. 이미지란 화자에게 “도피처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며 유일한 안식처”(해설, 박혜진 평론가)다. 민병훈 작가의 소설은 흐르지 않고 건너뛰며 움직이지 않고 멈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시 물어보자. 뭐가 궁금한 것이냐. 나의 기억? 혹은 그들에 대한 기억?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는다. 기억을 떠올리는 일에 자주 실패했다. 기억이란 건 언제나 다른 그림자를 가진 건물들 같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골격만 남은 철거 현장에서 삽을 쥐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말해주마. 기억나는 대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책임하겠지. 사실 과거라는 게 그렇다. 입맛에 맞게 부풀리거나 빼먹거나.

(불안에 대한 감각, 78)

 

민병훈 작가의 소설은 “무수한 이미지의 단위”를 수많은 장면으로 만들고, 그 장면들로 서사를 환기한다. “습관이 작동하지 않”는 민병훈 작가의 소설은 의식의 심연이 아닌 “무의식이라는 원초적인 표면을 재현”하고, “하나의 해석에 반대하는 저항의 형식”을 띠며 끊임없이 혼돈을 부추기는 “무의식의 리얼리티를 가중”시킨다. 세 편의 소설은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방법론을 통해 “불연속으로서의 인생”(해설, 박혜진 평론가)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고, 민병훈 작가는 읽는 이에게 “진짜 자기와 연결되는 시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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