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마음과 용기
중력을 비틀어 만드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열다섯 번째 작품으로 이유리 작가의 『모든 것들의 세계』가 출간되었다. “능청스러우면서도 낯선 상상력과 활달한 문체가 인상적”이라는 평과 함께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브로콜리 펀치』 등 재기발랄한 에너지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와 만나고 있는 이유리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모든 것들의 세계』에서 작가는 귀신, 마음소라 그리고 요정을 통해 상상과 환상을 넘어 “비인간의 세계”(해설, 전승민 평론가)를 선보이며 삶을 계속해나갈 힘과 의지를 각성케 한다.
“다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내 세계는 끝나 없어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세계 어느 한구석에는 끝내 남아 있고 싶었다.”
삶의 중력이 ‘나’의 무게를 압도할 때,
이유리 작가가 제시하는 세 가지 마음의 가능태
표제작 「모든 것들의 세계」는 영혼 결혼식으로 부부가 된 두 귀신, ‘고양미’와 ‘천주안’의 이야기다. 죽은 지 3년이 지난 ‘양미’는 ‘월드 오브 에브리싱’이라는 게임을 하던 중, 옆집에서 불이 난 것도 모르고 다른 캐릭터를 치료마법으로 ‘힐’ 해주다가 죽은 게임 마니아다. 한편 이제 막 죽은 신참 귀신 ‘주안’은 클로짓 게이로, 부모님이 선을 볼 것을 종용하던 중 20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게 됐다. ‘양미’는 자신을 죽게 했던 “선한 오지랖”으로 ‘주안’이 애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을 돕고, 귀신이 ‘소멸’하게 되는 때에 대한 진실을 말해준다. 점점 게임 속 세상과 현실의 삶 양쪽에서 잊혀져가는 ‘양미’는 “기어이 잊혔음을 기뻐하며 사라질 수 있게 되기를”(39쪽) 바라며 “산 자들을 진심으로 축원”(해설, 전승민 평론가)한다.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유저들만 남은 그 망겜, 진짜로 망할 때도 됐지. 나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즐거웠어요, 부디 더 재미있는 게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 가끔씩은 일어나서 이쪽저쪽 스트레칭도 하시고, 밥도 컴퓨터 앞에서만 먹지 말고 사랑하는 이들과 눈 맞추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시길.
(「모든 것들의 세계」, 40~41쪽)
「마음소라」의 주인공 ‘양고미’는 전 남자친구 ‘안도일’의 아내 ‘천양희’에게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는다. 바로 ‘도일’의 ‘마음소라’를 돌려달라는 것. 마음소라란 “마치 별주부전의 토끼 간처럼”(해설, 전승민 평론가) 출반입이 가능한 소라 모양으로 생긴 장기의 일종이다. 소라 입구에 귀를 대면 속마음이 숨김없이 들려오고, 누군가에게 증여하면 그 사람만이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스물한 살의 ‘도일’은 ‘고미’에게 이 마음소라를 주며 진심의 전부를 줬지만 7년 후 헤어진다. ‘고미’는 ‘양희’에게 그것을 돌려주며 둘의 부부 관계가 좋지 않음을 알게 된다. ‘양희’는 ‘고미’에게 ‘도일’의 마음을 들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고미’는 ‘양희’에게 진실 대신 ‘양희’가 듣고 싶어 할 이야기를 전한다. 이 선의의 거짓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전부 아는 것이 관계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과 무게에 대해 알고 있는 ‘고미’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최초에 얻었던 깨달음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큰 사랑을 되갚을 걱정 없이 받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증명받는 일이 얼마나 나를 값어치 있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바로 그것이 나를, 그리고 도일을 망쳐놓았다.
(「마음소라」, 53쪽)
「페어리 코인」에는 “반려 난이도 최하를 자랑하는” 요정이 등장한다. 전세보증금 사기를 당한 ‘나’와 남편 ‘우진’은 ‘나’의 고조모 때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이 요정을 이용하여 대국민 사기극을 계획한다. ‘우진’의 친구 ‘현철’이 요정을 이용해 스캠코인으로 ‘페어리 코인’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이다. ‘나’와 ‘우진’은 작정하고 친 사기에 당했다는 슬픔과 자책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요정을 내세워 사람들의 마음과 기대 심리를 착취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사기극의 준비가 마무리되어 가던 어느 날, ‘우진’은 ‘현철’이 함께 오토바이를 훔쳐놓고 ‘우진’에게 덮어씌웠던 고등학생 시절의 일화를 떠올린다. ‘나’와 ‘우진’은 그렇다면 ‘현철’을 믿을 수 있는지, 믿어야 하는 것인지,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우진아, 우린 잘못한 거 없어.”
“알아.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지.”
(……)
“바꿀 수 없다면 우리도 똑같아지면 돼. 이왕 나쁜 놈이 될 거면 확실히, 제대로 나쁜 놈 한번 돼보자.”
“응.”
빨갛게 부은 눈으로 우진이 환하게 웃었다.
(「페어리 코인」, 114쪽)
이유리 작가의 인물들은 작품 속에서 각기 다른 난관을 겪는다. 가닿고 싶어도 가닿을 수 없는 귀신이라서, 영원하리라 믿었던 마음이 영영 변해버려서, 믿었다는 이유로 너무나 큰 피해를 입게 되어서 등 살아가면서 좌절을 겪을 이유와 상황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작가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존”(해설, 전승민 평론가)하는 세 소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함을 전하며 “사랑할 용기”를 쥐여준다.
이유리
1990년 출생,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단편집 『브로콜리 펀치』가 있다. 식물, 고양이, 게임, 뜨개질을 사랑하는 집순이.
■ ■ ■ 작가의 말
도대체 왜 이유리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걸까.
이유리의 33년 동안의 삶에서 주로 사랑해온 것이 하필이면 ‘인간’이라는 사실.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차고 넘치는데도.
그렇다면 이유리는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무엇을 원해서? 그야 사랑이다. 이유리는 사랑받고 싶어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유리가 택한 바로 그 인간에게, 전심전력으로, 언제 어디서나 변치 않는 지구 최고의 사랑을!
모든 것들의 세계
마음소라
페어리 코인
에세이 이유리위원회 산하 의문규명위원회의 어떤 오래된 어젠다에 관하여
해설 마음의 형태학 : 귀신, 마음소라 그리고 요정―전승민
■■■ 해설
소설에 등장하는 귀신과 마음소라 그리고 요정은 인간의 대척점에서 타자화된 대상이 아니라 다만 인간 마음의 서로 다른 양태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상상이나 환상이라는 단어로 쉽게 치환될 수 없는 이 연장된 비인간의 세계는 현실의 중력을 얼마간 약화시킴으로써 삶을 계속해나갈 힘과 의지를 각성하게 한다. 이유리가 제시하는 세 가지 마음의 가능태를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마음, 바로 끝내 사랑을 멈추지 않는 마음이다.
—전승민(문학평론가)
■■■ 책 속으로
“평소에 부모님 댁도 좀 찾아뵙고 그러세요. 혼인 맞추느라 수소문하고 고생깨나 하셨을 것 같은데. 이것 좀 보세요, 두 분 서로 나이며 사주, 궁합까지 딱딱 맞는 거. 요즘 세상에 영혼 결혼식 하는 분들이 흔치도 않은데, 얼마나 고생하셨겠어요.”
“영혼 결혼식이요? 제가요?”
“네. 고양미 씨는 어제부로 여기 천주안 씨랑 부부가 되셨고요, 양쪽 다 소멸되기 전까지 혼인 관계가 유효합니다.”
_「모든 것들의 세계」, 11쪽.
천주안이 숨을 훅 들이켰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말릴 새도 없이 그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 역시 이런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오만 군데 폐만 끼치고 살아왔으니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를 여기 잡아두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나니 그게 너무나 소중해졌고 그리워졌으나 이제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죽은 몸으로도 다시 한번 죽고 싶을 만큼 슬펐으니까. 두고 온 모든 것이 갑자기 미치도록 고맙고 미안해서 마음이 미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_「모든 것들의 세계」, 26쪽
팀원 뒤에 달라붙어 체력을 끊임없이 채워주고 각종 저주와 디버프를 해제하는 일은 내겐 몬스터를 직접 때려잡는 것보다 훨씬 재밌고 뿌듯한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디버프에 걸린 저 불행한 귀신을 그대로 놔두고 싶지 않은 건, 애인 옆에 들러붙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사후 세계를 즐기며 언젠가의 소멸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건 생전의 내가 게임 중독이었던 탓이 틀림없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이놈의 오지랖. 나는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천주안의 뒷모습을 괜히 흰 눈을 뜨고 한참 흘겨보았다.
_「모든 것들의 세계」, 31~32쪽
그 안에는 도일의 마음소라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컸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뾰족하게 말린 윗부분은 묽은 회색과 하늘색이 섞여 꼭 소나기가 그친 직후의 여름 하늘 빛깔 같았고, 그 아래 둥그런 구멍 안쪽은 영롱한 진주색이었다. 남의 마음소라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고 아니 이렇게 은밀하고 귀중한 걸 이런 곳에서 꺼내보아도 되나. 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왜 이걸…… 나한테?”
_「마음소라」, 46쪽
나는 마음소라를 도일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것을 부어준 듯 가슴이 묵직하고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때까지는 잘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내게 마음소라를 선물할 만큼 순수한 열정과 애정을 쏟아붓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으쓱한 기분.
_「마음소라」, 51~52쪽
도일의 방식은 내가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으레 이렇게 하는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 거였다. 마치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무한대로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얻은 것처럼 나는 방탕하게 사치를 부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에 그런 것은 없었다. 남에게 받은 것 가운데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은 없고, 돌려줄 방법을 모른다면 애초에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_「마음소라」, 58쪽
“우리 집 요정이 돈이 될 것 같아.”
“돈? 돈이 된다고?”
“응, 그것도 큰돈이.”
흥분한 우진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요정을 앞에 두고 할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 나는 도로 일어서서 요정을 달랑 들어 안았다. 고양이 앓는 소리를 내며 팔에 엉겨 붙는 요정을 안방 침대에 앉혀두고 돌아와 다시 물었다.
_「페어리 코인」, 83~84쪽
작정하고 친 사기에 당했다는 그 자체보다도, 당하는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행복해하던 그 순간만 생각하면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슴을 쥐어뜯곤 했다. 그러니까 그때였다. 우리가 치즈를 썰고 와인을 따르던 그때. 거실에 시폰 커튼을 달지 나비 주름 커튼을 달지, 빔프로젝터를 사면 잘 쓸 수 있을지 행복한 입씨름을 하던 순간에. 그 순간 겨우 몇 블록 떨어진 부동산에선 뱃속 검은 인간 셋이 모여 우리의 피 같은 돈 4억을 홀라당 저들 입에 처넣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우리에게 사기를 치려고 작정했을까. 우리의 무엇이 저들에게 사기를 쳐도 되겠다고 판단하게 했을까.
_「페어리 코인」, 87~88쪽
내가 당한 그대로 돌려주는 것, 이보다 더 유쾌한 복수가 어디 있을까.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다. 우리를 등쳐먹은 인간들과 페어리 코인을 매수해서 손해를 볼 사람들은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야말로 한강에서 맞은 뺨을 종로에서 화풀이하는 격이었다. 그러나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1년이 넘도록 실컷 가슴앓이를 해오는 동안, 우리 부부는 어느새 가해자의 실체를 한없이 넓게 뭉뚱그리고 있었다. 가장 못된 건 짬짜미를 한 집주인과 중개사 패거리겠지만, 과연 그들만이 나쁜가 하면 그건 단연코 아니었다.
_「페어리 코인」, 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