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하고 불연속적인 감각만이 유일한 논리로 작용하는 세계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 멈춘 소설의 세계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열두 번째 작품으로 민병훈 작가의 『겨울에 대한 감각』이 출간되었다. “아직 명명되지 않은 세계의 유일한 작가” 민병훈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작가는 세상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재인식’되는 것이므로, ‘구성’이 아닌 ‘재구성’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신작 『겨울에 대한 감각』에서도 익숙함을 거부하고 “이미지는 진술하고 서사는 침묵하는”(해설, 박혜진 평론가)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한다. 이처럼 “익숙한 세계의 작가이기를 거부”한 민병훈 작가는 이미 “만들어진” 보편적 세계가 아닌 “만들어질” 세계를 선보인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상관. 연관. 한없이 생각하면 모두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걸 끊어내기엔 계절이 제격이었지.”
아직 불리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
표제작 「겨울에 대한 감각」에는 사물의 이미지들이 불연속적으로 출현한다. 화자가 보고 떠올리는 생각을 독자가 그대로 지켜보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국에서 보내는 나날, 화자와 어머니의 일본 여행,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 등. 그러다 문득 그 이미지들 사이로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끼어든다. “소나무를 심었다. 백조라고 말했다”(9쪽)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중심 이미지는 어딘가에 잠겨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소나무’와 ‘백조’다. 소나무는 “땅 위의 백조”, 백조는 “물속의 소나무”다. 소설 후반부에 화자는 눈에 잠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화자는 눈송이를 일괄적인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이름 모를 도형들”(18쪽)로 인식한다. 이는 화자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과 같다. 화자에게 세상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파편화된 이미지”(해설, 박혜진 평론가)로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상관. 연관. 한없이 생각하면 모두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걸 끊어내기엔 계절이 제격이었지. 한 계절에 오래 머무르는 상상을 했다. 오래 머무른 것처럼 시간이 지났지. 겨울이 왔네, 말하지 않았지.
(「겨울에 대한 감각」, 21쪽)
「벌목에 대한 감각」의 화자는 산속 집에 살며 밤마다 나무가 쓰러지는 환청을 듣는다. 벌목 작업이 중단되는 한밤중에 화자가 환청을 듣는 이유는, 자신이 자른 나무에 동료가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후 이모 집에 살며 시간을 보내지만, 이모 집이 위치한 산에 벌목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화자의 환청은 비단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공포”(해설, 박혜진 평론가)가 아니다.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 대한 공포에서 촉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트라우마로 화자의 상태를 환원시키지 않는다. 잘려나가는 나무와 화자가 머물고 있는 산속 집까지의 거리를 연상시키며 사건을 “공간으로 이미지화”한다.
새벽 같은 공기 속에서, 별안간 한 아이가 내 앞을 앞질러 뛰어갔다. 아이는 붉은빛으로 뛰어가며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느리게 걸음을 떼면서, 불현듯 어떤 결심을 했는데, 이제 남은 방법이라곤, 이곳을 떠나거나, 이곳을 떠나게 만들거나, 이곳이 떠나거나, 이곳이 나를 밀어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시도는 가능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 무리에 섞여 함께 달려가고 있었다.
(「벌목에 대한 감각」, 62쪽)
「불안에 대한 감각」은 선원이 되기를 희망하여 요트를 타고 항해하던 중 겪은 사고를 현재의 화자가 기억하는 이야기다. 화자는 의도치 않게 겪은 사고로 인해 인명 피해를 목격했다. 사고 당시 물 위에 떠 있던 시체들을 현재의 화자는, 유년 시절 보았던 감전돼 죽은 개구리 사체의 이미지와 나란히 떠올린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고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점프한다. 화자는 사건을 서사로 이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 관찰하며 “서사에 대한 회의”에서 탈출한다. 이미지란 화자에게 “도피처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며 유일한 안식처”(해설, 박혜진 평론가)다. 민병훈 작가의 소설은 흐르지 않고 건너뛰며 움직이지 않고 멈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시 물어보자. 뭐가 궁금한 것이냐. 나의 기억? 혹은 그들에 대한 기억? 뚜렷하게 떠오르진 않는다. 기억을 떠올리는 일에 자주 실패했다. 기억이란 건 언제나 다른 그림자를 가진 건물들 같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골격만 남은 철거 현장에서 삽을 쥐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말해주마. 기억나는 대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책임하겠지. 사실 과거라는 게 그렇다. 입맛에 맞게 부풀리거나 빼먹거나.
(「불안에 대한 감각」, 78쪽)
민병훈 작가의 소설은 “무수한 이미지의 단위”를 수많은 장면으로 만들고, 그 장면들로 서사를 환기한다. “습관이 작동하지 않”는 민병훈 작가의 소설은 의식의 심연이 아닌 “무의식이라는 원초적인 표면을 재현”하고, “하나의 해석에 반대하는 저항의 형식”을 띠며 끊임없이 혼돈을 부추기는 “무의식의 리얼리티를 가중”시킨다. 세 편의 소설은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방법론을 통해 “불연속으로서의 인생”(해설, 박혜진 평론가)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고, 민병훈 작가는 읽는 이에게 “진짜 자기와 연결되는 시간”을 선사한다.
민병훈
2015년 『문예중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파견』 『재구성』 등을 냈다.
작가의 말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말을 당신만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서투르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다. 당신은 소설에게 당신의 손을 빌려준다. 당신은 감각에게 당신의 입술을 빌려준다. 당신은 모든 것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당신에 대한 감각이 여기로 오고 있다.
겨울에 대한 감각
벌목에 대한 감각
불안에 대한 감각
에세이 당신을 통한 감각론
해설 감각을 위한 논리―박혜진
추천사
나는 내가 통과하고 비축하며 꿈꾸는 시간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설명하려는 경향, 의미화에 대한 모든 유혹을 포기할 것.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값진 것인 시간, 기억과 감각에 대한 순연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 현재의 겨울은 무수하게 반복된 겨울이다. 이미 겪었고 겪을 것이며 또한 벌목하는 자들의 소음에 의해 방해받기도 할 글쓰기의 자리에 다시 쓰일 과거와 미래의 겨울(들)이다. 민병훈은 이 중첩되고 뒤섞인 겨울의 한가운데로 진입해 그곳을 떠돈다. 민병훈은 자신의 시간에 대해 말하는 작가가 아니다. 자신의 시간과 충실하게 관계하고 있는 한 개인의 모색과 불안을, 자신의 몫으로 치러야만 하는 시간과의 무한한 대화를 다만 보여줄 따름이다. 소설이 타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르라고? 이야기하지 마라. 이 책이 타인의 시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양선형(소설가)
해설
두 부류의 작가가 있다. 물건을 만드는 작가와 재료를 만드는 작가. 물건 대신 재료를 만드는 민병훈은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질 세계를 완성한다. 익숙한 세계의 작가이기를 거부한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외롭고 쓸쓸한 길 위에서의 정주일 것이나 민병훈을 아직 명명되지 않은 세계의 유일한 작가로 위치시키는 것 역시 그가 선택한 쓸쓸한 길이다. 이 글은 민병훈만이 작가로 존재하는, 아직 불리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박혜진(문학평론가)
책 속으로
나는 잠깐 동안 분명했다. 집에 가도 좋다고 말했다. 기억은 나를 모르는 장소로 산책시켰다. 조금씩 가벼워졌다. 콧잔등이 시큰했다. 그림자로 얼룩진 유리창에 금이 갔다. 나는 반박할 수 없는 경험을 만들었다. 덤불 속에서 이곳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표정은 대부분 새벽이었다. 색이 많을수록 기억이 뚜렷해졌다. 눈을 기다리지 않았다. 책상에 낙서했다. 축구공 하나가 굴러다녔다.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가끔은 기쁜 일이 있었다.
_「겨울에 대한 감각」, 17쪽
그만두는 법. 새로 시작하는 법. 너는 묻는 대신 사라졌지. 겨울만 되면 너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아니면 겨울이 구체적으로 느껴졌지. 동상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네가 말했다. 발가락 중 하나가 단단하게 얼어 파란빛으로 변해갔다고 네가 말했지. 그렇게 변할 때까지 뭘 했느냐고 묻자, 동상에 걸린 사람도, 너도, 다른 사람들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산을 타지도, 강에 빠지지도, 냉동 창고에 갇힌 것도 아니었지.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_「겨울에 대한 감각」, 20쪽
화창한 날 호수 수면으로 눈이 녹는 순간을 던지듯이 생활했어요. 허벅지살이 텄고 보라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빙벽에 올라 위태로운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봤어요. 썰매장으로 연결된 수 도관이 얼어 고무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담아 갔죠. 손을 흔들었어요. 아이들은 오전보다 빨리 썰매를 몰았습니다. 썰매 아래 스케이트 날이 얼음 표면에 불규칙한 무늬로 흠집을 냈어요. 위에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이었을 까요. 제멋대로 엉킨 실타래 같았을까요. 왜 손을 놓고 흔들었던 걸까요.
_「겨울에 대한 감각」, 34~35쪽
“밥 먹었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며 산림소유자로 매번 월요일마다 찾아왔다. 혹시 내가 자살을 하거나, 갑자기 떠날 것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니 오지 말라고 당부해도,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며 그런 게 아니라고만 말했다. 어쨌거나 그의 거짓말은 처음에는 지루했다가 나중에는 재미가 생겨 기다려졌고, 한밤중에 들은 소리에 대해 말한다면, 오히려 나더러 거짓말을 한다고 비웃을 것 같았다. 그럼 눈덩이인가. 눈덩이에서 저런 소리가 났던가. 나는 중얼거렸다.
_「벌목에 대한 감각」, 42~43쪽
“(……) 이 이야기 전에 했던 것 같은데, 들어보세요, 잠이 너무 안 온다고 말한 적 있죠? 창고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했죠? 창고가 너무 큰 것도 문제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천장까지 나무가 자라고 있더란 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무섭지 않았겠어요? 잠을 방해하는 이유를 찾은 거예요. 며칠 전에 벌목꾼들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어요. 밧줄을 달라는 거예요. 어깨에 밧줄을 걸치고 있으면서요. 찾아서 꺼내 줬어요. 그 뒤로 다시 잠이 오질 않아요…….”
_「벌목에 대한 감각」, 56~57쪽
무슨 생각으로 이 숙소에 왔는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평소에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고,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을 후회하며 발길을 돌리려고 했지만,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는 뭔가를 발견함으로써 지난날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서 복수라는 말이 떠오르다니, 왠지 남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어색했고, 복수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아주 작은, 그들의 작업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도구를 훔치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들은 있으나 마나 한 그것을 찾기 위해, 적당히 곤란함을 느끼며 시간을 허비할 텐데, 그것으로 아무도 모를 나의 복수가 완성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_「벌목에 대한 감각」, 59쪽
코펠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잠에 들었는데 새벽에 소리가 들려서 눈을 뜨니까 텐트 밖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손짓하고 있었어 야영장을 지나 산에 가까워지면 철조망이 있고 접근금지구역이 외국어로 적혀 있어 군부대도 없고 국립공원인데 동급생들에게 말하니까 뭘 주워 오라고 해서 가져왔다가 잃어버렸어 농구를 할 때면 구경만 했어 패스를 안 하니까 쓰레기장에서 버너를 분해해 점화기로 오락기를 딸깍거리다 걸리기도 하고 볼이 불에 덴 것처럼 빨개질 정도로 맞았는데 아프지는 않았어 오늘 내가 잃어버린 게 있어 그래서 찾을 수가 없어
_「불안에 대한 감각」, 75~76쪽
만일 이곳에 내가 없거나 내가 없었거나 내가 없는 기억에서 우리는 가늘고 쉽게 지나쳤을 거라고 별안간 옥상에서 추락하는 화분에 숨겨진 두근거림 불규칙한 조각들 무늬들 자신을 비울수록 가득 담기는 풀잎들 번개가 내리친 나무 아래에서 철사를 만지작거리며 오랜 시간 완전히 없어졌다. 시청으로 가는 길마다 바닥에서 꿈틀대는 오색의 단풍잎을 밟으면 장식으로 흐트러질 것처럼 기진맥진한 하루가 내년에도 어김없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침대 끝에 겨우 앉아 있었다. 강물에 어울리지 않는 요트가 지나가고 있었다.
_「불안에 대한 감각」, 80~81쪽
당신의 메일을 읽으니 당신의 경험을 상상하게 됩니다. 다국적인 동급생들 사이에서 어떤 말투로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곧 서울로 돌아간다는 말을 그들은 믿었을까요. 어쩌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요. 나는 종종 돌아갈 장소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장소가 내게로 돌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게도 수많은 장소가 있고 떠나왔는데 어째서인지 하루하루가 공중에 뜬 열기구처럼 지나갑니다.
_「불안에 대한 감각」, 93~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