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지금 우리들 연애의 세 가지 장면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열한 번째 작품으로 윤치규 작가의 『러브 플랜트』가 출간되었다. “탄탄한 문장을 토대로 서사의 리듬을 형성하는 능숙함”(202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심사평 중)을 가지고 있다는 찬사와 “더 설득력 있고 개성적인 ‘이야기의 컷’들을 독자에게 들려줄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중)는 기대를 받으며 2021년 서울신문과 조선일보 신춘문예 2관왕을 거머쥔 윤치규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면 어떡해요.”
“연애보다는 훨씬 쉽죠. 적어도 식물은 좋아한다고 막 달려들지는 않잖아요.”
“쓰고 싶은 게 있다면 아직도 연애뿐”
윤치규 첫 소설집
「일인칭 컷」은 비혼식을 선언한 여자친구 ‘희주’와 말레이시아 여행을 떠난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인칭 컷’은 희주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 구도의 명칭이다. ‘나’는 ‘희주’가 왜 자신을 두고 비혼식을 했는지, 회사에서 성희롱 사건을 겪은 후 ‘희주’가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희주’가 자신에게 부탁해 찍는 ‘일인칭 컷’이 왜 ‘일인칭’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희주’와 ‘나’가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해설, 김정빈 평론가)의 차이는 여행 내내 두드러진다. ‘희주’와 달리 ‘나’는 팜나무와 야자나무의 차이에 대해 무심하고, ‘희주’에게는 이제 차오르기 시작하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기울어가는 그믐달로 보인다. ‘나’는 자신이 “알 수 없다는 것”(11쪽)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팜나무와 야자나무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여성으로서 ‘희주’의 삶과 남성으로서 자기 삶의 차이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끝끝내 이해되지 못할 타자로서의 애인을 목격”(해설, 김정빈 평론가)한다.
희주는 이런 사진을 ‘일인칭 컷’이라고 불렀다. 사진은 인물보다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장소가 온전하게 담기면서도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는 희주의 뒷모습이 한쪽 구석에 반드시 놓여야 했다. 여행할 때면 희주는 이런 사진을 자주 찍어서 올렸다. 그때마다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사진 속에서 일인칭 시점은 바로 나였다.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는 희주는 정작 삼인칭 피사체에 불과했다. (「일인칭 컷」, 15~16쪽)
「완벽한 밀 플랜」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고 있는 ‘현영’과 ‘나’의 신혼 여행기를 그리고 있다. ‘나’는 ‘현영’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사랑을 통해 자신이 ‘현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현영은 계속해서 손목을 그었고, 술을 많이 마셨다. 결혼식 전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까지 벌어지지만, ‘나’는 오히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결혼을 강행한다. ‘나’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이유로 변화를 강요하는 것”(해설, 김정빈 평론가)이 “일방적인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성하며 이에 순응한다. 하지만 순응 이후 ‘현영’과 제대로 대화하지 않고 단절된다. ‘나’의 입장에 자신이 ‘완벽한 밀 플랜’을 짜는 사람이라면, ‘현영’은 그 계획을 망치는 사람인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95퍼센트 확률의 터틀 퀘스트”를 실패하고, 서로의 깊은 간극만 재확인한다. 뿔 달린 물고기가 바다거북의 몸에 뿔을 꽂고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잠겨드는 것이 뿔 달린 물고기의 탓만도, 바다거북의 탓만도 아닌 것처럼 ‘나’와 ‘현영’의 관계는 “정답을 찾으려는 시도 없이 단지” 유보된다.
그렇기에 현영이 예전처럼 술에 취해 위험한 일을 벌이면 나는 실망했고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현영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게 제일 괴로웠다. 이 모든 게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 나를 만나도 똑같다는 것. 내가 곁에 있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런 생각이 자꾸만 나를 어딘가 아득히 먼 곳으로 내몰았다. (「완벽한 밀 플랜」, 57쪽)
표제작 「러브 플랜트」는 앞의 두 작품이 그려낸 연애, 결혼에 이어 ‘이혼’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혼 경험이 있는 ‘백현준’은 같은 경험이 있는 ‘이미나 차장’과 동질감을 느끼며 가까워진다. 백현준은 “고백할 때 제발 꽃 사지마 공포증”(67쪽)을 가지고 있는 꽃집 사장으로, 일방적인 고백에 공포와 분노를 느끼는 인물이다. 일방적인 고백에 그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는, 이혼 경험 때문이다. ‘백현준’은 “이혼소송이라는 절대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에 의해 자신의 연애 공식을 파괴하는 절차”(해설, 김정빈 평론가)를 거친 것이다. 연애-결혼-이혼의 과정을 거치며 ‘백현준’은 ‘일반적인’ 연애가 ‘일방적인’ 연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혼소송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듯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사랑에서 비롯된 연애-결혼-이혼이라는 단계는 한 사람의 잘못으로,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망가지거나 지속될 순 없다. ‘백현준’은 꽃다발이 아니라 율마 화분으로 ‘이미나 차장’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진 않는다. 식물을 기르는 것처럼 관계에도 “인내와 꾸준함”이 필요하다. ‘백현준’은 ‘이미나 차장’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방식, 식물의 방식을 배운다.
그때 백현준은 왜 아내에게 결혼을 종용했던 것일까? 물론 아내를 좋아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 당시 백현준은 분명히 뭔가에 취해 있었다. 회사에서 인기가 많던 아내를 차지하게 됐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을 수도 있고, 술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아내의 나쁜 버릇을 자신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오만하게 자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불안정한 사람을 자신이 남자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건 사실 누구도 바라지 않은 혼자만의 비틀린 열정이었고 일방적인 망상에 불과했다. (「러브 플랜트」, 94쪽)
윤치규 작가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연애, 결혼, 이혼의 세 가지 장면을 자신만의 고유한 컷으로 제시한다. 엇비슷해 보이는 연애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잎맥을 가지고 있듯, 모두에게 같은 연애는 없고, 윤치규 작가는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쓰고 싶은 게 있다면 아직도 연애뿐”이며 “이제는 조금 다른 연애를 쓰고 싶다”는 작가의 말처럼, 윤치규 작가가 보여줄 ‘조금 다른 연애’가 기다려진다.
윤치규
2021년 서울신문과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재능보다 열정으로 쓰는 편. 사회화된 INTP.
작가의 말
언젠가 들은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어떤 소설이 쓰고 싶냐고 묻는 젊은 소설가의 질문에 볼펜을 손가락에 끼우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다 “아무래도 역시 연애죠”라고 대답한 아주머니의 일화를. 나 역시 쓰고 싶은 게 있다면 아직도 연애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연애를 쓰고 싶다. 지나간 모든 연애의 기록 대신, 대답을 망설이며 머릿속에 그렸을 그 아주머니의 연애가 궁금하다. 그 아주머니는 어떤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던 걸까? 언젠가는 그 아주머니의 연애를 대신 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일인칭 컷
완벽한 밀 플랜
러브 플랜트
에세이 모든 연애의 기록
해설 사랑과 분리된 연애―김정빈
■■■ 해설
우리가 세 편의 윤치규 소설을 보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연애를 겪지 않고 주변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현준의 방식이 옳고 그것을 따르자는 판단은 삼가자. 멀리서 보면 비슷비슷한 연애들도 각 이야기 속의 맥락은 본인만이 쥐고 있으므로,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규칙은 없다. 지금은 단지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내면 될 뿐이다.
―김정빈, 「사랑과 분리된 연애」
■■■ 책 속으로
희주는 대수롭지 않은 듯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쨌든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다는 것은 때때로 내게 두려움을 주었다.
희주가 비혼식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도 두려움이었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비혼식을 하겠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무섭고 끔찍하기까지 했다.
_「일인칭 컷」, 11쪽
“저건 야자나무게, 팜나무게?”
택시 창밖으로 막 쓰러진 나무를 가리키며 희주 가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예상했다는 듯 실망하며 야자나무라고 정답을 알려주었다. 그런가 싶어 다시 한번 쳐다봐도 딱히 야자나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게는 전부 엇비슷한 모양의 열대 나무일 뿐이었다.
_「일인칭 컷」, 14쪽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최 팀장이 이번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더욱 언행을 조심하겠다고 하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앞으로 두고 보겠다며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사건이 일 단락되었다고 믿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희주에게는 그랬다.
“왜 네가 나 대신 그 사람을 용서했어?”
낮에 믈라카의 구도심을 돌아볼 때 희주가 내게 물었다.
_「일인칭 컷」, 27쪽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현영은 맥주를 놓고 보티와 씨름했다. 서로 맥주 캔을 붙잡고 뺏거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잡아당겼다. 그럴 때마다 맥주 거품이 바닥에 조금씩 쏟아졌다. 보티는 전력을 다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결국 맥주를 빼앗았고 현영은 진심으로 언성을 높이며 돌려달라고 화를 냈다. 불쾌한 기색에도 보티는 주저하지 않고 맥주를 전부 바다에 쏟아버렸다. 그러고는 나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왜 말리지 않느냐고.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_「완벽한 밀 플랜」, 45~46쪽
결혼식을 하루 앞둔 날 나의 상태는 예민한 수준을 넘어 거의 신경쇠약에 이르렀다. 결혼식 현수막의 글자가 조금 번진 채로 인쇄된 일이나 예식장에 전시할 웨딩사진 배송이 조금 늦어지는 일이 마치 불길한 복선인 듯 과민하게 굴었다. 그래서 현영이 수면제를 삼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놓였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 같았고, 다행히 우려했던 것 중에 가장 나쁜 일은 아니라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_「완벽한 밀 플랜」, 55쪽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내일이 결혼식인데 꼭 이래야만 하느냐고. 날 사랑한다면서 그 약을 삼킬 때 내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예전에는 나를 사랑한다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수면제를 이렇게까지 삼키는 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영이 가끔 술에 취해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_「완벽한 밀 플랜」, 56쪽
비록 이혼이 창업의 계기는 아니어도 꽃집 운영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백현준은 이 혼 후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밤마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가정법 과거완료 형태의 문장이 끊이지 않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이혼도 하지 않았을 텐데 같은 조건 부사절 형식의 후회는 스스로 용법을 변형시키면서 무수히 늘어났다. 빈 화분에서도 잡초가 자라듯, 그런 잡념은 아무리 뽑아내도 어느 순간 무성히 피어나 새벽마다 잠을 깨웠다.
_「러브 플랜트」, 68~69쪽
헤어진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때면 백현준은 최대한 아무 감정도 싣지 않고 잘 훈련된 AI가 적시된 사실을 구술하듯 무덤덤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그게 제대로 성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가정이 파탄 난 이유가 상대방의 나쁜 술버릇 때문이라는 걸 판결문에 반드시 명시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고작 그런 몇 마디 문장으로는 관계라는 것을 정의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유책이라는 말은 누구에게 더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 뿐이 고 이혼소송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는 재판이 아니었다.
_「러브 플랜트」, 89~90쪽
돌이켜보면 아내는 단 한 번도 백현준과의 관계에 있어서 명확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백현준이 머리에 총을 들이대면서 협박했던 것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마냥 끌려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적어도 사귈 때든 결혼을 결정할 때든 언제나 유보적이거나 불안해하며 망설였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럴 때마다 결정을 강요한 사람은 백현준이었다.
_「러브 플랜트」, 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