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은모든 작가의 <오프닝 건너뛰기>가 출간되었다.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으로 2018 한경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섬세하고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전하는 상실과 단절, 소통과 연대에 대한 공감력과 그 위무의 힘이 간단치 않았다”(전성태 소설가, 심사위원)는 심사평을 받으며 소외된 청춘들의 연대감으로 세상의 냉소를 눅이는 소설을 선보여왔다.
<오프닝 건너뛰기>는 우리 주변의 다양한 방식의 ‘관계’들에 관한 이야기다.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막 결혼한 부부이거나 연애하지 않고 살아가는 중이거나 이전의 연애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대의 문법이 바뀌어도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을 둘러싼 문법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기존의 문법과 불화하며 여기저기서 충돌음”(작품 해설, 박혜진 문학평론가)을 낸다. 이 소설은 이렇듯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음 속에서 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한 적당한 온도와 속도를 가늠해보고 있는 것이다.
은모든
2018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애주가의 결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출간 작품으로는 미니멀리즘으로 향해 가는 물경력 회사원의 하루하루를 그린 『꿈은, 미니멀리즘』, 십 년 후의 근미래, 적극적 안락사라는 선택을 둘러싼 어느 가족의 이야기 『안락』, 『마냥, 슬슬』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이 있다.
오프닝 건너뛰기
쾌적한 한 잔
앙코르
에세이공명을 위한 온도와 속도
해설규칙 없이 사랑하기_박혜진
“쾌적한 맛이 났다.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의 반대편에 위치한 듯한 맛이었다”
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한
적당한 온도와 속도를 가늠해보는 일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획이다.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은모든 작가의 『오프닝 건너뛰기』가 출간되었다.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으로 2018 한경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섬세하고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전하는 상실과 단절, 소통과 연대에 대한 공감력과 그 위무의 힘이 간단치 않았다”(전성태 소설가, 심사위원)는 심사평을 받으며 소외된 청춘들의 연대감으로 세상의 냉소를 눅이는 소설을 선보여왔다.
『오프닝 건너뛰기』는 우리 주변의 다양한 방식의 ‘관계’들에 관한 이야기다.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막 결혼한 부부이거나 연애하지 않고 살아가는 중이거나 이전의 연애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대의 문법이 바뀌어도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을 둘러싼 문법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기존의 문법과 불화하며 여기저기서 충돌음”(작품 해설, 박혜진 문학평론가)을 낸다. 이 소설은 이렇듯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음 속에서 너와 내가 공존하기 위한 적당한 온도와 속도를 가늠해보고 있는 것이다.
“따스함과 단순함.
그 두 가지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은
연애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서로의 위치를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조율해가는 관계의 방식
『오프닝 건너뛰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삼십대로, 취직, 연애와 결혼, 출산과 양육으로 이어지는 삼십대의 업무를 완수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오프닝 건너뛰기」의 수미는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에서 온기를 느끼지만, 자신과 다른 경호의 생활 방식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혼 생활의 ‘오프닝’을 건너뛰고 싶지만 수미는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도려내듯 필요 없는 부분은 제거하고 원하는 부분만 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26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관계 속에서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쾌적한 한 잔」에서도 나타난다. 은우에게 연애라는 행위에 따른 일련의 과정은 기쁨이 아니라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다. 그에게 연애하지 않은 삶은 고통을 피하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지만 그를 바라보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쾌적한 맛이 났다.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의 반대편에 위치한 듯한 맛이었다. 크고 단단한 얼음이 뿜어내는 냉기에 중심을 내주어야만 성립하는 맛이기도 했다.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온도와 머물 수 있는 환경에 대해 가늠해보면서 은우는 기다란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쾌적한 한 잔」, 84쪽)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
보편적 이야기가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
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은 보편적 삶의 방식과 다른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해 보인다. 「앙코르」의 세영과 가람은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여행을 하며 서로를 향해 호감으로 발전한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였으나 이후 바쁜 일상에 치여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못한 세영과 지난 연인과의 결별에 대한 잔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가람은 ‘앙코르’라는 말의 뜻처럼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처럼 『오프닝 건너뛰기』에서 작가는 비규범적이고 비규정적인 관계의 형태들을 그려냄으로써, 보편적 이야기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 제각각의 사연으로 자신만의 희소성을 드러낸다. 그렇게 세 편의 소설들은 다시, 또 다른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 해설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궁핍한 말들의 시대에서 은모든 소설의 수다는 예외적이고 희소한 방식으로 제 가치를 드러낸다. 출발한 이야기가 어김없이 도착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은모든은 이례적으로 도착에 집중한다. 관찰하고 개입하고 해석하는 화자가 아니라 들어주고 끄덕여주는 화자의 존재를 통해 소설의 주인공은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 그 자체가 된다. _박혜진(문학평론가)
수미는 지난봄에 ‘5월의 신부’가 되어야 했다. 사실 수미는 그런 단어 자체를 낯간지럽게 여기는 성격이었고 결혼식에 대해서도 기대는커녕 번잡스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점은 경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스드메’ 같은 단어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다. _「오프닝 건너뛰기」, 13쪽
경호가 품고 있는 따스함과 단순함. 그 두 가지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것은 연애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도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씨앗을 도려내듯 필요 없는 부분은 제거하고 원하는 부분만 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누군가와 한집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일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_「오프닝 건너뛰기」, 26쪽
냉담한 사람에게 혼자 열을 내는 것도, 열병에 걸린 상대를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일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경호는 수미가 원하던 적당한 온기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_「오프닝 건너뛰기」, 27쪽
어느 작은 베이커리 주인이 개점 3주년을 기념하며 올린 소감의 일부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남자친구’도 ‘여자친구’도 아닌 ‘배우자’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으므로, 작성자가 자신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_「쾌적한 한 잔」, 61~62쪽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리거나 당황하거나 당황한 사실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극도의 긴장 상태 속에 쾌락은커녕 오감이 뒤섞이는 듯한 이물감만 커질 뿐이었다. 마치 손끝으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친밀감과 애정을 느꼈던 상대 역시 그 순간만큼은 낯설게 보였다. _「쾌적한 한 잔」, 79쪽
은우는 다시 잔을 들고 칵테일을 한 모금 삼켰다. 쾌적한 맛이 났다. 요란하고 뜨거운 충돌의 반대편에 위치한 듯한 맛이었다. 크고 단단한 얼음이 뿜어내는 냉기에 중심을 내주어야만 성립하는 맛이기도 했다. 자신이 견뎌낼 수 있는 온도와 머물 수 있는 환경에 대해 가늠해보면서 은우는 기다란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_「쾌적한 한 잔」, 84쪽
따프롬 사원을 휘감고 있는 스펑나무를 여러 곳에서 거듭하여 관찰하자 어쩐지 저항감이 들었던 첫인상은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스펑나무가 무너져가는 돌벽을 전력을 다해 움켜쥐고 지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아마도 오늘 보는 것 중에 이보다 더 마음을 동요케 하는 광경은 없으리라는 예감도 들었다. _「앙코르」, 111쪽
“우리가 멋진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을 때 뭐라고 하죠? 그렇죠, 앙코르! 하고 말하죠. 바로 이곳, 앙코르와트는 한 번 보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앙코르를 해야, 그러니까 다시 와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기억되는 곳이라는 겁니다. 자, 사진 찍어야죠? 제 앞으로 한 팀씩 와서 서보세요.” _「앙코르」, 124쪽
“돌아가서, 다시 한번 같이 들어볼래요? 볼륨 꽝꽝 울리게 해놓고요.”
세영이 말했다. 자연스럽게 건넨 말이었으나 막상 말을 뱉고 나자 떨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손끝이 저려왔다.
“그렇게 해요.” 가람이 세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속삭였다. “언니가 사는 동네로 제가 찾아갈게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 _「앙코르」, 136쪽
■■■ 트리플 시리즈 소개
[트리플]은 한국 단편소설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세 편의 소설이 한 권에 모이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일반적인 소설집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여러 흥미로운 시도들을 할 수 있으며 독자는 당대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매력적인 세계를 가진 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작가-작품-독자’의 아름다운 트리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