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독자라기보다는
바간의 탑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서 읽기를 바란다”_한은형(소설가)
‘탑의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
히말라야를 사랑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해낸 『눈의 경전』의 해이수 작가가 신작 장편소설 『탑의 시간』을 통해 또 한 번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빠져 있거나 사랑을 상실한 이들이 겪는 시간”을 미얀마의 유적지 ‘바간’의 천년 고탑에 쌓인 시간으로 은유한다. 명과 연, 최와 희 네 명의 남녀는 시간과 기억이 적층되고 정지된 곳, 바간을 여행하며 감춰두었던 자신의 과거의 기억과 다시 마주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행하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다.
바간의 2000개가 넘는 탑들에는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 명과 연, 최와 희도 자신들의 비밀을 한 가지씩 더한다. 그러므로 『탑의 시간』은 단순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랑을 간직하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안에는 저마다 기억과 비밀을 담는 탑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는 시간의 상징과 은유가 바간의 탑처럼 솟아 있다.
탑의 둥근 내부
길이 어긋나는 방향
강의 깊은 중심
별이 휘어지는 속도
몸의 환한 통로
발문‘탑의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일 뻔했던 글 _한은형
작가의 말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움에 늙어간 자와
사람을 사랑해서 겪는 서글픔으로 늙어간 자의 얼굴”
낯선 감각으로 새겨지는 고백의 언어
『탑의 시간』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저마다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떠난 연인이 이십 년 전 보낸 편지에 적힌 대로 바간의 탑에 숨겨놓은 루비 목걸이를 찾기 위해 무작정 떠나온 ‘연’과 약혼녀와 파혼하면서까지 선택한 사랑이지만 결국 그 사람과도 헤어지게 된 ‘명’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떠난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서로의 마음을 잃게 된 ‘최’와 ‘희’. 우연히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게 된 네 사람은 일상을 벗어난 공간에서 자신의 비밀을 누설하기도 하고, 또 다른 비밀을 만들기도 한다.
지나치는 탑 하나하나가 문득 밀봉된 비밀 상자처럼 보였다. 그곳에 담긴 비밀과 사연이 한꺼번에 전부 풀어헤쳐지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희는 소민지 수도원에서 빌었던 소원을 떠올리며 그곳을 자신만의 타임캡슐로 기억했다. (143쪽)
그곳에서는 과거의 비밀과 현재의 비밀이 교차한다. 이십 년 전 연인에게 부치지 못한 ‘연’의 답장은 서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명’에게 전해지고, 소민지 사원에 숨겨져 있던 ‘연’의 목걸이는 우연히 그것을 찾아낸 ‘희’의 목에 걸리게 되고, 또 ‘명’에게 끌리게 된 ‘희’는 ‘명’이 헤어진 연인을 위해 산 루비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건 후 ‘연’의 목걸이를 다시 사원에 숨겨놓는다. 명은 바간에서 양곤으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현실인 듯 꿈인 듯 어떤 중년의 사내와 만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에 비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 탑에 숨겨둘 아무런 비밀이 없는 사람들 말이오”(170쪽)라는 그 사내의 말에 세월을 따라 늙어간 자와 사랑의 통증으로 늙어간 자의 얼굴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나이테가 새겨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탑의 시간』은 시간이 ‘기억’되고, 기억이 ‘간직’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탑의 시간에는 2000개라고 했다가 2200개라고도 했다가 2500개라고도 말해지는 바간의 탑들처럼 은유와 상징과 이야기들이 솟아 있다”는 한은형 소설가(발문: ‘탑의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일 뻔했던 글)의 말처럼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한 수많은 은유와 상징 사이를 여행하고 있다.
작가의 말
작가로 살아온 지 스무 해가 되었다. 한마디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꿈에서는 그리 서럽지 않아도 서럽게 울고 그리 대단찮은 일에도 대단한 듯 웃기 마련이다. 두려움도 견딜 만하고 배고픔도 견딜 만하다. 무엇보다 어떤 배역과 역할을 맡아도 억울하지 않고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확실한 한 가지는 스무 해 동안 멀리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서 지냈다는 점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이해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들 덕분이다. 나의 길은 탑에 있지 않다. 나의 길은 사람들 사이로 뻗어 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이 나의 꽃길이다.
발문
『탑의 시간』에는 2000개라고 했다가 2200개라고도 했다가 2500개라고도 말해지는 바간의 탑들처럼 은유와 상징과 이야기들이 솟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은유와 상징을 여행하는 이야기로도 읽었다. 어쩌면 바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바간의 탑과 그 탑에 쌓인 천 년이라는 시간, 바로 그 쌓이고 쌓인 은유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공간을 여행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여행하는 거라고. 그것도 천 년의 시간을. 그렇게 생각하자 그것들을 안내하는 일에 묘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 같았다. _한은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