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꿈이 서로 녹아든 세계!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작가 배수아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2012년 하반기에 계간 ‘자음과모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2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배수아가 독일 유학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단편과 장편을 오가며 실험해온 비서사적ㆍ반서사적 소설 양식이 미학적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현실이 꿈으로 전이되어 그 안에서 독자적인 구조로 순환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폐관을 앞둔 서울의 오디오 극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의 김아야미를 내세워 기억과 꿈, 그리고 비밀스러운 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야미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사건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이지만, 몇 개의 인물과 설정과 세부 사항이 반복되고 변주되는 만남을 그리고 있다. 배수아 특유의 낯설고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어떠한 경계에도 갇히지 않은, 혹은 갇힐 수 없는 존재에 대해 풀어놓는다.
배수아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서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젊은 작가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독특하다. 이화여대 화학과에 입학한 배수아는 국어 과목을 아주 싫어했다. 당연히 소설 같은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놀다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는 자의식으로 인해 소설을 쓰게 됐다. 1993년 서점에서 단지 표지가 이쁘다는 이유로 우연히 집어든 문학잡지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서 ”신인작가 작품공모” 광고를 보았다. 그리고「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취미로 글을 쓴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문학적 엄숙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당혹스럽고 생경하며 파격적이다. 배수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불온하고 불순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한결같이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늦된 아이들이며 주로 스무살 안팎의 주변적 존재이다. 이들은 사회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진화를 거부하는 인물이며 ‘스스로 선택한’ 이상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신세대적 일상을 파고들며 신세대적 일상에 숨어 있는 존재의 어둠과 불안, 삶의 이중적 풍경에 대한 감각적 묘사로 일관하다. 체험과 사실성이 강조되던 우리 문학사에서 배수아는 은폐된 존재의 어둠을 탐사하며 독특한 개성을 갖춘 신세대 작가로 성장해왔고, 이제는 미적 성숙의 단계를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이지적이면서 자기 주장이 강한 문체를 통해 남녀관계의 속물성을 파헤치고, 독신녀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경제ㆍ섹스ㆍ결혼관ㆍ자기세계에 대한 솔직하고 쿨한 느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사람의 첫사랑』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스스로 추락중이다. 그들의 배후에는 일탈과 파격, 섬뜩한 비애가 차갑게 펼쳐져 있다. 세기말의 쓸쓸함과 밀봉된 희망, 피학적인 아픔이 한꺼번에 만져지는 작품이다.
『붉은 손 클럽』은 외형의 독특함을 넘어, 단자화된 관계에 상처받으면서도 결국 또 다시 사랑을 선택하는 인간의 심리, 사랑의 대상을 향한 비이성적 감성들, 일상에 물든 관계의 지리멸렬함을 포착해 내는 배수아의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배수아의 감각적이고, 이미지적인 글쓰기가 잘 나타나 있다. 『심야통신』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녀 특유의 감각 더듬이로 포착하고 있는 창작집이다. 배수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감동하지 않는 일상인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목마름과 허기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후기 산업사회의 일련의 징후를 상징하고 허무주의적 인간형과 이미지와 기호로 점철된 우리 세대의 문제적인 서사 형식을 보여주면서 자기만의 자리, 자기만의 소설을 탄생시켰다.
『철수』는 인간 존재 안의 어둠과 생의 운명적인 폭력 속으로 더 한층 깊이 탐사해 들어가는 배수아 소설의 불온한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섬뜩한 생의 이면을 보아버린 자의 어둡고 서늘한 내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바나』는, 소설 속의 ‘나’가 외국 여행 중에 산 중고 자동차의 이름이다. 또, ‘그녀’로 불리는 이바나는 여행기를 편집하는 편집자에겐 신비의 여성이다. ‘이바나’는 어느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고, 어느 지방에선 흔한 이름이기도 하다. 자신의 단편집 말미에, 배수아는 ‘나에게 제목이란 면상의 흉터와도 같아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치명적이다. …… 지금 나는 왜 모든 소설은 예외 없이 제목을 필요로 하는가 회의스럽다.’ 고 말했다. 가장 짧은 제목이 가장 좋은 제목이라고도 했는데, 이 소설의 제목 ‘이바나’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이바나’는 내내 소설 속 화제의 중심인데 비해,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뭉개져 있다. 나, K, B, 산나, Y…… ‘죽기 전까지는 대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견디는 불면의 밤을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이 외에도 『동물원 킨트』, 『이바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당나귀들』, 『독학자』, 『훌』, 『에세이스트의 책상』, 『북쪽 거실』, 『올빼미의 없음』, 『서울의 낮은 언덕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뱀과 물』 등을 썼다. 창작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그 사람의 첫사랑』 등과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부주의한 사랑』『붉은손 클럽』이 있다. 또한 몸을 주제로 한 에세이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를 펴냈다. 역서로는 『프란츠 카프카-꿈』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전통 소설의 인물과 이야기 중심에서 벗어나 어떻게 서술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인 「무종」을 통해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월요일 독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독특한 문체와 색깔로 열혈 독자군을 거느려 왔던 그녀는 이제 사유하는 문장의 힘으로 새로운 독자들과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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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꿈, 기록 – 김사과
소설가 배수아, 등단 20주년 그리고 2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어째서 소설이 시를 이야기하는가, 그리고 반대로 시는 왜 소설을 쓰고자 하는가
어떠한 경계에도 갇히지 않은, 혹은 갇힐 수 없는 존재
“손바닥 바로 아래에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나는 하나의 감정이에요, 하고 말하는 얼굴.”
또한 거기서 우리의 이름은 어떻게 불리고 어떻게 기억되는가
현실과 꿈이 서로를 향해 녹아드는 세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정확히 20년 전, 포스트모던 소설의 새로운 전범을 선보인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으로 1993년 계간 『소설과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배수아는 문단에 등장했다. 20년 동안 보여준 그의 작가적 성취와 쉼 없는 활동은 소설과 에세이, 번역을 아우르는 것이었고 그의 사유와 문장은 동시대 한국, 한국어, 한국인의 경계가 어디까지이며 그것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인해보려는 듯이 한국문학의 문법과 지평을 개척해갔다. 그리고 이제 배수아는 새로운 장편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올해 우리 앞에 선보인다. 작년 하반기에 계간 『자음과모음』에 연재했던 작품이기도 한 이번 신작은 그가 독일 유학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단편과 장편을 오가며 실험해온 비서사적/반서사적 소설 양식이 미학적으로 완성되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전작 『서울의 낮은 언덕들』에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직업인 낭송극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목소리/들’이 소설화되는 과정을 샤머니즘적 색채로 표현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말 그대로 현실이 꿈으로 전이되어 그 안에서 독자적인 구조로 순환되는 세계를 건설했다. 폐관을 앞둔 서울의 유일무이한 오디오 극장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의 ‘김아야미’를 내세워 그는 기억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그리고 비밀스러운 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야미와 그가 만나는 사람들, 이를테면 암에 걸린 독일어 선생 여니, 극장의 폐관으로 아야미처럼 실업자 신세가 된 극장장, 소설을 쓰러 난생 처음 서울을 방문한 독일인 볼피 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표면적 중심이지만, 실은 반복되고 변주되는 만남을 통해 오히려 이 소설은 시(詩)와 이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소설이 시를 이야기하는가, 그리고 반대로, 시는 왜 소설을 쓰고자 하는가, 또한 거기서 우리의 이름은 어떻게 불리고 어떻게 기억되는가. 배수아는 특유의 낯설고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어떠한 경계에도 갇히지 않은(혹은 갇힐 수 없는) 존재의 날것을 절창의 솜씨로 그려나간다.
“이제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줘요.”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다른 배수아 소설이 그러하듯 주요한 스토리라인을 요약하려는 시도를 부질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몇 개의 인물과 설정과 세부 사항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변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제목조차 갖지 않고 숫자로만 표시된 4개의 장에 걸쳐서 이야기는 그물처럼 온 사방에 연결되어 있어 책을 펼친 독자가 아름답고 낯선 문장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니’는 극장장이 아야미에게 소개시켜준 독일어 선생이자, ‘부하’가 약을 배달하는 고객이자, 밤마다 그가 전화를 거는 텔레폰 서비스의 대화 상대이자 한편 아야미가 근무하는 오디오 극장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사덱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낭독자이기도 하다. 또한 독일인 소설가 볼피가 만나기로 예정되었던 여자이자, 반복해서 걸려오는 전화에 아야미가 대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 반복되고 변형되는 여니에 대한 묘사는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형식 자체를 묘사하는 것과도 같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그러니까 덤벼들면 풀 수 있는 과제처럼, 그러나 그 모든 시도들이 소설을 읽다보면 무의미해져버리는 것처럼. 즉, 이 소설은 독자가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작가가 설정한 도착 지점에 당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이 이야기 속에, 다시 말해 작가가 건설한 몽환의 세계 안에 영원히 머물기를 원한다. 장이 바뀌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무언가 뚜렷한 상황과 전개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여도 이내 인물들과 시공간은 꿈의 파편처럼 흩어져 의미와 존재 모두가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마지막에 남은 것은 “소리의 그림자”,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 “보이지 않는 사람들” 같은 매혹적인 환상이다. 독자가 구체적인 등장인물과 전통적인 기승전결이라는 소설 형식에 대한 강박을 버린다면, 배수아가 만든 몽환의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어 문장이 선사할 수 있는 희귀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이 될 것이다. 배수아의 문학이 앞으로 어디로 향하고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발문 _꿈, 기록 (소설가 김사과)
결국 꿈을 기록한다는 것은 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꿈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꿈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꿈의 기록을 읽는 것 또한 꿈의 이해도 분석도 될 수 없다. 꿈의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그 꿈에 참여하는 것이다. 꿈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재현을 거부하는 존재를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환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 환영의 출처를 알아낼 수는 없다. 그러니 포기하라. 포기하고 눈을 감아라. 그러면 아주 희귀하며 기이한 꿈에 잠겨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흔치 않은 즐거움을 줄 것이다. sheer pleasure. 한국어 산문 문학이 주는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지연과 반복과 몰입이 가져다주는 쾌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