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현실에서 이방인으로 방황하는 사람들!
《바빌론 특급우편》, 《네 가지 비밀의 한 가지 거짓말》의 작가 방현희가 내놓는 두 번째 소설집 『로스트 인 서울』. 비의로 가득 찬 생의 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회적 금기, 욕망의 억압과 해방을 주로 다뤄왔던 작가가 이번에는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주제들을 바탕으로 삼고 현실로 인해 파국을 맞이하는 개인 혹은 관계에 더 집중한다.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파하는 작가의 역량은 여전하다.
표제작 《로스트 인 서울》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여성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로라, 네 이름은 미조》는 영국인의 아내가 되어 타국으로 떠난 한국 여성이 겪는 방황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이방인이자 타인으로 떠도는 인물들과 무기력한 ‘나’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찰나의 행복, 깨진 꿈, 파괴된 사랑, 거짓과 환상으로만 유지되는 세상에서 삶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7편의 단편을 만날 수 있다.
방현희
소설가. 삶의 이면을 투시하는 날카로운 시선, 섬세하고 감각적인 심리묘사, 창의적인 이야기와 구성으로 인정받아온 그의 또다른 직업은 간호사. 소설가와 간호사로 사는 세계는 몹시 멀고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범주로 충분히 묶일 수 있었다. 십여 년 동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에서 치열한 사랑, 숱한 기대와 좌절을 겪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삶의 공포와 두려움을 말할 수 없었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시간은 곧 그를 끊임없이 글쓰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9년을 간호사로, 17년을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다.
2001년 『동서문학』에서 「새홀리기」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제1회 『문학│판』 장편 공모에서 『달항아리 속 금동물고기』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단편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 『로스트 인 서울』 장편소설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 『달을 쫓는 스파이』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복수』 등을 썼다. 장편소설 『불운과 친해지는 법』은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BOOK TO FILM에 선정되었고, 단편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로 2018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로스트 인 서울
세컨드 라이프
탈옥
그 남자의 손목시계
후쿠오카 스토리-위급 상황에서의 이별에 관한 섬세한 보고서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퍼펙트 블루-기이한 죽음에 관한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사례
해설 서울 기행: 잃는 세계를 앓기_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그곳에서 나는 꿈을 꾸었어. 지금의 나를.”
찰나의 행복, 깨진 꿈, 파괴된 사랑
거짓과 환상으로만 유지되는 세상에서 삶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
『바빌론 특급우편』,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의 작가 방현희
등단 12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소설집
2001년 등단한 이래 12년 동안 한 권의 소설집과 세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며 꾸준히 작품세계를 심화시켜온 작가 방현희의 두 번째 소설집 『로스트 인 서울』이 출간되었다. 표제작 「로스트 인 서울」을 비롯해 7편의 단편이 소설집에 수록되었다. 비의로 가득 찬 생의 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회적 금기, 욕망의 억압과 해방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일단의 변화를 내비친다.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주제들을 밑그림으로 삼고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몰락과 파국을 맞이하는 개인 혹은 관계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파하는 탁월한 역량은 여전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거나 선택의 여지 없이 위기에 내몰리며(「로스트 인 서울,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후쿠오카 스토리」), 환상과 죽음의 세계로 도피하거나(「세컨드 라이프」, 「퍼펙트 블루」), 무기력하고 답답하게 현실의 쳇바퀴를 돌 뿐이다(「탈옥」, 「그 남자의 손목시계」), 여기에서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 (탈)근대 도시의 보편성을 함유한 ‘장소’”(허희, 문학평론가)로서 제시된다. 작가는 ‘병든 서울’에서 “꿈을, 기억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을, 자신을, 삶을 상실하고 있”는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미세한 결까지 잡아낸다. 7편의 수록 작품이 개별적으로 쓰인 것이지만 연작처럼 긴밀하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든 현실, 이방인이자 타인으로 떠도는 인물들과 무기력한 ‘나’들
「로스트 인 서울」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서울로 유학 온 여성 ‘그렉안나’를 둘러싼 이야기다. 평범한 유학생이던 그녀는 우연히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국민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케이블 방송업체를 운영하는 ‘강’의 여자가 되어 고급아파트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를 거스르는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인기는 급락하고 결국 강에게도 버림받는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열렬히 지원해주는 인종”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인은 그녀를 내쳤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시선에 의해 규정되어버린 그녀는 추락하여 이방인으로 떠돌 수밖에 없다.
안나가 한국에서 떠도는 인물이라면 「로라, 네 이름은 미조」의 ‘로라/미조’는 타국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다. 영국인의 아내가 되어 애버딘으로 떠난 그녀는 새로운 문화와 규율에 대한 무지로 여러 차례 낭패를 겪는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다정함과 너그러움 속에 숨은 날카로운 시선”에 진저리를 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합리성이란 잔인한 무관심과 냉대의 다른 말이었다. 그녀는 이 숨 막히는 현실을 자해라는 방법으로 이겨내려 한다. 깨진 영국 왕실의 찻잔이며 버버리 트렌치코트의 단추며 해변의 모래를 삼키는 그녀의 행위는 고통을 통해 삶을 지탱하면서 파멸해가는 역설적 인간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톰의 뒤를 따라 침실로 가다가 그녀는 순간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주방 조명 아래에서 빛을 발하는 찻잔 조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찻잔 조각 앞으로 다가갔다. 영국 여왕의 하사품이라. 영국의 전통적인 문양, 영국인들의 영혼이 깃든……. 한 조각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그때 탐욕스러웠는지, 절망스러웠는지 그건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로라, 네 이름은 미조」, 198쪽)
이들 두 작품에는 주인공 여성을 지켜보는 ‘나’가 존재한다. 「로스트 인 서울」의 나는 안나에 대한 사랑을 품고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그녀와 강의 성애와 폭력을 지켜보지만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는 못한다. 그저 “내 사랑이 과장되었던 것은 아닌지.” 하고 초라하게 되물으며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상황을 방기한다. 「로라, 네 이름은 미조」의 ‘나’는 검시의로서 해부대에 누운 그녀의 위에서 이물질들을 끄집어내면서 그녀를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지만 너무 늦은 일일 뿐이다.
무기력한 상황에 놓이기는 「탈옥」과 「그 남자의 손목시계」의 ‘나’들도 마찬가지다. 「탈옥」에서 주가조작 혐의로 감옥에 들어와 있는 나는 병원에 입원하는 방법으로 도주하기 위해 장기를 떼어내지만 번번이 탈출에는 실패한다. 나는 “마지막 장을 떼어내다 죽더라도 나가서 죽”겠다고 호언하지만 상황을 간파하고 있는 간수 앞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의 ‘나’는 어려서부터 자신과 어머니를 가혹하게 폭행해온 아버지에게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위의 상징인 손목시계를 부수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계획은 계속해서 유예된다.
사랑의 상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환상과 죽음으로의 도피
막막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응하는 인물들의 양태가 환상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번 소설집의 두드러진 점이다. 「세컨드 라이프」의 ‘나’는 결혼 16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여행 온 중국의 가흥을 예전에 자신이 형과 함께 살았던 곳이라고 ‘기억’하고 그 추억들을 ‘회상’한다. 아내가 그 사실을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착종된 기억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한정 없이 기억 속에서 살고 싶었다.”고 진술한다. 현재에서 숨 쉬고 있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겠다는 죽은 자로서의 삶을 고집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떠나 기억을 통한 환상을 좇는 데는 형의 투신자살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토록 행복했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 지금보다 나은 게 아닐까? 지금은 그 삶의 잔여로서 흘려보내고 있을 뿐인데, 이 하찮은 삶을 위해 기억을 버려야 하는 걸까? (「세컨드 라이프」, 77쪽)
‘기이한 죽음에 대한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사례’라는 부제가 달린 「퍼펙트 블루」는 세계적인 슈퍼스타 K, 한국의 스타 M, M처럼 되기를 선망하는 M2가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대중의 요구대로 살아야 하는 스타의 삶과 스타와의 동일시를 꿈꾸는 팬의 비극이 창백하면서도 신비로운 색채감과 약물의 흡수 과정을 통해 몽환적으로 그려진다.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몸이 푸른색으로 변하면서 형체가 사라져가는 증상을 보이는데, 결국 아득한 황홀감과 쾌락의 극치를 맛보며 스스로를 이승에서 지워버린다.
한편으로, 견고하리라 믿었던 사랑마저 위기 앞에서 너무나 허약하게 무너져 내린다. ‘위급 상황에서의 이별에 관한 섬세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단 「후쿠오카 스토리」에서 두 쌍의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러 떠난 요트여행에서 배가 조난되는 위험 상황에 처하는데, 인물들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토해내며 서로를 할퀴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들이 팔 년간 쌓아온 사랑은 ‘검은 먼지 정령’이 삼켜버린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
방현희의 소설은 ‘서울’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작품 속 인물들이 처한 현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 병든 서울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로스트 인 서울’은 계속되고, 우리는 작가의 다음 작품이 어디로 흘러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