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중순 한·일 합작 영화 <역도산>의 개봉을 앞두고, 그의 미망인이 쓴 <내 남편 역도산>이 자음과모음에서 나왔다.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잇따라 격파하고 패전국의 국민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던 역도산. 그가 일본 스모 선수가 되는 과정에서 미망인 다나카 게이코의 만남, 결혼, 야쿠자 조직원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숨지기까지의 인간 역도산에 대해 풀어놓는다. 그녀는 역도산이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인 날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보듯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강철같은 사나이가 아니라, 여리디 여린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회고한다. 일본인으로 살고자 했으나 결코 일본인으로 살수 없었던 사나이, 짧지만 강렬한 드라마처럼 살다 간 역도산의 면면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다나카 게이코
■이 책을 만든 사람들
역도산
1924년 함경남도 용원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신락이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스모 명문 니쇼노세키 방에 입문하여 스모 선수가 되었다. 이후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승승장구하며 대활약을 펼쳤지만, 요코즈나가 되는 문턱에서 스스로 마게를 자르고 은퇴했다. 이후로 프로 레슬러로 거듭난 그는 미국에서 레슬러 수업을 거친 뒤에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했다.
역도산은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잇따라 격파하며 패전국의 국민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에게 용기를 심어주어 ‘일본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프로모터, 스포츠 레저산업 분야에서도 뛰어난 사업적 기질을 발휘하여 사업가로서도 크게 인정을 받았다. 1963년 6월 다나카 게이코와 결혼한 뒤, 같은 해 12월 야쿠자 조직원과 사소한 다툼 끝에 칼에 찔린 그는 일주일 만에 장폐색으로 사망했다.
지은이_다나카 게이코
1941년 6월 6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현립 히라누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년 후에 일본항공 객실 승무원(스튜어디스)으로 입사했다. 이 시기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역도산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제가 시작되었으며, 1963년 6월 5일 역도산과 결혼했다. 1964년 역도산 사후에 딸, 히로미를 출산했다. 현재는 역도산을 추모하며 여러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옮긴이_한성례
1955년 태어났다. 시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세종대학교 일어일문과를 졸업하고, <시와 의식신인상>과 <허난설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감색치마폭의 하늘은』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세상의 균열과 혼의 공백』『은하철도의 밤』『자살보다 섹스』『단 하나의 보물』『먹는 여자』와 일본현대시인시선집 『잠자는 거리 혹은 가라앉는 지층』『나를 조율한다』『7개의 밤의 메모』, 안도현시선집 『얼음매미』 등 다수가 있다.
프롤로그
1장 소년장사의 꿈
모래판의 기적 ㅣ 스카우트 ㅣ 요코즈나가 되어서 돌아올게요 ㅣ 김신락에서 역도산으로
2장 요코즈나를 향한 집념
영원한 이별 ㅣ 아,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ㅣ 머리를 자르다
3장 챔피언
가라데 촙의 탄생 ㅣ 완벽한 변신 ㅣ 당당한 패배 ㅣ 역도산이라면, 이길 수 있다 ㅣ 얼룩진 간류지마의 혈투 ㅣ 고독한 영웅
4장 193일간의 결혼, 영원한 사랑
인연을 맺어준 한 장의 사진 ㅣ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ㅣ 역도산의 첫 눈물 ㅣ 역도산의 두 번째 눈물 ㅣ 3,000명이 동원된 결혼식 ㅣ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행
5장 아무도 모르는 그와 나의 결혼생활
덩치 큰 장난꾸러기 ㅣ 바보아빠 ㅣ 명승부와 역도산의 진면목 ㅣ 열등감을 극복한 노력가 ㅣ 역도산의 취미 ㅣ 역도산의 여자들 ㅣ 인맥과 카리스마를 갖춘 사나이 ㅣ 터프하면서도 섬세했던 사람
6장 프로레슬러를 위한 낙원
새로운 꿈을 향한 질주 ㅣ 아카사카의 리키 왕국 ㅣ 참의원 선거 출마 권유
7장 한일간의 숨은 외무장관
역도산의 한국과 북한, 두 조국 ㅣ 가라데 촙에 담긴 의미 ㅣ 봉인된 한 권의 앨범 ㅣ 극비 방한과 스포츠 친선대사 ㅣ 38선의 절규 ㅣ 다음은 북일 국교화 교섭에 노력하고 싶다
8장 너무나 갑자기 떠나버린 당신
임종시 올려보이던 세 손가락 ㅣ 북한에서 열린 역도산의 장례식 ㅣ 돌연한 역도산의 죽음 뒤에 찾아온 고통 ㅣ 지금이야말로 역도산의 투혼을
역도산 연보
투지를 가르쳐주신 스승 역도산
역자의 말
사후 40년 만에 공개되는 사진자료와 역도산의 삶에 그려진 한반도의 근대사
전쟁에 진 일본인들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일본인이 아닌, 한반도 출신의 역도산 선생님이었습니다. 시합에서 거대한 미국인을 넘어뜨려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열등감을 일소시켜 주었고, 전후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역도산 선생님이 지금도 영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역도산 선생님이 한반도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이런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한반도 사람이라서 저는 한반도에 강한 애착이 갖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이노키(정치인, 역도산의 제자)
■시대의 정점에서 역도산을 만나다
“13살 소녀의 가슴에 새겨진 프로레슬러”
1954년 2월 19일, 일본에서는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다. 일본 최초로 TV에 생중계된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역도산이 세계적인 미국인 레슬러 샤프 형제를 잇달아 격파하자, 전 일본열도는 뜨거운 흥분의 열기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패전국의 국민이라는 열등감과 백인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역도산의 투혼을 통해 국토 재건의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당시 13살이던 다나카 게이코 역시 수많은 인파에 파묻힌 채 아버지의 어깨에 앉아 역도산의 경기를 시청한다. 다나카 게이코는 이날 경기를 보면서 어떤 ‘존재감’이 가슴에 자리 잡는 것을 느낀다.
“한 장의 사진으로 우연히 맺은 인연”
그로부터 8년 뒤인 1962년 겨울, 일본항공의 스튜어디스로 일하던 다나카 게이코는 외국에서 찍어온 스냅사진의 현상을 아버지에게 맡긴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상한 사진 가운데 한 장을 따로 간직한다. 이 사진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역도산의 손에 들어가고, 역도산은 단아하고 정숙한 외모의 다나카에게 한눈에 반한다.
비행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다나카에게 어느 날, 기모노 차림으로 파티에 참석해달라는 홍보부의 의뢰가 들어온다. 파티에서 다나카는 역도산과 짧은 만남을 가진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자리는 일본항공의 VIP이며 지주이기도 한 역도산이 다나카와의 만남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마련한 것이었다.
이날 이후로 역도산과 다나카의 만남은 계속된다. 역도산이 유명인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데이트는 주로 해외에서 이루어진다. 역도산이 다나카의 비행근무에 맞추어 비행기에 탑승하고, 현지에 도착하면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이 자유로운 땅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그렇게 사랑을 키워가던 두 사람은 1963년 6월 5일 수천 명의 하객이 축하하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린다.
■봉인된 앨범을 열다_역도산 사후 40년 만에 공개된 자료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난 가장 인간적인 역도산의 진솔한 기록”
『내 남편 역도산』은 ‘천황 다음으로 유명했던 챔피언’이라는 수식어를 벗어던진 진솔한 인간 역도산의 면모를 담은 책이다. 193일이라는 짧은 결혼생활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남편에 대한 미망인의 애절한 사랑이 역도산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미망인은 생전의 역도산이 “그렇게 일찍 갈 줄 알았던 듯”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정열을 불사르며” 살았다고 전한다. 식민지 국민의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상을 향해 내달렸던 그는 세계를 제패한 이후로도 쉼표 없는 인생을 숨차게 달려갔다.
『내 남편 역도산』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역도산의 사생활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사람이 증언하는 최초의 책이다.
“40년 동안 묻어둔 가슴속 이야기와 사진 자료”
역도산이 북한 출신이라는 미묘한 문제 때문에 미망인은 남편의 사후에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북한의 일본인 피랍 문제가 북일간 외교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었고, 일본에서는 역도산이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 자체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북일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 정상화됨에 따라 다나카 게이코는 그동안 아무한테도 드러내지 않았던 속내를 털어놓고, 북한의 역도산 가족들이 보내온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은 역도산의 북한 가족들―큰형 항락, 딸 영숙 등―이 역도산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사진에는 미망인을 위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 외에도 북한의 큰형이 보낸 편지와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 정부 요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한일간의 숨은 외교관_미스터리에 싸인 한국방문
“38선에서 북녘을 향한 외침, 형님!”
한일 교섭의 격동기였던 1963년 1월 8일, 역도산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출발한다. 한국을 방문한 역도산은 당시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에 있던 김종필과 독대를 하는 등 정부 요인들과 연일 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이때 오간 이야기가 어떤 것이었는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교적 투명하게 밝혀진 내용은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운동기구 협찬을 요청받은 것 정도이다. 김종필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주위를 물린 채 단 두 사람만이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역도산은 한국 방문 기간 동안 서울시장으로부터 ‘명예 서울시민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역도산이 한국에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언론은 이 일을 크게 다루었던 데 반해 일본은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역도산은 한국정부의 요인들과 함께 38선을 찾아간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웃옷을 벗어던진 역도산은 철책으로 다가가 두 팔을 벌린 채 절규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비서 요시무라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역도산이 외친 말은 “형님!”이었다.
“역도산은 한반도 평화의 키를 쥔 핵심인물이었다”
역도산이 한일간의 비공식 외교 사절로 활동하던 당시, 그는 참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는다. 하지만 역도산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정치계 진출 권유를 고사한다. 미망인은 만약 이때 역도산이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다면, 그는 분명 당선되었을 것이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망인의 낙관적인 예측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역도산은 일본과 한국에서도 영웅이었지만, 북한에서도 역시 영웅이었다. 특히 김일성은 그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역도산의 가족들에게 체육계의 요직을 내주기도 했다.
한일 외교 정상화가 난항을 거듭하던 시점에서 일본정부가 역도산을 비공식 사절로 내세운 점에서도 역도산이 차지하는 외교적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역도산은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분단 현실에서 천애고아가 된 재일한국인의 분투기
“한반도를 스위스 같은 영세중립지대로 만들고 싶다”
생전에 역도산은 “한반도를 스위스 같은 영세중립지대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 역도산은 만년에 스위스에 정착할 계획을 갖고 있었고, 국제세계에서 스위스가 중립국으로서 지닌 위치를 매우 동경했다.
역도산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이었다. 식민지 현실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17살의 김신락(역도산의 본명)은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선수 역도산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대국에 기대어 입신을 꿈꾸었던 역도산에게 일본의 패망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미망인은 식민지 국민으로서 해방을 맞았지만, 역도산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식민시대의 지식인들이 일본의 신문명에 매료되어 친일의 길에 들어섰듯, 역도산 역시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힘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한 또 다른 도전”
1950년 8월 25일, 역도산은 요코즈나로 향하는 문턱에서 스스로 마게를 잘라버리고 스모를 포기한다. 당시 역도산이 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역도산이 행한 이 극단적 행동과 연관지어야 할 역사적인 사건이 있다. 역도산이 머리를 자르기 두 달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역도산은 일본의 패망에 이어 조국이 둘로 갈라진 상황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요코즈나가 되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으로 인해 역도산이 스스로 마게를 자른 것은 아니었을까.
역도산이 스위스를 동경했던 것은 스위스가 국제분쟁에 휩싸이지 않는 중립국가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갈라진 조국 현실과 가족이 있는 북한의 참상은 역도산으로 하여금 유토피아를 꿈꾸도록 만든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러로 세계를 제패한 뒤 사업을 통해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코자 했다. 하지만 그는 삶의 정점에서, 야쿠자의 칼에 복부를 찔린 뒤 장폐색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미망인은 역도산 사후에 그의 딸을 낳았으며, 오늘날까지 남편을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