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삶과 무용의 재발견!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자서전. 세계적인 무용가로 활동하다가 1947년 4월 월북하여, 1969년 8월 북한 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최승희의 삶과 무용을 재발견하고 있다. 최승희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 그동안 월북 예술가라는 이유로, 친일 예술가라는 이유로 그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책은 최승희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그리고 무용 입문 과정에 대해 직접 쓴 수필 9편과 무용 입문을 도와준 친오빠 최승일과 주고받은 편지 3통을 수록함으로써,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 속에서 민족혼을 지키며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세계화를 이룬 그녀의 삶과 무용에 대한 고백을 담아냈다.
또한 최승희를 직ㆍ간접적으로 지켜본 국내외 무용가, 평론가, 소설가, 언론인 등 다양한 인사들이 그녀의 무용에 대한 인상과 의미를 다각적으로 평가하고, 가능성을 짐작한 평론도 담아냄으로써, 그녀가 걸어간 무용가로서의 삶을 객관적으로 가늠하고 평가하도록 도와준다. [양장]
최승희
최승희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1911년 11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192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었으며, 승무의 대가 한성준에게 전통무용을 배웠다. 1929년에는 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했고, 이듬해인 1930년에는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 발표회를 가졌다.
1931년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인 안막(본명: 안필승)과 결혼했으며, 1934년에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첫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에는 미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을 순회공연 했고, 1942년에는 16일간 24회의 연속 독무 공연을 했다.
1947년 4월에 월북하여 1950년에는 소련 순회공연을 했으며, 1951년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가 되었다. 1952년 공훈배우, 1955년 인민배우,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1958년 남편 안막이 숙청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 이후로도 1964년에는 《조선아동무용기본》발간, 1966년에는 문학신문에 <조선무용 동작과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 발표 등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1969년 8월 8일, 북한 당국에 의해 숙청당하면서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1 영혼의 몸짓
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와 서모(庶母)
나의 결심과 나의 성격
눈물의 이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연구에
독립 무용 연구소 개설
결혼 전후
또다시 동경에
출발 전야
누이에게 주는 편지(최승일)
형제에게 보내는 글(최승희)
고뇌의 표현(최승희)
2 민족혼의 승화
무용은 마음의 창(무용가 석정막)
무희 최승희론(論)
최승희에게 기(寄)함
민족 무용가로서의 최승희
최승희에게 주문함
한 개의 감상
최승희 여사의 무용을 보고
최승희 찬(讚)
미견(未見) 최승희(조선파와 양무파)
최승희론(論)
최승희의 무용 예술
최승희의 무용 세계에 관하여
동양의 리듬
육체의 탄력
장쾌한 진로를 축복한다
세련되어 가는 기예(技藝)
조선 사람의 자랑이 되도록
최승희 씨의 인상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기대
최승희 무용
최승희 작품 해설
솔직한 내면의 독백,
최승희를 둘러싼 모든 오해를 풀어 주는 책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지구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 보렵니다.”
오해1. 최승희는 친일 예술가이다
1930년대 후반 유럽, 미국, 중남미 등지를 돌며 약 1백50여회의 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무용가 최승희! 그녀는 무용가로서 10 여 년간 일본 동경에서 활동하였고, 한국에서의 4년 활동과 더불어 세 해 동안 세계 순회공연을 하였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열여덟 해 동안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그동안 월북 예술가라는 이유로, 또한 식민 시대를 살았던 친일 예술가라는 꼬리표로 인해 그동안 그녀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게 사실. 이에 최승희는 평소 “예술과 정치는 다르다.”는 분리론을 펴며 자신의 무용은 예술로서의 가치를 우선시할 뿐, 어떤 목적성이나 정치성을 갖고 이뤄지지 않았음을 삶과 예술을 통해 역설하였다.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을 앞두고 오빠 최승일과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과 포부를 밝히고 있다.
“바다에 떠 있는 큰 군함을 볼 때면 사람의 힘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함상(艦上)에 걸려 있는 대포의 포구는 창공을 향해 기운차게 팔뚝질을 하고 있습니다. 군함은 나라를 위하여 싸웁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서양으로 싸우러 건너갑니다. 아, 나는 기쁩니다. 용기백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심되는 것은 저는 제 자신이 확실히 조선의 호흡 ― 조선의 리듬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 오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경우에라도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고 그 민족의 예술도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요.”
그녀는 이처럼 자신의 무용을 서양에 대적하는 일종의 전투로 묘사한다.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떨치게 될 그 순간에도 민족의 현실과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춤사위에 민족혼을 담으려고 노력한 최승희!
친일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로부터 그녀는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 무용 예술의 근저에는 민족혼을 승화시켜야 한다는 과업에 대한 책임과 헌신이 짙게 배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무용의 불모지의 동방의 작은 나라, 한 여인의 몸짓은 마치 소리 없는 총성으로 울렸던 것이다.
오해2. 최승희 무용은 주체적 본질이 결여된 하나의 서양 무용일 뿐이다
“조선의 무용이란 겨우 그 빈사의 상태를 기생들에 의하여 주석(酒蓆) 같은 데서나 명맥을 유지하는 것 이외에는 무용이라고 할 만한 존재도, 그리고 거기에 대한 관련 문헌도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승희의 말처럼 조선의 무용은 ‘빈사 상태’나 다름없을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다. 친오빠인 최승일은 “조선에서의 여교사 노릇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예술계를 위하여 누군가는 선구자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며 어린 나이인 그녀를 사범학교가 아닌 동경행을 이룰 수 있도록 부모님을 설득하고 그녀를 무용에 입문시킨 대목은 그 당시 조선의 예술, 즉 무용 분야의 미개척 현실을 극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최승희는 주석(酒蓆) 같은 데서 조선무용의 명맥이 남성들의 유희를 위해 종사해야 하는 가무로 전락, 그마저도 실낱같이 유지되고 있던 현실을 개탄하며 조선무용의 환골탈태의 사명을 가졌었다.
춤의 형식을 논하기 이전, 춤을 가능케 하는 정신(혼)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주체적 본질의 근거를 두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최승희 춤의 다이나믹한 역동성들이 서양무용의 형식으로 치부되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시 조선무용의 진일보를 위 해 불가피하게 부딪쳐야 할 문제였다고 본다면, 하나의 실험과 창조의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한국적 미학에 기초하여 서양의 미학과 융합된 것, 그 정신은 어디까지나 탈(脫)조선의 영역이 아닌 민족 전통과 미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식의 것을 접목, 계승시켰다고 할 수 있다.
최승희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평가와 시선들
“그가 선보인 조선 춤들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재래의 조선 춤을 테마로 하여 대부분 서양식 기법을 가미한 것으로 현대의 조선 사람에게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박경호(朴慶浩)
“검은 장막에 우윳빛의 사지(四肢)가 간드러진 포물선을 그린다. 허공을 헤치고 나르는 육탄(肉彈)은 천백의 심장을 파열시키고야 말 매력을 가졌나니, 생경한 선율, 사변적 내용, 극적 설명법 등……. 비판적 입을 가지고서 말하려는 자의 오관을 관통하고 만다.”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김복진
“신작을 발표하는 족족 놀랄 만한 새로운 경지의 개척이었고, 구작(舊作)의 재발표(再發表)에 있어서도 자꾸만 보다 더 세련된 기예를 보여 주는 것은 여사가 단지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닦을수록 더욱 빛나는 타고난 소질을 풍부히 가진 까닭인 줄 압니다.”
-동아일보 학예부장 서항석
“나는 그 색채와 리듬과 포즈에 놀랐다. 그때는 내가 무용에 대한 서적도 읽던 때였다. 그 하나하나의 동작과 리듬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런데 양의 무용은 끝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서양무용은 그 후 조선에서는 보았으나 여전히 그의 균형 잡힌 육체와 아울러 인상적이고 감명 깊게 보았다.
-<조광> 편집자 함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