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름』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던 작가의 신작. 『현기증』은 사랑을 통속적이라 여기는 ‘나’와 진실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갈등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유진’의 이야기다. ‘유진’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나’의 일기와 편지를 읽으며 ‘나’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알게 된다. 사랑이란 스쳐가는 것일 뿐이었던 ‘유진’에게 드디어 사랑은 ‘치명적’인 무언가가 된다. ‘유진’이 사귀던 남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대목이나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그렇다.”는 말은 그래서, 더욱 사실적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든 ‘사랑’이란 사람을 변하게 한다.
고은주
1967년 6월 부산에서 태어나 1990년에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나이 차가 많은 언니 오빠들 덕분에 일찍부터 헤르만 헤세나 토마스 만 등의 독일 관념 소설을 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시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면서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학창시절에는 반장을 도맡아했고 전교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이른바 ‘범생이’였다. 작가가 꿈이면서도 생활인의 의무도 다하고 싶었던 그녀는, 예술지상주의보다는 삶에 뿌리내린 문학, 살면서 얻어지는 것들을 담아내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진주 MBC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고, KBS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아나운서 생활 역시 소설가로서 경험을 쌓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약 3년 간 활동한 후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1995년에 단편소설 『떠오르는 섬』이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등단했고, 이후 ‘정확한 문장으로 주인공의 일상과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 내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찬사를 받으며 여러 작품활동을 해왔다. 1999년에는 첫 장편소설 『아름다운 여름』으로 제23회 오늘의 작가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아름다운 여름』은 그녀가 아나운서로 일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방송국 아나운서로 살아가는 여주인공과 그녀에게 옛 애인의 모습을 투영시켜 집요하게 접근하는 스토커의 이야기가 얽힌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두 번째 장편소설인 『여자의 계절』은 [문학사상]지에 발탁되어 1년간 연재 후 출간한 것으로, 나날이 변화하고 있는 한국의 사랑과 성(性) 풍속도를 대담하고 치밀한 묘사로 보여준다. 그녀는 기교를 부린 문체보다는 진지한 자기 고백적 글쓰기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 밖의 저서로는 첫 창작집인 『칵테일 슈가』를 비롯하여 동화 『너는 열두 살』, 장편소설 『현기증』, 『유리바다』, 『신들의 황혼』 등이 있다.
작가의 말 … 6
사소한 편지 … 9
장례식 … 14
휘발성 메모리 … 19
존재감 … 31
모래언덕 … 39
아뇨, 모릅니다 … 48
현기증 … 62
대체 뭘 기대하니? … 84
건조주의보 … 92
인터뷰 … 98
나는 이런 사람 … 105
해리 … 146
사랑니 … 152
꿈, 아프리카 … 163
무덤 … 173
18세기 오케스트라 … 183
불가항력 … 193
견뎌낼 수 있을까 … 201
엔딩 크래딧 … 210
그리고, 비 … 217
기습 … 229
셧다운 … 239
현기증, 낭떠러지의 아름다움-하성란 … 243
작가 스스로 ‘연애 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 이번 작품은 33세의 한 소설가 신유진의 돌연한 죽음으로 시작한다. 신유진의 대학 동창이자 잡지사 기자인 오민영은 그녀의 죽음을 특집기사로 쓰기로 한다. 그러던 중 오민영이 신유진과 전도유망한 벤처캐피탈리스트의 사랑에 빨려들게 된다는 큰 틀 위에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간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의 사랑조차 자신의 사랑을 통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심한 오해와 오독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인터넷 메일로 주고받은 독특한 상호 교감과 죽은 소설가가 남긴 몇 편의 일기같이 단편적인 단서로부터 그들의 이루어지지 않은 러브스토리를 상업성에 맞게 포장할 수밖에 없는, 상업주의가 극에 달한 이 사회가 이 소설에서는 비판적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내가 사라져버린다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될까. 주춧돌 하나 제대로 세워놓지 못한 채 비루한 글만 잔뜩 만들어낸 나의 삶……. 오독을 먹고 자란 그 글들은 살아남는다 해도 결국엔 나에 대한 오해만 키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글 쓰는 자의 운명일 수밖에 없다면…….
죽음이 아니라 죽음 후의 오독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소설가. 2000년 성을 통한 여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장편 《여자의 계절》이 뜨거운 성담론을 불러왔고 그 작품을 끝으로 작가는 더 이상 성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김서인과 소설가 신유진의 순조롭지 못한 만남에서도 이러한 염려는 맞아떨어진다. 충분한 감성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매일매일 돈과 관련된 숫자를 만지며 살아가는 벤처캐피탈리스트에게 연애 감정은 단지 소모적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을 통해 작가는 사랑이란 결국 상대의 한 부분을 발췌하고 과장해서 거두절미 몰두해버리는 것, 전후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보고 싶은 쪽만을 바라보는 것, 그 심각한 자기중심적 환각 상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렵고도 달콤한 한순간의 현기증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사랑의 실체와 맞닥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있다.
<24통의 편지와 12편의 일기로 완성되는 모자이크 그림>
《현기증》의 스토리 구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순한 인과가 아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유진이 남기고 간 일기와 그녀가 받은 편지를 통해 지나간 삶을 재구성하는 독특한 플롯을 지니기 때문이다. 유진의 사랑은 조각난 퍼즐처럼, 여기저기 구멍 난 모자이크 그림처럼 미완성으로 남아 ‘나’에게 던져진다.
‘나’는 그녀의 자취를 좇아 구멍 난 모자이크 조각을 맞추어가며 마침내 하나의 완벽한 그림으로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구성은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화자가 점차 유진의 사랑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로 기능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제공한다. 그러기에 그토록 건조한 삶을 지향하던 ‘나’가 유진의 사랑에 현기증을 느끼며 삶과 사랑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꾸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권태와 생활에 쉽사리 무너지는 연약한 사랑일지라도, 영원을 약속할 수 없는 소모에 불과한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을 믿으며 그 안에 자신을 온전히 던져버릴 수 있는 유진. 그녀의 자취를 따라가는 즐거움 또한 이《현기증》이 주는 특유의 재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