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의 죽음도 없었을까? 예수의 죽음이 없었다면 인류의 속죄와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여섯 명의 필자들은 이러한 물음에 ‘복음서 다시읽기’부터 해석을 시작한다. 이 책은 유다의 탐욕과 사악함, 죄인을 지목하기 위한 입맞춤 등 그 어떤 것도 배신의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오히려 유다가 ‘신의 죽음’과 예수의 세상에 대한 속죄,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카트린 슐라르
올리비에 아벨Olivier Abel
파리 신교대학의 윤리철학 교수로, 잡지 <오트르 탕Autres Temps>과 <에스프리Esprit>에 기고하고 있으며, 오트르망Autrement 출판사의 <속죄Le Pardon>와 <천사들의 깨어남Le Reveil des Anges>)을 담당하고 있다.
마크 로진 안스바흐Mark Rogin Anspach
응용인식론 연구소의 인류학자로, <모스지誌La Revue du MAUSS>에 기고하고 있으며, 공동작품 <징벌Vengeance>을 담당하고 있다.
장 콜레Jean Collet
파리 5대학 교수로, 잡지 <에튀드Etudes>에 기고하는 영화평론가이다. 저서로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문제의 영화Le Cinema en question>), <프랑수와 트뤼포의 영화Le Cinema de Francois Truffaut> <펠리니의 창조La Creation selon Fellini>, <영화가 끝나고Apres le film> 등이 있다.
장 랑베르Jean Lambert
철학자이자 종교 현상에 관한 범분야적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트라베르스의 서書Le Livre de Traverse> 등에 기고했으며, 저서로 <분배된 신Le Dieu distribue>을 비롯해 일신교의 비교 인류학에 관한 30여 편의 글이 있다.
마리 즈느비에브 랑베르 샤르티에Marie–Genevieve Lambert–Chartier 고전문학 교수이며 근대와 현대 문학의 전문가로, 특히 바르베 도르비이Barbey d’Aurevilly, 플로베르Flaubert, 페기Peguy, 클로델Claudel 등에 관한 글을 썼다.
카트린 슐라르Cathrine Soullard
라디오 방송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의 제작자로, 잡지 <에튀드Etudes>에 기고하는 영화평론가이다.
수수께끼 같은 유다 – 카트린 슐라르
해석하기 어려운 유다 – 카트린 슐라르
필연적인 배신 – 올리비에 아벨
유다에 대한 해석과 새로운 시각 – 마리 즈느비에브 랑베르 샤르티에
유다, 영화 속의 이미지들 – 장 콜레
배신하는 친구 – 장 랑베르
누가 주 예수를 죽였는가? – 마크 로진 안스바흐
유다의 주변에서
역자의 말
참고 문헌
“이것은 단순히 유다 개인에 대한 복권이 아니다” 인간의 무지와 오해 편견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증오가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결과. 우리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수없이 지켜보았다. 유다에 대한 신화-‘배신의 신화’가 다시 쓰이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 유다는 누구인가?
성서에 기록된 유다의 이름 앞에는 “장차 예수를 배신할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또한 마태오와 마르코, 요한의 복음서에는 그가 도둑이며 탐욕스럽고 추악한 화신이라는 일관된 평가가 내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실존하고 개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 허구적 인물로까지 간주되곤 한다. 그렇다면 유다는 허구적 인물일까? 만일 유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속죄와 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대답을 시도하고 있다.
– 쌍둥이 예수, 유다
이 책의 필자들은 오히려 유다가 ‘신의 죽음’과 예수의 세상에 대한 속죄,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배신하는 친구>에서는 질 들뢰즈의 <대담>을 빌어서 배신자와 사기꾼 사이에 존재하는 구분과 경쟁적인 유사함으로 예수와 유다를 설명한다. 여기에는 유다의 배신이 저지른 악이 예수가 저지를 악을 대신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예수의 부활이 또 다른 배신임을 보여주는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을 통해 유다와 예수 가운데서, 끊임없이 배신을 시도하는 혼재된 인간성의 존재를 보게 된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의 죽음이 이루어지기 위한 근거인가 그러나 어떤 해석도 그저 추측일 뿐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모든 추측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다”와 “성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라는 성서 구절에서 그 근거를 잃는다.
<필연적인 배신>에서 유다의 배신은 비극적 시나리오의 전개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를 위해 이중으로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유다는, 가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력 혁명을 주도했던 젤로트 당원으로 해석되기도 하듯이, 전사(자객)의 역할을 다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다는 속죄와 세상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 신의 축복을 받은 죄악의 본보기로 정의된다.
– ‘완벽한 주인공’ 유다: 문학과 영화 속의 유다
‘허구’ 속의 유다는 ‘완벽한 주인공’이며 예술가는 저마다의 믿음과 환상에 따라 그를 그렸다. <유다에 대한 해석과 새로운 시각>과 <유다, 영화 속의 이미지들>에서는 작가와 감독 들이 유다에 대해 어떤 시각을 취해왔는지 시대별 작가별로 열거하고 있다.
문학 유다가 처음 문학에 등장했을 때 그는 유대인 배척주의의 대상으로 악마에 다르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빅토르 위고에게 헌정한 시집 <악의 꽃> 중 한 편인 <일곱 노인>에서 유다를 “불구인 네 발 짐승 혹은 세 발 달린 유태인”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중세의 반유대주의적 암시는 폴 클로델의 <유다의 죽음>에서부터 사뭇 달라진다. 통속적인 반유대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성을 중시함으로써 논리적 맥락에 따라 주인에 대한 사랑보다 이익을 택한 인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세계대전 이후 유다는 정당한 권리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고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모든 사람의 상징이 된다(레오 페루츠의 <레오나르도의 유다>). 오늘날 유다는 하디의 <미천한 사람 주드>, 보르헤스의 <픽션들>, 마르셀 파뇰의 <유다>에 의해서 예언자이자 고통받는 의인 예수의 반영과 분신으로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영화 <유다, 영화 속의 이미지들>에서는 파솔리니, 스코시즈, 드라이어, 포드의 시선에 비친 유다에 대해 파악한다. 파솔리니의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유다는 연정의 시선을 가진 유다이다. 예수에 대한 사랑이 배반당한 유다에게는 배신당한 친구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드라이어의 시나리오 <나사렛 예수>에서 유다는 회의주의자이자 우유부단한 사람이며,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동요하고 배신하는 친구와 배신당할 친구를 묶어주는 무서운 공모에 대해 밝힌다. 반면 스코시즈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서 유다는 은총과 배신을 역설적으로 상징한다.
신화 속 배신의 서사 구조: 유다가 만나는 두 가지 문화적 영역
유다는 배신의 상징으로 ‘우정에 대한 계약’과 ‘배신의 신화’를 상기시킨다.
<배신하는 친구>에서는 인도?유럽어족과 셈족 문화에서 전해지는 배신의 신화(인도의 인드라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혹은 로마의 호라티우스 등)가 공통적으로 가진 서술 구조 중 ‘전사의 무훈시’를 바탕으로, 신화의 서술 구조에 유다와 예수를 대입함으로써 자신의 계급과 가족과 민족과 종교를 저버린 예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에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로키와 발드르를 통해 유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 가지는 관련성을 파악해낸다. 유다가 이 모든 죄를 떠맡는 것 그것은 ‘한 사람의 희생이 남은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 속의 유다
성서에 기록된 유다는 다음의 세 가지 에피소드의 중심에 있다. 해석학자와 사상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유다에 대한 해석, 평가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1 베다니아의 나병 걸린 시몬의 집 성서에 쓰인 유다에 대한 최초의 비난은 베다니아의 나병 걸린 시몬의 집에서 과월절 6일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곳에는 나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 그리고 사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다. 그때 재정담당이던 유다가 300데나리온이 헤프게 쓰인 것에 대해 분노한다. 예수는 그런 그에게 이것은 자기의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한다.
유다는 탐욕 때문에 예수를 배신하는가? 요한은 유독 유다만이 이 일에 대해 화를 냈으며, 이런 유다의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그의 배신의 동기가 탐욕이라고 한다. 여기서 이야기를 되짚어보자. 마태오와 마르코, 요한이 이야기하듯 재정담당인 데다 가끔은 공금을 횡령할 정도였던 유다가 과연 30세겔(120데나리온) 정도의 푼돈이 탐이 나 예수를 팔았을까?
#2 과월절 하루 전, 2층의 큰 방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한다. 예수는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알린다. 제자들은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예수는 그가 지금 자기와 함께 먹고 있으며, 지금 자기와 함께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빵 한 조각을 유다에게 건넨다. “유다가 그것을 받아먹자 사탄이 그의 몸에 들어갔다.”
유다의 배신에는 사탄이 개입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는 유다에게 베드로에게 하듯 “사탄아 썩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마태오가 쓰고 있듯이, 예수는 배신하는 유다에게 심지어 ‘친구여’ 하고 부른다.
#3 과월절 하루 전, 게쎄마니 유다의 배신을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 감람산 서쪽 게쎄마니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있다. 그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유다가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를 끌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다가온다. 유다는 예수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그러자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가 예수를 붙잡아 결박한다.
유다의 입맞춤은 배신의 상징인가? 요한이 쓰고 있듯이 유다의 입맞춤은 예수임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신호일까? 예수는 “내가 전에 날마다 성전에서 같이 있으면서 가르칠 때에는 나를 잡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미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언제든 어디서든 붙잡힐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