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강 장편 소설. 천불동의 천불천탑. 그 신비한 대역사는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펼처놓았을까? 또한 그 속에 어떤 기기묘묘한 사연이 숨어 있는 걸까? 오늘도 천불동의 천불천탑은 이 시대의 중생들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져놓은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영원한 화두 하나를 보듬고 오늘의 출구를 찾아 헤매는 우리들에게 장차 이 화두는 활짝 열릴 것인가, 그냥 닫혀 있을 것인가?
박혜강
990년대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 소설가다. 1954년 전남 광양 출생으로 조선대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무크지 《문학예술운동》 제2집에 중편소설 「검은 화산」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왕성한 창작력으로 장편소설 『젊은 혁명가의 초상』을 비롯하여 『검은 노을』, 『다시 불러보는 그대 이름』, 『안개산 바람들(상하)』, 『운주(전5권)』, 『도선비기(상하)』, 『조선의 선비들(상하)』, 『매천 황현(상하)』 등과 산문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 이야기』, 장편동화 『나도 고고학자』, 『자전거여행』 등 많은 작품을 출간하였다.
1991년에는 장편소설 『검은 노을』로 제1회 실천문학상을 수상, 우리나라 최초로 핵 문제를 본격적으로 소설화시킨 민중문학 작가라는 평을 얻었으며, 장편동화 『자전거여행』으로 제1회 대산문예창작기금을 수혜하기도 했다.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과 광주전남 소설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 풍운(風雲)
2.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3. 유성(流星)
역사, 종교, 병법, 전통무예, 복식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역작!
작가의 의도: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조성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불가사의 그 자체이다. 천불천탑에 관한 사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학자들의 손으로는 그 불가사의가 해결될 수 없고, 문학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만 복원될 수 있다는 기획 의도 아래 이 글이 쓰여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적인 역사를 바탕에 깔고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가 필요했다. 시대적 배경이 고려조이기 때문에 역사, 불교, 풍수지리, 병법, 전통무예, 전통의술, 복습, 풍습, 지리 등등 한 수레쯤의 자료를 모았다. 필요한 지역은 계속 답사를 했다.
북한 지역(개경이나 평양 등)을 답사할 수 없다는 것이 실로 아쉽고 안타까웠다. 이젠 탈고가 되고 말았지만, 차후에라도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글의 무대가 되는 지역을 필히 답사하여 미진한 부분을 수정하고 싶다. 그래서 나의 글은 아직 미완성인지도 모른다. 미완이란 부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정지상태가 아닌 계속적인 운동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출구’라는 화두는 영원한 것인가
작가의 화두: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민초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출구(出口)’라는 화두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가? 개경과 서경의 정치적 알력이나 지역감정은 시공이 다르고 모양새만 약간 다를 뿐 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묘청의 난에 의한 서경성 전투는 오월 광주의 10일 간 항쟁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묘청의 난에서는 민족의 자주를 보았고, 망이,망소이 난에서는 민중의 해방을 보았다. 오늘날도 이런 운동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천년 전의 역사 속으로 자맥질했지만 사실은 현실이라는 발판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료도 부족하고 상상력의 제한도 받을 수밖에 없는 악조건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좋은 의미든지 나쁜 의미든지).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바로 볼 줄 알면 새로운 역사는 제자리를 맴돌지 않고 또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작품 배경
개경에서 남도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스케일, 고려시대에서 가장 역동적인 순간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과 폐단이 표출되는 속에서 귀족 사회 내부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 이념의 대립, 외교 정책의 대립, 고구려 계승 의식에 대한 대립 속에서 개경파와 서경파와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자겸의 난 이후, ‘개경의 지덕은 쇠하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다’라는 풍수지리설을 배경으로 서경에 대화궁을 건설하며 서경 천도에 나서는데, 이는 중흥 공신으로 권세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천도가 세력의 근거지를 잃는 것이었기에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서경 천도에 반대하게 되고, 천도의 좌절 속에 묘청은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로 삼아 봉기하나 김부식에 의해 1년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이로써 서경파는 몰락하고 분사 제도 폐지로 서경의 지위는 격하되고, 금에 대한 굴복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고려의 북진 정책은 좌절되고 만다.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 서경 천도 운동 -신채호《조선사연구초》 중에서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약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망이.망소이의 난: 무신의 난은 문벌 중심의 고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흔들면서 귀족 사회를 무너뜨렸다. 특히 정치 체제와 신분 질서가 바뀌어 정치 질서는 무신들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정권을 잡은 무신들의 부패와 횡포가 심해져 농민과 천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또한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로는 천민 출신의 무신이 크게 세력을 쥐는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민중을 자극하여, 사회적인 부당한 대우와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저항 운동으로 번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무신 정권의 수립 직후부터 최충헌의 집권까지 약 30년 간 계속된 이 운동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남부 지역이 심하였다.
특히 천민의 저항 운동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명종(1176년) 충청도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이었다. 명학소는 천민 수공업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그곳의 천민들이 망이.망소이를 앞세워 신분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주를 점령하고 개경을 향하여 북진, 청주와 아산 일대를 점령한 후 1년 반 동안 충청남북도 일대와 경기도 남부까지 휩쓸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천민이나 농민들의 주장을 정치에 반영시키기 위한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소?부곡 등 천민들의 집단 거주 지역도 차차 양민들의 군현으로 승격되기 시작하였다.
천불천탑이 세워진 운주사: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전체가 배(舟)의 형상으로 운주사는 배를 젓는 노의 위치에 해당된다. 송광사의 말사이기도 한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며,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 좌우의 산등성이에 석불과 석탑이 1천 개가 더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운주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4년 유적발굴 조사가 실시되면서부터다. 이 절의 창건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신라 말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에 근거,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 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을 기했다는 것이다.
운주사의 많은 불탑, 불상 중 최고의 압권은 와불이다. 이 와불은 천불천탑의 마지막 천불인데 이 불상으로 일으켜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와불을 막 일으켜세우려는 순간 첫닭이 우는 바람에 일으켜세우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와불의 아랫 부분에는 이 탑을 일으켜세려고 노력한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 아마도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이 땅의 민초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운주사 석불석탑의 특징은 다른 여느 사찰의 그것과는 달리 불상들이 매우 투박하며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불상의 얼굴이 권위적이거나 근엄하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필부의 모습 그대로다. 아마도 소외받던 민초들의 염원이 이러한 형상의 불상을 빚어내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은 어쩌면 이 와불이 벌떡 일어나 새세상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염원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