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이후 줄곧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글쓰기를 선보였던 소설가 윤대녕씨의 두 번째 산문집으로, 2002년 10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월간 <까사리빙>에 연재했던 것을 모은 것이다. 첫번째 산문집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들(문학동네)>이 편지형식과 여행산문으로 꾸며졌던 반면, 이번 산문집은 ‘그 옆 사람’에 해당하는 ‘화자’가 한곳에 붙박혀 있고 ‘열두 명의 연인’들이 ‘그 옆 사람’의 곁에 머물렀다가 멀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이란 무릇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윤대녕은 열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줄곧 은근하게 사랑을 예찬한다. 참을 수 없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는 사랑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작가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으로 보인다. 등단을 준비하는 소설가 지망생, 맥주를 좋아하고 올드 팝을 즐겨 듣는 ‘나’, 언젠가 일본에 들러서 초밥을 먹었던 ‘나’ 등에서 작가 윤대녕의 면면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은 저자의 다른 소설집과 변별되는 이 책의 미덕일 것이다.
윤대녕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뇌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그의 최초의 기억은 조모의 등에 업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다. 주사 바늘이 몸에 박히는 순간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조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도 안 하고 1학년 2학기에 학교 소사에게 끌려가 교실이라는 낯선 공간에 내던져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다. 한자 공부가 끝나면 조부는 밤길에 막걸리 심부름이나 빈 대두병을 들려 석유를 받아 오게 했다. 오는 길이 무서워 주전가 꼭지에 입을 대고 찔끔찔끔 막걸리를 빨아먹거나 당근밭에 웅크리고 앉아 석유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 서글프면서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독서 취미가 다소 병적으로 변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연히 ‘동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치기와 겉멋이 무엇인지 알게 돼 선배들을 따라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백일장이나 현상 문예에 투고하기도 했고 또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써대며 찬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신춘 문예 병이 들어 방안에 처박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방에 처박혀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 프레이저, 융 같은 이들의 저작을 교과서 대신 읽었고 어찌다 학교에 가도 뭘 얻어들을 게 없나 싶어 국문과나 기웃거렸다. 1학년 때부터 매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지만 계속 낙선이어서 3학년을 마치고 화천에 있는 7사단으로 입대한다. 군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 온 시집들을 성경처럼 읽으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군복을 입고 100권쯤 읽은 시집들이 훗날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1주일 만에 공주의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려고 몸부림쳤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도 산에서 내려가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뻔한 현실론에 떠밀려 다시 복학했고 한 순간 번뜩,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푸른 비단에 싸인 밤
스물세 개의 계단으로 오는 가을
나의 하이네켄 스토리
신 삼국유사 가락국기
우린 때로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지
윤희하원
갑오징어의 사랑
잃어버린 우산을 추억함
쥐와 장미
이태리 다방
내 마음의 헛간
매기의 추억
작가 후기
사람이란 무릇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추억의 반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저 가슴 떨리는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앞으로 남은 반은 그 열량에 있어 이미 완성된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무수한 자전을 통해 스스로 삶을 완성해가야 할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만나왔던 이들-이를테면 삶의 동창생들-도 사정이 비슷하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아주 특별한 기회’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또한 그 옆 사람에게도.
윤대녕(소설가,동덕여대문예창작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