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증거로 읽는 조선 불교 탄압의 역사
고려 말기 불교의 폐해와 모순을 타파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정치 이념으로 출발한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불교 수난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하게 배불(俳佛)이나 억불(抑佛)의 시대라고 일컬어왔을 뿐 역사적 사료를 갖추어 구체적으로 증언해보인 적은 없었다. 심지어 한국불교에서조차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는 저 훼손된 불상을 볼 때다마 생기는 의혹을 이렇듯 단순하게 정의해버려도 괜찮을까?’
저자는 의혹을 풀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반년이 넘게 읽고 또 읽’으면서, ‘산중 스님들의 도움으로’ 귀중한 문헌과 증언을 모아나갔다. 그리고 누구도 외면하지 못할 증거로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불교 관계 기사를 ‘가려 뽑아’ 책에 담아냈다. 과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 이념에 의한 이념의 차별, 신분에 의한 신분의 차별은 어느 정도였는가?
이 책에 실린 증거들로 확인하게 되는 구체적 정황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이것이 ‘불교 입장’에서 단순히 ‘슬픈 수난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이기주의로 파편화되고 지방색이나 패거리 문화로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뿌리가 서양화되어가는 사고방식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출간된‘한국의 뿌리’ 시리즈(<어머니의 전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한국 차살림>)가 가졌던 서정성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국 문화와 한국인의 삶을 깊이 있게 아우르며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시리즈의 기획 의도를 볼 때, 이 책은 빼놓을 수도 지나칠 수도 없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드러나는 엄청난 증거들
이 책은 국가의 정책과 관리, 각종 사건과 통계 등 다양한 사료가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중 불교 탄압의 증거를 뽑아 사찰과 승려로 나누어 실었다. 사찰과 승려가 따로일 수 없지만 이렇게 하여 증거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도록 돕는다.
모두 불태우고, 허물어라 – 6개의 사찰이 증언하는 탄압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고 있을 사찰 여섯 개를 들어 사찰이 받았던 탄압의 실태를 밝힌다. 먼저 사찰의 유래와 규모를 밝혔는데, 이것으로 인해 다음에 이어지는 탄압의 강도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사찰이 받았던 탄압의 이유는 불교 행사에 관직의 고하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다는 것, 사찰에 여자가 출입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였는데 승려와 여자의 추접한 소문이 있다는 것, 사찰의 증축으로 왕실의 재산을 좀먹는다는 것, 쓸데없는 대장경을 만드는 데 경비를 지출한다는 것, 풍수지리설의 유행으로 유생들이 사찰의 터를 탐낸 것, 천주교 전파로 인한 유생들의 위기의식이 발현된 것, 경전 편집 순서의 잘못(<삼가귀감>을 찬술하면서 유가를 마지막에 두었다)을 추궁하기 위한 것 등이다.
①원각사
-절을 기생방으로 만들고, 비구니를 기생으로 삼아라
유교가 불교를 탄압했던 근본 이유는 효와 충이었다. 그러나 유생들과 왕들은 그들의 왕이자 조상인 태조가 세우고 보호했던 원각사조차 가만두지 않았다.
연산군은 원각사에 불상 대신 공자의 신위를 두게 하고, 심지어 장악원을 옮겨 기생 1천 2백 명과 악사 1천 명, 감독하는 사람 40명을 두어 자신의 기생방인 ‘연방원’으로 만들었다. 또한 정업원의 여승들과 전국 여러 사찰에서 수행 중인 여승들 중에서도 많은 수를 선발하여 기생 노릇을 하도록 했다.
-절의 기와와 돌을 가져다 백성들이 사용하게 하라
“불교는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색과 같아.” 유생들이 경계했던 것은 갖은 부역으로 사찰과 승려를 괴롭히지만 출가하는 백성의 수가 불어난다는 것이었다. 유생들은 백성들이 사찰과 승려에 대해 보이는 경외심을 없애고자, 부역에 시달리다 도망간 승려에 의해 버려진 사찰의 불기들을 훼손하도록 부추겼다.
②회암사
-공신의 아내/딸/며느리라도 무조건 태형으로 다스려라
“고 참의 송흥의 아내 정씨, 참의 김상직의 아내 이씨, 고 호군 송면의 아내 신씨와 부녀와 여자 중 합하여 20여 명에게는 각각 장(杖) 80에 처하여, 모두 절개를 지키지 못했음을 책하고, 강주 혜회는 장 70, 무애희를 지은 원각/신주/신현 등은 각각 태형(笞刑) 50, 이대종/박동미는 각각 형장 80, 천인(賤人)의 여자는 각각 태형 50에 처하되……”.
사찰에 대해 여성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나, 유생들은 공부 장소나 유희 장소로 곧잘 이용하면서 승려들에게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짚신은 닳아 돌부리에 걸린 발은 피가 터지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턴 담뱃대 탓에 머리가 터지다
사찰에 부과된 주된 부역보다 유생 모시기에 더 시달려야 하는 사찰도 있었다. 전남 백양사(505P)와 경북 봉화군 청량산 청량사에서 있었다는 주세붕 일행의 일화(〈청양지〉).
-절에 조상의 묘를 세우라
1800년을 전후로 경향 각지의 유서 깊은 사찰들 중 지역 토호나 세도가들의 조상 묘지로 쓰기 위해 사찰을 파괴하는 일은 빈번했다.
광주의 유학 이응준이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그곳에 죽은 아버지를 묻었는데, 사찰을 유생들의 조상 묘로 이용했던 것은 ‘선종과 교종이 소속된 사찰에서 5리 안’에는 무덤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유생들의 끈질긴 논란(1554년 9월 3일 기사와 1556년 9월 4일의 기사)이있었던 후 200여 년간 허다한 일이다.
③범어사와 불갑사
-부역을 감당할 수 없다면 절이라도 바쳐라
조선 후기가 되면서 사찰에 부과되는 부역의 양상은 훨씬 야비해진다. 탁발이 금지된 상황에서 사찰의 땅이 유생과 근방의 백성에게 강탈당해 굶주리게 된 승려들이 사찰을 버리거나 환속하도록 종용하였다.
범어사 초입에 세워져 있는 ‘조엄 감사 송덕비’의 내력과 영광 모악산의 불갑사에 전해지는 설두스님의 일화와 전승동요. 현감이 일부러 백지 고지서를 보내고 얼마 후 주지에게 고지서의 내력을 보고하게 하여 터무니없는 부역을 지게 하거나, 부역을 지지 못할 때에는 곤장을 때려 사찰을 떠나도록 종용한다. 유생들이 이렇게 사찰의 땅을 탐했던 것은 풍수지리설의 유행과 관련 있다.
④봉림사
-임금이 없기는 서학과 한통속이라
유학자 이경명과 채재공은 서학(천주교)에 대해 군신 부자 사이의 윤리나 남녀 부부 사이의 분별이 없어 그것이 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상소한다.
신라 말기 봉림산파로 독립하여 선종의 요람 역할을 하였던 봉림사는 1800년 전후 다시 세워지면서 유생들의 불교 탄압에 휩쓸린다. 이것은 막 천주교가 유생들의 위기의식을 조장하던 때와 맞물려 있다. 지금도 봉림사와 그 주위의 땅은 이언적의 후손이자 밀양의 세도가였던 이씨 문중에 귀속되어 있다.
⑤단속사
-앞뒤도 모르는 무식한 중놈들
“일찍이 단속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휴정이 <삼가귀감(三家龜監)>을 찬술하면서 유가를 마지막에 두어 간행하고 또 불상을 조성하여 사천왕이라고 일컬었으니, 형상이 매우 괴이하였다. 공은 그 책의 차례가 맞지 않은 데 분개하여 승려들에게 명하여 그 책판을 불사르고, 불상을 헐도록 하였다[안정복의 <順庵先生文集> 卷21]”
남명선생의 제자였으며 덕천서원의 중건과 수우당 최영경의 배향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진주 유생 성여신이 불교가 유교를 능멸하였다 하여 불경을 간행하는 데 사용되는 목판을 불태워 없애도록 하였다. 그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사천왕상을 파괴하라고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놀고먹는(?) 중들을 부려라 – 승려 개인에게 가해진 탄압
승려 개인에게 부과된 부역들 중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자주 언급된 것을 위주로 하여 탄압을 증언한다.
하나의 사찰에 부과된 부역의 종류는 백여 가지를 넘었는데, 이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승려들에게는 백성의 부역을 대신할 나름의 부역이 따로 부과되었다. 무엇보다 산성이나 왕릉, 궁궐을 짓는 공사에 동원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승려들은 공사에 동원된 일반 백성이 받을 수 있었던 삯조차 받을 수 없었으며, 빌어먹거나 대개는 굶어야 했고 급기야 고통을 참지 못해 도망하였다. 결국 정부는 포나 돈으로 부역을 대신하게 하는 번전을 만들지만, 사찰 소유의 토지나 기물조차 유생들이나 근동의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린 승려들은 그것조차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고향의 부모나 친지에게 죄를 물리는 연좌까지 등장한다.
①부역
-일할 중이 남지 않았다니, 절과 중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라
승려는 백성을 대신하여 부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런 부역 중에서 1670년 현종 대부터 1790년대 종조 대의 기록까지 120여 년을 걸쳐 언급되는 종이 부역이 손꼽을 만하다.
종이 만드는 일은 시간이나 손이 많이 드는 일로, 전남 순창군의 사찰에는 종이 7천 속(束)이 부과되었는데 1 속(束)이 10장이므로 7만장이라는 종이를 받쳐야 했던 일도 있었다. 게다가 종이 부역으로 인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군현에 단 한명의 승려도 남지 않은 사찰이 속출하여, 비변사에서는 “승려를 머물러 살게 할 대책과 사찰을 소생시킬 방도”를 찾는 어이없는 보고를 올릴 정도였다.
종이의 주원료인 닥나무를 기르던 사찰들을 경판을 만든다는 이유로 불태워버려 일반 백성에게 닥나무를 심도록 권장하여 부역을 면하게 하는 일조차 벌어졌다.
②승군
-중 입에 들어가는 곡식조차 아까워
고구려 때부터 있어왔던 승군은호국불교의 한 모습으로 규정되어왔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승군은 도첩제하에서 승려들을 환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를 지닌 탄압의 한 도구였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효와 불충을 저지르는 승려들에 의해 나라 지키기가 행해졌던 것이다.
승군으로 동원된 승려들에게는 무엇보다 식량 문제가 가장 컸다. 통정대부(通政大夫)니 가선대부(嘉善大夫)니 하는 명예직에 불과한 벼슬을 주면서 벼슬자리 값으로 곡물을 내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직책과 곡식을 맞바꾸어 승군의 양식을 승려가 스스로 마련하게 한 것일 뿐,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승군의 식량 문제는 이후부터 커다란 병폐로 악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연좌를 입혀라
그래서 굶고 헐벗은 승려가 도망하는 일이 늘어나자 정부는 승군제도를 번전으로 재정립한다. 그러나 “사찰의 토지와 불기(佛器)까지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자, “세속에 사는 부모에게 물리는가 하면 고향 마을에까지 그 폐혜가 끼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논요승보우소>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율곡은 1565년 <논요승보우소>를 올렸는데, 단 한 명의 승려를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읽어보면 왜 죽이라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고 그저 “설사 보우가 털끝만 한 죄도 없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처단해야 한다는 요지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유생들은 보우를 처단하라는 계와 상소를 단 6개월 동안 각각 75건과 423건을 냈다.
③공사(公私) 동원
-밑천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떼워라
농사를 지어야 할 백성이 도적이 되거나 산으로 숨어들어 승려가 되어버리자 그들을 유인해내고 승려의 수를 줄이기 위해 호패나 도첩을 구실로 승려를 공사에 동원한다.
대표적인 공사로 중종 대에 있었던 견항나루 공사. 당시 동지사 권예는 임금에게 공사에 필요한 도구조차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한 양식을 마련하지 못한 형편이라 날짜를 따지며 공사를 빨리 끝내려 하고 있으므로 공사를 독촉하지 않아도 제각기 힘을 다해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면 공양하는 것처럼 보일까하여 그만두었다는 승정원의 보고도 있다.
그리고 107편의 상소
“조선왕조는 왜 그토록 불교와 승려, 사찰과 제도들을 멸망시키려고 했을까? 조선왕조의 극단적인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도 왜 승려들은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려 했을까? 조선시대 성리학(유학)이 오늘날 한국인에게 남긴 가치와 교훈은 또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지독한 탄압 속을 걸어온 한국 불교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저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해 107편의 상소를 덧붙였다.
정동주
1948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났다. 장편시 『순례자』, 서사시 『논개』를 비롯해 대하소설 『백정』 『단야』 『민적』, 장편소설 『콰이강의 다리』 등 40여 권의 시집과 소설집을 발표했다. 마당굿 「진양살풀이」와 오페라 「조선의 사랑 논개」의 대본을 집필했다. 1990년 초부터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여 『카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부처, 통곡하다』 『어머니의 전설 』 『늘 푸른 소나무』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 『장계향 조선의 큰어머니』 등 역사·종교 분야를 읽고 썼다. 1990년 중반 이후 한국·중국·일본의 차문화를 비교하여 한국 차문화의 독자성을 세우기 위한 비교차문화론 연구와 강의를 시작했다. 2013년 ‘차살림학’을 정립하여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 차살림』 『한국인과 차 』 『우리시대 찻그릇은 무엇인가』 『차우림이에 담긴 한중일의 차 문화사』 『조선 막사발과 이도다완』 『차와 차살림』 등 차와 도자기 문화에 관한 비평적 연구의 성과물을 내놓고 있다
서문4
Ⅰ
오백 년 동안의 수난과 그 이름12
1, 종이 부역13
2, 승군과 번전 – 남한산성과 북한산성24
3, 승군의 능역46
4, 궁궐 짓기와 승군56
5, 견항나루 공사와 승군70
6, 땀 흘리는 불상의 목을 베라92
7, 휴정과 유정의 눈물108
8, 8백 의승의 행방143
9, 백지로 된 고지서154
10, 범어사 낭백선사와 조엄160
순교자 – 보우의 생애와 꿈176
Ⅱ
불타는 부처244
1, 회암사244
2, 흥천사287
3, 연기사와 불갑사306
4, 봉림사324
5, 단속사345
원각사지 10층석탑에 기대서서368
Ⅲ
부처여, 부처여 – 부처를 죽이라는 107편의 상소문396
Ⅳ
목 없는 부처에게 – 슬픔으로 빚은 역사의 사리502
참고문헌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