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과거에 불시착한 불운의 투수 18번 구경남과
짧은 영광을 뒤로하고 사라진 비운의 슈퍼스타즈의 조우!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에 최선을 다할 뿐 다음은 없다.”
― 김성근 감독 좌우명
김성근 감독의 좌우명인 ‘일구이무’는 “화살이 하나만 있을 뿐 두 번째 화살은 없다”는 뜻의 ‘일시이무一矢二無’에서 비롯되었다. 플레이트에 올라 공을 던지는 순간까지, 투수는 손에 들린 공에 사활을 건다. 다음을 기약하며 던지는 공은 투수가 모든 에너지를 쏟지 않았음을 곧장 알아차린다. 그렇게 투수는 떠나간 공을 원망할 수도, 원망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투수는 공을 던진 뒤 바로 다음 투구 종류를 정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요기 베라의 말처럼, 극적인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리는 스포츠를 떠나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승리를 거두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 번의 실패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갖기보다 다가올 미래 그리고 언제 마주할지 모르는 절호의 기회를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단단히 다듬어야 한다. 하지만 실패를 생각하지 말되 실패를 염두에 두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채강D 작가는 어느 날 1982년 과거에서 눈을 뜬 불운의 투수 ‘구경남’과 함께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야구’로 독자에게 철학적 사유를 남긴다.
‘떨어지는 낙엽이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듯’,
“야구선수는 떠나간 공을 원망하지 않는다.”
투수 ‘구경남’은 이제 3년 차인 ‘애송이’ 타자를 노려보며 왼발을 차올렸다. 그리고 일부러 타자의 머리쪽으로 바짝 붙인 공을 던졌다. 공은 타자 머리를 강타할 것처럼 빠르게 날아갔고, 깜짝 놀란 타자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구경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뭘 봐, 쌤통이다.’ 다음에는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오른손에 미리 발라놓은 침을 공에 문질렀다. 침이나 바셀린 같은 점성 있는 액체가 묻은 공은 움직임이 커져서 스핏볼이 되기 때문이다. 스핏볼은 현대 야구에선 금지된 부정투구가 되었으나, ‘구경남’은 또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는 프로의 세계,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게 중요하다.’ 스포츠맨십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구경남’은 걸핏하면 벤치클리어링을 일으키고 몸쪽이나 바깥쪽 공을 던져 타자를 당황시키기 일쑤였다.
‘구경남’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구경남’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일찍이 주목을 받는 유망주였으며, 데뷔하자마자 바로 10승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빠르게 선발투수가 되며 퀄리티스타트도 여러 번 기록했다. 그의 화려한 전성기가 막을 내린 건 팔꿈치 부상 때문이었다. 수술을 했으나 구속과 회선수가 급격히 줄었다. 한 번 떨어진 속구의 구위는 되찾을 수 없었고, 변화구의 비중도 높였으나 공의 위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무엇보다 동료 선수들과 팬들의 실망 어린 눈빛, 그 패배감을 견딜 수 없었다. ‘구경남’은 승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루머에 휩싸이고 사건 사고에 휘말려 결국 그라운드에서 쫓겨나고 팀에서도 방출되었다. ‘구경남’은 생각했다. 이로써 야구 인생이 끝났으며 다시는 그라운드에 설 수 없을 거라고.
“드디어 올랐다. 그라운드에서 가장 높은 곳.
그라운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바로 1982년 마운드에.”
‘구경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려 시애틀로 향한다. 하지만 테스트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났다. 갓 대학을 졸업한 듯한 ‘애송이’ 담당자는 ‘구경남’이 던지는 공 몇 개를 대충 보고 테스트를 끝내버렸다. 열 시간 남짓 날아간 이국땅에서 몇 분 만에 유일한 희망마저 좌절된 것이다. 시애틀의 어느 뒷골목에서 술에 진탕 취한 ‘구경남’은 설상가상으로 폭행까지 당한다. 그때, 누군가 ‘구경남’에게 다가와 말했다. ‘구경남’의 우승 반지를 자신에게 주면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거듭된 낙담에 지친 ‘구경남’은 더는 의미가 없어진 우승 반지를 정체 모를 남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음 날, ‘구경남’은 한국에서 눈을 떴다. 그것도 1982년, 한국프로야구의 서막을 연 슈퍼스타즈 구단 앞에서.
슈퍼스타즈의 운명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비운의 구단’, ‘만년 꼴찌’, ‘슈퍼스타 없는 슈퍼스타즈’ 같은 수식이 따라붙어 비웃음을 샀던 구단이다. 물론, ‘구경남’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1982년 한국에 불시착한 ‘구경남’은 슈퍼스타즈 코치의 제안에 공을 던졌다. 당시에는 개념조차 없었던 투구폼과 투구 종류를 선보이며 ‘구경남’을 무시했던 선수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구단주로부터 입단 제안을 받은 ‘구경남’은 자신이 과거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을 믿기도 전에 들이닥친 슈퍼스타즈의 입단을 고민했다. 그러나 당장 집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1982년에서 ‘구경남’이 믿을 데라곤 평생을 함께해온 야구장뿐이었다. 결국 ‘구경남’은 슈퍼스타즈의 투수가 되고, 그라운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1982년 마운드에 올랐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서.
“한국프로야구의 역사가 나로 인해 바뀌고 있다.
부진했던 슈퍼스타즈의 부활이 그 증거다.”
안타깝게도 ‘구경남’은 잊고 있었다. 위기 역시 갑작스레 찾아온다는 것을. 믿었던 감독이 승부조작을 명령했다. ‘구경남’은 이전에도 승부조작 제안을 받았었고 루머에 휘말려 오랫동안 누명을 써야 했다. 하지만 1982년에서도 반복되는 승부조작과 ‘구경남’이 아니더라도 이미 누군가 승부조작을 하고 있다는 말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정정당당한 스포츠정신을 침범하는 은밀한 거래는 계속될 것이었다. ‘구경남’은 생각했다.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구경남’은 승부조작을 둘러싼 사건에 맞서며 또다시 동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경기를 하는 와중에도 눈앞의 포수를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노히트 노런을 코앞에 둔 9월 18일, ‘구경남’은 시애틀에서 우승 반지를 가져간 남자를 목격한다. ‘구경남’은 마지막 이닝에서 발을 차올리며 공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줬다. 그리고 ‘그날 가장 빠른 공’을 던진 ‘구경남’은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죽은 듯 쓰러졌다. 과연, 구경남의 마지막 공은 슈퍼스타즈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슈퍼맨”이라 하면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구경남’은 야구방망이를 든 다른 히어로를 떠올렸다. ‘구경남’에겐 인생에 다시없을 찬란한 추억을 선물해준 영웅이므로. 『18번 구경남』에는 전설의 투수 ‘박철순’을 포함한 여러 야구 영웅들이 등장한다. 실제 1982년에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인해 몇몇 선수들이 프로리그를 뛰지 않았으나, 소설에서는 그들이 한 팀으로 그리고 라이벌로 등장해 극적인 경기를 펼친다. 우리는 이미 1982년의 역사와 슈퍼스타즈의 결말을 알고 있지만, 채강D 작가의 소설에서 뒤집힌 역사를 목격할 수 있다. 한 그라운드에 모인 야구 레전드들이 펼치는 박진감 넘치는 현장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 지은이
채강D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야구팬이 되어 있었다. 영화과에서 논문 대신 시나리오를 써서 졸업했고, 현재는 야구로 밥벌이를 하는 현직 야구인이다. 야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2021년 코믹 야구 옴니버스 소설 『무진시 야구장 사람들』을 펴냈고, 2023년 SF 앤솔러지 『매니페스토』에 참여했다.
■■■ 차례
0-1. 프롤로그
0-2. 어쩌다, 이런 마운드
0-3. 1982년 프로야구
1-3. 강한 자들 전성시대
2-3. 9월 18일
에필로그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잠깐, 그런데 저 사람…… 낯이 익다. 혹시, 전설의 투수 장일봉? 익숙한 얼굴이 또 보였다.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미소년. 저 얼굴은…… 박철순? 비로소 기억이 났다. 내 인생은 망했고, 나는 이곳 1982년의 마운드로 끌려왔다. (9쪽)
글러브로 입을 가리고 오른손으로 공을 문질렀다. 오른손에는 몰래 침을 발라놓았다. 공에 침을 묻히면 움직임이 커져 스핏볼이 된다. 물론 현대 야구에서는 금지됐다. 하지만 여기는 프로의 세계.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게 중요하다. (16쪽)
“아니, 그래도 경남 씨가 잘 아실 것 같아서. 그 소문의 핵심으로 보이는 A 선수의 등판 기록을 보면 딱 그렇잖아요. 의심할 만하거든. 불펜에서 던지는 그 A 선수 이야기, 들으셨죠?” (27쪽)
리 코치는 “한국프로야구의 역사적인 시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슈퍼스타즈. 이곳은 정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막 시작되는 시대인 것 같았다. 그럼 정말 지금이 1982년이라는 말이겠지? (75쪽)
“자, 지금부터 에, 또, 저기 있는 곰과 눈싸움을 시작한다. 눈싸움에서 진 녀석들은 오늘 야간 훈련이다. 알겠나?” 리종근 코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선수들은 모두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눈싸움? 곰이랑? 저기 있는, 저 곰 말이지? (109쪽)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순간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물론 그동안 던졌던 마운드와는 조금 다르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배운 야구였다. 그리고 야구는 어디서나 똑같다. (132쪽)
발이 미끄러지면서 공을 놓쳤다. 아차. 뒤늦게 투구 자세를 잡아봤지만 이미 공은 손에서 떠난 뒤였고, 손을 떠나간 공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저 완전한 실투였다. (133쪽)
“〈부산 갈매기〉, 그거 어떻습니까?” 바로 다음 날부터 부산 야구장 응원석에선 〈부산 갈매기〉가 흘러나왔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저 노래가 이곳 부산 야구장을 가득 채울 날이 그려졌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꽤 짜릿했다. 미래를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이었다. (162쪽)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떨구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우 감독은 첫 타자 볼넷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226쪽)
그러고 보니 난 어젯밤 수지에게 모든 걸 말해버렸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이곳에선 그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현실에서 무언가 바뀐 게 있을까? 아니, 애초에 현실이란 어디지? 저곳? 혹은 이곳? (237쪽)
수지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대로 입을 맞췄다. 수지도 나를 끌어안았다. 수지에게서 옅은 담배 냄새와 초콜릿 냄새 그리고 향수 냄새가 났다. 거기엔 왠지 그리운 것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같이. (271쪽)
“자넨 야구선수야. 어떻게 하면 빨리 회복해서 공을 던질지 에만 집중해. 그 외의 것엔 신경도 쓰지 마. 눈 감고, 귀 막고 살라고. 그게 어렵나?”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대로 있었다. 도 회장은 인상을 쓰면서 중얼거렸다. “하여간, 다들 조금만 잘해주면 빨갱이가 된다니까.” (309쪽)
야구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식이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다 불쑥 왼손으로 글러브를 쳐들었다. 그 안에 하얀 야구공이 보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슈퍼 캐치였다. (338쪽)
8회를 마쳤다. 후반기 우승을 노리는 베어스 타자들을 상대로 단 하나의 안타도 맞지 않았다. 노히트 노런. 이대로 경기를 마치면 그런 기록이 따라온다. 아직 한국프로야구에서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기록. (343쪽)
등번호 18번을 단 투수가 던진 공은 정확히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그 공은 그날 가장 빠른 공이었지만, 김우철은 그 공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외야를 향해 퍼올렸다. 하지만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은 공을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마운드로 달려갔다. 마운드 위에 등번호 18번의 투수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죽은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동료들이 달려왔을 땐 이미 늦었다. (350쪽)
다음 날 그는 늦은 아침을 먹고 1982년의 프로야구를 검색했다. 그해 프로야구는 그가 원래 알던 것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슈퍼스타즈가 후반기 우승을 차지했고, 거기에는 괴물 투수 장일봉과 ‘써마린’이라고 불리던 신예 투수의 공이 컸다고 기록되었다. (353쪽)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장일봉에 대한 소식은 몇 년이 흐른 뒤 한 일본 지역신문에 단신이 실리면서 잠깐 화제에 올랐다. 기사에 따르면 장일봉 선수는 어떤 도박장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가 살던 단칸방 벽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