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소설가의 장편 소설.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소설은 상상으로 이루어진다는 박명호 소설가는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단편 소설 <봄눈>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1992년)하였다. 장편 소설 <가롯의 창세기>는 왜곡되고 오역된 <창세기>를 복원한다. 타성에 젖은 추악한 교회와 신비주의에 빠진 이단자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보다 더욱 타락한 신도들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는 이 장편 소설은 인간의 역사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성직자의 고단한 삶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교회, 이미 기득권을 가진 교회에 권력을 부여해버린 신도들의 대결에 신비주의의 허상을 좇는 이단자들이 가세하면서 추리 소설의 형태를 지닌다. 우리나라 교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뿌리 내린 후, 우리나라의 미풍약속을 파괴한 실상을 근원적으로 파헤치는 종교 소설이다.
박명호
– 저자 박명호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대구상고와 대구대학교 국어과를 졸업했다. 199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봄눈>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집으로 《또야 안뇨옹》, 《돈돈》, 《촌놈과 상놈》 등이 있다. 현재 부산 사직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엘루마 엘리쉬
종각 위의 사람
가롯의 창세기
심령의 전사들
칼을 가진 사람
막달라 마리아
‘사바’에는 관념이 없다
그래서 무엇을…
종려주일
쿼바디스 도미네
대역자
호롱불
마자막 편지
봄눈
▶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인가_아시리아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봉착한 교회의 위기
헤브라이어로 창세기는 ‘베레시스’다. <창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로 ‘태초’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창세기>는 모세의 저서로 알려져 왔으나, 문학적으로 내용을 분석한 결과 서로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가지 자료가 짜깁기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모세는 다만 편집자의 역할을 했을 뿐이며, <창세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집대성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사계의 학자 여러 명의 의견이 함께 녹아들어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모세와 학자들은 <창세기>를 편집하는 데 이용한 자료는 모두 세 가지로, 야훼의 자료, 엘로힘의 자료 등이 그것이다.
야훼 자료는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인간과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시에 인간의 잘못을 심판하는 등 유연한 관점에서 창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반면에 엘로힘 자료는 하나님의 모습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는다. 실제로 꿈에서조차도 나타나지 않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재자를 필요로 했다.
<창세기>는 이러한 자료들 속에 나타난 이야기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편집물이다. 두 자료가 생성된 시기도 기원전 6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근자에 와서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 발견과 해독을 계기로 아시리아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아시리아학의 분석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이는 구약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성서문학 비평의 발달은 모세 5경이 실제로 대여섯 명의 학자 내지는 학파가 참가하여 집대성한 ‘작품’임을 밝혀내게 되었다.
<창세기>는 역사를 바탕으로 기술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편집자가 의도한 방향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인류 구원사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며, 야곱의 가계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교회는 모순에 봉착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며 절대적인 진리라고 떠받치던 교회는 해석이 덜된 미완의 작품을 신봉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볼모로 권력을 누려온 교회는 눈을 감고 있다.
▶ 왜곡되고 오역된 성서_성서는 다시 씌어야 한다
‘말씀’을 찾아 떠나는 구도자들의 추리여행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기독교도들이 경전으로 사용해온 창세기는 진실을 담고 있는가? 과연 성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절대의 진리인가?
<창세기>는 세 번의 과정을 거쳐 그 본래의 뜻이 오염되고 만다. 첫째는 <창세기>를 기록한 고대 헤브라이어가 1600년 전에 소멸되면서 본래의 뜻을 해석할 길이 사라졌으며, 둘째 <창세기> 사본을 발견한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릇된 신관으로 함부로 왜곡을 했고, 셋째 그렇게 왜곡된 창세기가 여러 나라 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오역이 발생한 것이다.
박명호의 장편소설 《가롯의 창세기》는 이처럼 왜곡되고 오역된 <창세기>를 복원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하가료 목사는 교회가 왜곡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그릇된 신앙관을 낳고 있다고 보고 참된 신앙의 길을 신도들에게 알린다. 하지만 그는 이미 교회가 주입한 그릇된 신앙관에 사로잡힌 신도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쫓겨나기 일쑤다.
하 목사는 소설가이며 진보적인 신앙관을 가진 신학도인 ‘나’에게 새로운 창세기를 집필할 것을 사명으로 남긴다. 이 과정에서 성서를 볼모로 신도들을 정신적으로 억압하는, 타성에 젖은 교회의 추악한 모습과 신비주의에 빠진 사이비 교도들, 비기독교인보다 더욱 타락한 신도들의 모습이 투사된다.
소설은 시종일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 바깥에 감추어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두 성직자의 고단한 삶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교회, 이미 기득권을 가진 교회에 권력을 부여해버린 현대 기독교도들의 대결에 신비주의의 허상을 좇는 이단자들이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단단한 삼각구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가롯의 창세기》는 종교 소설이면서도 추리소설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서사에 목말라하는 독자들에게 긴장 가득한 서사의 청량감을 선사할 것이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 던지는 신랄한 비판
《가롯의 창세기》는 한국 교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뿌리 내린 이후 우리의 미풍양속을 파괴한 실상을 근원적으로 파헤친다. 이러한 비판이 제삼자의 일방적인 공격이 아니라 한때 교회에 몸담았던, 그리고 지금 몸을 담고 있는 신학도와 목회자의 자기비판적인 성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공감을 획득한다.
논픽션을 바탕으로 쓴 사실보다 더욱 사실적인 소설
저자가 《가롯의 창세기》를 집필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어느 날 그의 손에 주어진 한 뭉치의 원고 때문이었다.
저자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와 같은 처지에 처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가롯의 창세기》를 쓰게 된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창세기 집필’이라는 엄청난 사명이 주는 중압감을 이 소설을 씀으로 해서 일부분 해소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가롯의 창세기》에서 ‘새로운 창세기’의 모습은 극히 일부밖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 씌어진 창세기 역시 기존의 창세기에 비해 비약적이고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약간의 윤문과 윤색을 가한 정도에 그친다. 《가롯의 창세기》는 이와 같은 한계를 지닌다.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성서학, 아시리아학의 지식이 비중 있게 포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가롯의 창세기》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추리소설 기법의 구성 속에 녹여내며 한시도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서사는 없고 ‘문학’만 있으며, 미학적인 측면에 과도하게 기울어진 현대 한국 소설의 풍토 속에서 《가롯의 창세기》는 분명 주목할 만한 문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