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등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매료시켰으며, 동양의 무술을 서구에 알린 최초의 무술인이자 영화배우였던 이소룡의 감동적인 일대기를 청소년 평전으로 엮은 책. 불리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도 무술로 세계를 주름잡은 불멸의 스타 이소룡의 짧지만 강렬했던 생애를 다루고 있다.
권정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펴낸 책으로 소설집 『굿바이 명왕성』(2009), 『골목에 관한 어떤 오마주』(2017), 장편소설 『칼과 혀』(2017), 『검은 모자를 쓴 여인』(근간), 장편동화 『톨스토이 할아버지네 헌책방』(2012) 등이 있다. 2016년 현진건문학상, 2017년 혼불문학상을 받았다.
1. 용의 탄생
2. 날개를 펴는 용
3. 태평양을 건너다
4. 용을 사랑한 여자
5. 돌아온 용
6. 춤추는 용
7. 용의 승천
– 출연작 리뷰
– 절권도 소개
– 이소룡 연보
– 청소년 평전을 펴내며
<타임>지 선정 20세기 100대 우상이기도 한 이소룡은 중국 전통 무술을 세계에 소개해 홍콩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대 최강의 무술인이자, 70년대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은 큰 스타였던 이소룡.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그가 무술계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확고했으며 아시아인으로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최초의 사람. 이룸의 청소년 평전 세 번째 책 <드래곤의 전설 이소룡>은 70년대 기괴한 기합 소리와 빠른 몸놀림으로 세계 영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전설적인 무술인, 이소룡의 일대기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이소룡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얼마나 많은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있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막연하게 스타를 꿈꾸는 청소년들이 점점 늘어가는 지금 <드래곤의 전설 이소룡>은 우리 청소년들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후 30년, 다시 살아나는 용의 전설
현란한 무술 연기로 전 세계 팬을 사로잡았던 쿵후 영화의 전설적 스타 이소룡(李小龍, 미국 이름 브루스 리, 1940∼1973)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누군가와 주먹질을 할 때면 “오요~요욧” 하며 그에게 매료되었던 ‘이소룡 세대’들은 이제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그가 젊음을 불태웠던 홍콩에서는 지난 30주기를 기념해 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시작으로 언론마다 앞을 다퉈 특집기사로 다루는 등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인기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고향인 중국 광둥 성에는 전설적인 액션 스타 이소룡을 기리기 위한 이소룡 박물관이 건립되어 그의 편지와 영화 포스터, 사진 등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영화 속 주인공으로 이소룡을 부활시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등 여전히 그는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큰 꿈을 가진 사람만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본명 리전판(李振藩), 이소룡은 1940년, ‘용의 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연극인 월극 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중국 전통무술인 쿵후를 배우면서 정식으로 무도계에 입문, 50년대 홍콩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뒤 59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어려서부터 중국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태극권 등의 무술을 가까이했지만 이소룡은 결코 타고난 무술인은 아니었다. 신장 171㎝에 하체가 짧은 이소룡은 액션스타로 출세하기에는 체격 조건이 불리했다. 또한 지독한 근시에다 오른쪽 다리가 왼쪽에 비해 2.5센티미터나 짧아 무술을 하기에는 치명적인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조차 그의 집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워싱턴 주립대학 철학과 재학 시절에 쿵후, 복싱, 태권도를 결합한 새로운 무술인 ‘절권도’를 창안하여 무술인으로서의 이름을 떨쳤다.
미국 TV시리즈 <배트맨>과 <그린 호네트>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무술 연기자의 길을 시작한 그의 날렵한 발놀림과 손동작만을 사용한 현실감 넘치는 그의 몸동작은 단숨에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2미터 20센티미터의 농구 선수 카렘 압둘 자바를 단숨에 넘어뜨리는 이소룡에게 매료됐다. 무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조차 영화 장면을 흉내 내며 무술 도장으로 몰려들었다. 제2의 이소룡이 되기를 원하는 어린아이들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날 정도였다.
그는 큰 야망을 가진 자만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목표를 정하고 무섭도록 한 가지 목표에 집중했다. 서른셋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단 한순간도 자신의 꿈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결구 전 세계인의 마음속에서 신화가 될 수 있었다.
[이소룡 연보]
– 1940년 11월 27일 저녁 8시경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중국인 병원에서 아버지 이해천과 어머니 그레이스 리 사이에 출생. 본명은 이진번이며 미국명은 브루스 리. 3남 2녀 중 넷째로 출생. 후에 남동생이 태어남.
– 194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진 중국어 영화 <금문녀>에 아역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 데뷔.
– 1947년 가족들과 함께 홍콩으로 돌아옴. 아버지를 따라 태극권 수련.
– 1949년 <세로상>이라는 영화에 소매치기 역할로 출연. 이소룡이라는 예명을 이때 처음으로 사용.
– 1953년 중학교 입학. 스승 엽문에게서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 홍콩 최초의 컬러 영화인 <인해고홍>에 출연. 성방제 중학으로 전학. <부귀부운>, <고성혈루> 등 대여섯 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
– 1958년 차차차 댄스의 홍콩 선수권 획득. 복싱 홍콩 학생 챔피언 타이틀 획득. 단돈 100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감. 댄스 클럽 강사, 식당 종업원, 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