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선비 중의 선비, 정약용!
‘청소년 평전’ ‘제29권’ 『실학의 꽃, 정약용』. 백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선비 중의 선비, 정약용의 삶을 청소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루고 있다. 그림도 함께 담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정조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보수 세력에 의해 정치의 중심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혹독하고 위태로운 유배 생활을 버텨야만 했다. 그래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저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학문 세계를 완성해갔다.
이 책은 격변기 사회에서 보수 세력에 맞선 정약용의 삶을 담고 있는 평전이다. 수원성을 설계하고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그의 정신은 300년이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승미
■ 정약용 (丁若鏞 1762 ~ 1836)
조선 후기 대실학자인 정약용은 1762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문장이 뛰어나 1783년에 회시에 합격하여 경의진사가 되었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남인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부름으로 곧 풀려나와 다시 등용되었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크게 활약하였으나, 이듬해 주문모 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좌천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에 얽혀 장기에 유배되었고,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휘말려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하여, 정치기구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인 동시에 박지원으로 상징되는 북학파의 기술 도입론까지 수용한 것이다. 흔히 그를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라고 일컫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정약용, 그는 오늘날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학자이자 스승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 정약용 연보
1762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태어남.
1770년 어머니 윤씨와 사별.
1771년 시집 「삼미집」을 펴냄.
1776년 홍화보의 딸과 혼인.
1777년 이익의 책을 보고 실학을 공부함.
1783년 2월 증감감시에 합격하고 4월 회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감. 9 월에 장남 학연이 태어남.
1784년 맏형 약현의 처남 이벽에게 천주교에 대해 처음 듣고 천주교 서적을 보게 됨.
1786년 둘째 아들 학유 태어남.
1789년 1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름. 겨울에 배다리 건설의 규제를 작성해 올림.
1790년 예문관 검열이 됨. 대간이 법식을 어겼다고 탄핵하자 여러 차례 사직을 고수 하여 해미에 유배. 11일 만에 풀려남.
1791년 5월에 사간원 정언, 10월에 사헌부 지평에 오름.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천주교를 배교함.
1792년 홍문관 수찬이 됨. 4월 아버지 정재원이 세상을 떠남. 시묘살이를 하면서 왕 명으로 수원성 설계를 맡음.
1794년 7월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다가 10월에 홍문관 수찬에 오름. 경기 암행어사 가 됨.
1795년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주문모 사건에 연루되어 금정 찰방으로 좌천.
1797년 좌부승지에 올랐으나 천주교와 관계된 일을 고백하는 사직 상소를 올리고 물 러남. 6월 황해도 곡산 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풂.
1799년 병조참지와 형조참의에 오름. 대사간의 탄핵을 받자 「자명소」를 지어 바치 고 사직함.
1800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옴.
1801년 신유교옥이 일어남. 정약종ㆍ이승훈ㆍ이가환 등이 사형 당하고 정약용과 정 약전은 장기와 신지도로 유배. 10월 황사영사건으로 다시 국문을 받고 정약 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1803년 『주역』을 연구함.
1816년 6월 둘째형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사망.
1818년 『목민심서』 저술. 8월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옴.
1819년 『흠흠신서』 저술.
1836년 회혼일인 2월 22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 지은이 – 우승미
197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빛이 스며든 자리〉가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발표작으로 〈설향〉, 〈니드라의 딸기밭〉이 있다.
1. 어머니를 일은 슬픔을 공부하며 이겨 내다
2. 실학의 세계에 눈을 뜨다
3. 천주교에 발을 딛다
4. 수원화성을 설계한 젊은 관리
5. 임금의 귀와 눈, 암행어사
6. 끊임없는 비방
7.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관의 자리로
8. 정조의 죽음과 어지로운 정국
9. 유배지에서 학문을 연구하다
10. 노년의 생을 정리하다
– 작가의 말
– 정약용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