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
제8회 심훈문학상 수상작가 해이수의 소설집『젤리피쉬』. 첫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 보여준 이방인 의식을 바탕으로 삶은 곧 여행이라는 은유를 통해 ‘우리들은 왜 떠나고 무엇을 만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인 여행을 넘어, 어떠한 갈망이 시킨 낭만적인 일탈을 시도한다. 표제작「젤리피쉬」는 호주를 배경으로 고액 과외를 제의받은 한 남자가 열일곱 소녀를 만나면서 소통과 배려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해이수
저자 : 해이수
1973년 수원에서 태어나 단국대 국문과와 시드니대 대학원 언어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현대문학』중편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제8회 심훈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캥거루가 있는 사막』이 있다. 선호하는 어휘는 ‘인생파, endeavour, 祈禱’이다.
1. 고산병 입문
2. 루클라 공항
3. 아웃 오브 룸비니
4. 나의 케냐 이야기
5. 絶頂
6. 젤리피쉬
7. 마른 꽃을 불에 던져 넣었다
당신은 천국으로 가는 크레디트 카드를 가지고 있는가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단아한 문장으로 현실에 핍진한 글쓰기를 해온 해이수의 두 번째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그의 소설은 불필요한 치장과 과도한 스타일을 버리는 대신 맹수들이 뛰노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엉덩이를 까놓고 아랫배를 아프게 하던 요의(尿意)를 시원스레 풀어놓는다. 작가는 타자와의 만남, 자신과의 만남 그리고 여행 후 ‘달라진’ 자기와의 만남을 통해 삶의 비의(秘義)를 발견한다. 이번 소설집『젤리피쉬』는 그의 첫 소설집인『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 보여준 이방인 의식을 바탕으로 삶은 곧, 여행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우리들은 왜 떠나고 무엇을 만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떠한 갈망이 시킨 여행을 한다. 소설집의 첫 작품인「고산병 입문」의 주인공은 사 년간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 ‘곰 인형 발바닥 붙이기’와 같은 부업으로 돈을 모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그에게 특별한 선물로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에베레스트!”라고 외치며 다소 의아스러워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속으로 “존재감이 바닥을 치는 놈일수록 마음속에 설산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소설집의 배경은 지구의 등뼈라고 불리는 에베레스트에서부터 점차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이어지는 작품인「루클라 공항」에서는 ‘신문, 전화, TV, 컴퓨터’ 등 소위 문명의 이기(利器)들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상실한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모인 루클라 공항은 ‘고원’과 ‘지상’의 중간지점으로서 그들이 여행을 통해 찾고자 한 것이 자신이라면 도리어 그러한 ‘고립’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소설의 독백을 통해 ‘탕탕외외’, 곧 ‘넓고 먼 것, 높고 큰 모양’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여행을 떠나려는 이들의 마음속에 우뚝 서 있는 설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어지는 소설「아웃 오브 룸비니」에 이르러 비로소 네팔 고원에서 시작한 소위 ‘네팔 삼부작’은 지상에 발을 딛게 된다. 이 소설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 중 하나이다. 주인공은 집필을 위해 네팔을 여행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번다(파업)를 만나 어렵사리 릭샤꾼을 구해 자신의 목적지로 향한다. 하지만 릭샤꾼은 처음에는 매우 안쓰러운 모습으로 동정심을 자극했지만, 차츰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며 급기야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주인공이 청탁받은 글의 주제는 ‘한 생명의 무게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갖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한국 사원에서 그는 ‘남 선생’이라는 인물을 만나 ‘할육무합’ 고사(故事)와 관련된 그림을 보게 되는데 주인공은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순간에 이를 경험하게 된다. 할육무합 고사에 나오는 시비왕과 매 등은 에베레스트라는 거대한 설산과 릭샤꾼 ‘라마시사이니’, 그리고 주인공이 이번 여행에서 찾지 못한 ‘닐가이’와 함께 인간과 생명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천국을 나온 자의 여행, 젤리피쉬
“다른 사람 혹은 사물의 처지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거나 고려하지 않는 일종의 자폐 또는 소통 장애 증상”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한 맹랑한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인「젤리피쉬」는 따뜻한 남반구 호주를 배경으로 고액 과외를 제의받은 한 남자가 매혹적인 십대 소녀를 만나 그녀와 ‘소통’과 ‘배려’에 대해 이야기하고 배운다. ‘사적인 것을 묻지 말 것’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것’과 같은 특별 조항을 조건으로 하는 과외를 시작하게 되는데, 주인공은 그러한 조건들뿐만 아니라 제멋대로인 소녀 때문에 꽤나 당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는 당혹감보다 큰 안쓰러움과 연민으로 소녀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가령, 해양 생물 스티커 붙이기와 같은 단순하지만 매우 간단하고 직접적인 소통 방식을 꾀하는데, 소녀가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붙이게 하고, 그것이 늘면 상(償)을 주겠다고 하였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에게 이 방법만큼 직접적이며 자신을 사랑해주는 방법이 또 있을까.
소설의 제목인 젤리피쉬 곧, 해파리는 투명한 몸으로 바다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독수(毒手)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존재이다. 그것은 주로 상대방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데, 아기처럼 가녀린 자아를 향해 내미는 현대인의 서투른 사랑이라는 맹수의 발톱이 남긴 ‘사랑’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집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소설은「나의 케냐 이야기」로 주인공은 케냐를 여행하며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 글에서 결투하는 총잡이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손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총알을 맞는 순간 전체적인 균형이 일시에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니킥으로 정강이를 맞으면 머리가 휘청거리며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이것이 내가 발견한 서울의 도심에서도 아프리카의 초원과 동물을 걱정해야 하는 이유였다.”
문학평론가 정은경 씨는 그의 소설에 대해 “인물들의 낭만적 일탈과 동경의 심층에는 피상적인 여행의 에피소드 서사를 뛰어넘는, 혹은 다양한 편린들을 수렴하는, 보다 근본적인 지향점이 마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 추천사
해이수는 요즘 한국의 어떤 소설이 빠져 있는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치장과 과도한 스타일에 홀리지 않고 흡사 삶의 구체를 중계하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 쪽을 택한다. 그의 인물들이 대부분 길 위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고 그 길이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소설의 소재를 확대하기 위한 그의 ‘몸’의 움직임은 건강하고 바르고 심지어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넓고 먼 것을 뜻한다는 탕탕(蕩蕩)과 높고 큰 모양을 의미한다는 외외(巍巍)의 일면을 그의 소설은 지향한다. 그의 탕탕과 외외가 다만 추상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려를 바탕에 깔고 있으니 믿음직스럽다. 우리가 그를 부러워하며 격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 소설가 이승우
어떤 간절함으로 이토록 머나먼 곳들을 헤매고 다녔을까. 젖은 발과 구겨진 바지자락을 끌며. 미련하고도 발랄하게. 지구 반대편의 먼 도시와 킬리만자로의 그늘과 룸비니의 거리를 지나 해이수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한 지점은 어디일까.
아릿한 슬픔과 웃음이 뒤섞이는 글을 다 읽고 나니 알겠다. 왜 ‘룸비니 가는 길’이 아니고「아웃 오브 룸비니」인지를. 해이수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실은 쿰부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삶을 아프게 감당하는 것이란 사실도.
– 소설가 정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