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서 카프카적인 어둠이 느껴져!
차현숙 소설집『자유로에서 길을 잃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일어나는 여성의 복잡하고 내밀한 감정을 포착해낸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죽음과 거세를 통해 새롭게 부활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이 담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유년기에 겪은 정신적 외상으로 인해 타인보다 더 불편한 가족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모의 재혼으로 인해 생긴 복잡한 가족사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 가족 간의 소통의 부재와 사랑의 결핍은 결국 가족에 대한 애증을 불러오고, 이러한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주인공들이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양극성 우울증의 기폭제가 된다.
이 소설집에서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은 불행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며 주인공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고, 중증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그들은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자살 행위는 육체를 버리고 정신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뿌리를 향한 끝없는 거부의 몸짓이며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내려져 온 저주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다.
차현숙
차현숙
차현숙은 196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94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또다른 날의 시작>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창작집으로 《나비, 봄을 만나다》《블루 버터플라이》《안녕, 사랑이여》《오후 3시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등이 있다.
세상 모든 문이 닫히던 날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
종이인형
그녀의 첫사랑
별 헤는 밤
작품 해설
작가 후기
당신에게서 카프카적인 어둠이 느껴져!
불안은 침묵을 낳는다. 침묵은 고통의 언어가 된다.
난 오랫동안 침묵 외에 어떤 말도 갖지 못했다.
시원(始原)에 대한 죽음과 부활 그리고 거세
인간이란 생물학적 존재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생식(生殖)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 스스로를 부활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졌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종족유지본능이라고 한다. 이러한 매커니즘으로 생명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작업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진화라는 이름으로.
차현숙의 이번 소설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는 자신의 시원(始原)에 대한 죽음과 거세를 통해 새롭게 부활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자살 행위는 단순히 죽음으로써 안식을 꿈꾸는 것. 즉, 육체를 버리고 정신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영생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시원을 향한 끝없는 거부의 몸짓이며,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내려져 온 저주의 덫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거세의 의미를 소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통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죽음이란 어떤 의미이며, 왜 그들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관계의 단절이라는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생체적인 정지를 통해 육체적 죽음을 택했고, 어머니는 치매를 통해 정신적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그들과는 모두 관계의 단절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죽음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불행의 원흉이 바로 그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불행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어린시절 받아왔던 육체적 폭력과 불안감은 트라우마가 되었고, 불행한 가족사가 만들어 낸 열등감은 무의식적인 분노와 슬픔들을 응축시켜 증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원망하고 단죄하고자 한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서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의 죽음으로써 이해와 용서, 화해를 이끌어 내고 마음의 평화를 보상받기 원했다. 윤리적 잣대를 벗어나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상처의 치유 방법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시원을 찾기 위한 욕망은 아니었을까?
다음으로 부활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 <종이인형>에서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와 장례식을 치루면서 사회학적 아버지를 반추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해와 용서, 화해를 예상했지만 결국 혼란과 허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철저하게 홀로 냉소를 머금은 채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잠재의식 속에서 항상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불안감과 공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현실화되었다. 끝내 자신의 죽음으로 모녀를 버린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고독한 악마의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더구나 그것의 징후로 아버지는 꿈속에 주인공의 자궁문을 열고 사내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이에 반해 어머니의 부활은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계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양극성 우울증이다. 결국 그들의 죽음은 주인공의 마음에 불행했던 과거를 부활시켰으며, 깊은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중증 우울증으로 고생하며, 끝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거세의 의미는 이런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행위이다. 즉, 자살 행위는 그녀에게 유일한 자유의지이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다. 물론 K라는 신부의 말처럼 상대를 향한 분노와 증오를 ‘용서하라’는 거룩한 해법이 제시되지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대가는 또 다른 이름의 고통이 수반된다. 이쯤해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가 내게 있다.”라고 절규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타당성마저 보이고 있다.
과학론적 방법론으로 우울증을 유전학과 병리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주인공의 노력은 어쩌면 우울한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이라는 방법으로써 시원을 거세하는 우울한 진화는 복잡한 현대인의 또 다른 방법으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차현숙의 진화는 마치 우울한 자살세포 방법론이며, 자살세포의 진화는 어떤 의미로든 해독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차현숙의 이번 소설집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일어나는 여성의 복잡하고 내밀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섬세한 촉수처럼 잘 포착하고 있다. 주인공은 유년기에 겪은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로 인해 타인보다 더 불편한 가족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모의 재혼으로 인해 생긴 복잡한 가족사로부터 기인한다. 더구나 가족 간의 소통의 부재와 사랑의 결핍은 결국 가족에 대한 애증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은 실타래처럼 엉켜서 주인공의 내면에 자리 잡고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양극성 우울증의 기폭제가 된다. 우울증은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시원(始原)에 대한 거세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