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예술적 감성으로 현대인의 상실감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 윤대녕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한 남자가 기억상실의 상태로 시청 지하철역 근처를 방황하고 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이 남자는 편의점에서 우연히 난쟁이 여자 서하숙을 만나게 된다. 그 남자는 서하숙에 의해 “다크 엔젤”이라는 사이버 무인 호텔에서 기억 이식 회사에서 파견된 미지의 인물 M과 접촉하여 의뢰인인 “이명구”의 기억을 이식받는데…
윤대녕
196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단국대 불문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원’이 당선되었고, 1990년 <문학사상>에서「어머니의 숲」으로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출판사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4년 『은어낚시통신』을 발표하며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책을 통해 존재의 시원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수와 허무가 짙게 깔린 독특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르며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이효석문학상(2003)을 수상했다. 2010년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은 전혀 뇌리에 남아 있지 않다는 그의 최초의 기억은 조모의 등에 업혀 천연두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다. 주사 바늘이 몸에 박히는 순간 제대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조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도 안 하고 1학년 2학기에 학교 소사에게 끌려가 교실이라는 낯선 공간에 내던져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웠다. 한자 공부가 끝나면 조부는 밤길에 막걸리 심부름이나 빈 대두병을 들려 석유를 받아 오게 했다. 오는 길이 무서워 주전가 꼭지에 입을 대고 찔끔찔끔 막걸리를 빨아먹거나 당근밭에 웅크리고 앉아 석유 냄새를 맡곤 했던 것이 서글프면서도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독서 취미가 다소 병적으로 변해,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우연히 ‘동맥’이라는 문학 동인회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치기와 겉멋이 무엇인지 알게 돼 선배들을 따라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백일장이나 현상 문예에 투고하기도 했고 또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써대며 찬바람이 불면 벌써부터 신춘 문예 병이 들어 방안에 처박히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방에 처박혀 롤랑 바르트나 바슐라르, 프레이저, 융 같은 이들의 저작을 교과서 대신 읽었고 어찌다 학교에 가도 뭘 얻어들을 게 없나 싶어 국문과나 기웃거렸다. 1학년 때부터 매년 신춘 문예에 응모했지만 계속 낙선이어서 3학년을 마치고 화천에 있는 7사단으로 입대한다. 군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우편으로 부쳐 온 시집들을 성경처럼 읽으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군복을 입고 100권쯤 읽은 시집들이 훗날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대 후 1주일 만에 공주의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유예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을 투명하게 보려고 몸부림쳤다. 이듬해 봄이 왔을 때도 산에서 내려가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뻔한 현실론에 떠밀려 다시 복학했고 한 순간 번뜩,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문학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데뷔 이래 줄곧 시적 감수성이 뚝뚝 묻어나는 글쓰기로 주목을 받은 윤대녕은 ‘시적인 문체’를 지녔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의 글에서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그만의 시적 색채가 느껴지는 문체가 있어서이다. 동시에 그의 글에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일상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자연스럽게 포착하여 그려내는 뛰어난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윤대녕은 고전적 감각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 삶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지향점을 잃어버린 시대에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젊은 세대의 일상에 시적 묘사와 신화적 상징을 투사함으로서 삶의 근원적 비의를 탐색한다. 내성적 문체, 진지한 시선,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치밀한 이미지 구성으로 우리 소설의 새로운 표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남쪽 계단을 보라』,『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를 비롯해 장편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추억의 아주 먼 곳』,『달의 지평선』,『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누가 걸어간다』, 『어머니의 수저』를 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 지하철 2호선 시청역…7
라면요리사…11
밤비둘기…36
천수만에서 그녀가 한 얘기…55
사이버 무인 호텔…62
그는 누구일까?…79
포푸리 냄새와 히야신스…92
호텔 스탠드바에서 옷을 벗는 모델…106
분홍색 문, 하늘색 문…128
이계진 아나운서가 앉아 있는 옆 테이블…142
만리장성…149
삼십이년 만의 폭설…162
사슴벌레 통신…172
그때 누군가 나의 등을 두드려왔다…195
내가 강릉에 간 이유…212
수선화 진 다음…219
작품해설/백지연…223
작가의 말…237
윤대녕의 다섯번째 장편소설 『사슴벌레 여자』가 출간되었다. 윤대녕의 새로운 세계를 기다려온 독자 그리고 작가 자신에게 이번 작품이 갖는 의미는 크다. 이제까지의 빛나는 심미안, 이미지적 문장들, 존재의 시원에 머물던 시선들로 규정되어왔던 윤대녕 소설 미학을 재검토해야 할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미지 대신 서사를, 서정적인 자연 묘사 대신 스피드한 플롯으로써 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마치 SF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공상과학적 모티프를 적극 수용, 인간이 현실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엄밀하게 탐색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세상 속에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존재’란 어떤 상태를 뜻하는가. 이런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언어적인, 추상적인 대답이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실제의 삶에 좀더 실천적으로 가 닿는 장르는 바로 문학 또는 소설일 것이다. 이야기로써, 보편적 감동과 울림으로써 읽는 이를 근원적인 세계로 이끄는 소설의 미학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 바로 윤대녕의 『사슴벌레 여자』이다.
‘디지털 현실에서의 인간의 기억과 존재’라는 심도 있는 주제를 소설 형식으로 탐구한 연구 보고서 『사슴벌레 여자』는 윤대녕이라는 작가에게 보내왔던 찬사를 수정하게 하는, 혹은 우려를 불식시킬 만한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대녕’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이기에 더욱 주목된다.
첨단문명을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극대화된 상상적 어법으로써, 즉 소설이라는 장르의 영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는 『사슴벌레 여자』는 가벼운 터치로 흘러가는 스토리 위에 현대인의 존재 상실감을 무게감 없이 얹어놓은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 즉 기술적으로 타인의 기억을 이식받아 자아와 타아가 공존하는 분열된 삶을 사는 사이보그적 인간의 전형을 그려냄으로써 기계화되는 존재의 고독을, 그것을 방관하는 현대 사회의 비극을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