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비너스!
동성을 사랑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권하은의 장편소설 『비너스에게』. 청소년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였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 금기시되어온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열여덟 살의 평범한 소년 성훈. 그에게는 친구들과 달리 이성에게 아무 관심도 생기지 않는다는 고민이 있다. 그러던 중 성훈은 학교에서 동성 선배 군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군과 가까워진 성훈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군에게 키스하고, 이 사건이 학교에 알려져 결국 자퇴를 하고 만다. 청소년 상담소에서 상담을 받게 된 성훈은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양나와 수의사 현신을 만나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가는데….
권하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백석예술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미술신문’, ‘미술세계’등에서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풍부한 미적 감각과 정제된 문장이 돋보이는 장편소설 『바람이 노래한다』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는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1. 사랑은 어디에서 올까
2. 망상의 끝은 괴로워
3. 낙오자가 되는 건 싫어
4.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5. 오맙또 프라이데이
6. 일상의 틈새
7. 뿔로 받는 날
8. 경계인
9. 위로를 주고받기
10 달려라 달려 달
11. 사랑의 밤
하아……나는 그냥 나면 안 되는 건가
첫사랑, 첫 키스. 당신은 이 단어들을 들을 때 어떤 장면, 어떤 사람을 떠올리는가 혹자는 첫 키스의 기억을 종소리로 표현했다. 서로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때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하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떤 그리움과 아련함, 따스함이 묻어나는 표현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당신의 첫사랑, 첫 키스. 첫사랑과 첫 키스라는 단어를 듣고 당신의 마음에 따뜻한 물이 한 잔 엎질러진다면, 당신의 마음이 부드러운 휴지처럼 천천히 젖어든다면 당신의 첫사랑, 첫 키스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처음’이라는 말이 주는 서툶과 떨림, 아련함. 첫사랑은 서툴기 때문에 서글프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것일 테다. 당신이 겪은 첫, 처음. 그것을 넘어서면서 당신은 어른이 되었거나,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첫사랑, 첫 키스로 인해 한순간에 세상으로부터 낙오한 소년이 있다. 『비너스에게』의 주인공 ‘성훈’. 성훈은 열여덟 살의 남자 고등학생으로 아빠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산다는 것 외엔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다. 하지만 그에게 말 못할 고민이 생긴다. 또래 친구들과 달리 이성에게 아무런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 문제로 고심하던 성훈은 학교 체육대회 날, 한 학년 위의 동성 선배 ‘군’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리고 혼란에 휩싸인다. ‘사랑’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감정 자체로도 엄청난 책임감과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이 소년은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어려운 한걸음을 내딛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감정이 가져온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 지금껏 아주 평범하던 자신이 느닷없이 엄청나게 튀게 돼버린 데 대한 당혹감.
엄마가 날 위해 골라준 것들은 언제나 지극히 평범했어. 평범한 셔츠, 평범한 바지, 평범한 양말, 평범한 가방, 평범한 연필, 평범한 자전거 등등……. 그래서인지 나는 엄마의 성을 가진 아이치고는 꽤나 평범했고 앞으로도 평범하게 살게 될 거라 굳게 믿었었어. 하지만 나는 아빠가 없는 것 정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튀게 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던 거야. 다른 문제야 다 접어둔다 해도, ‘동성애자’라는 건 그야말로 엄청나게 튀게 돼 있는 거잖아. 엄마는 꽤 용감하고 씩씩한 여자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 나는 엄마를 실망시키게 될까봐 정말 두려웠어.
― 본문에서
성훈은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아주 평범한 가방을 메고 아주 평범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다. 대부분의 소년들처럼 서툴게, 수줍게 몸을 떨면서 사랑하는 상대 ‘군’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드디어 여름방학, 성훈은 ‘군’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있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것이 서툰 첫사랑이라면 성훈은 누구나처럼 첫사랑의 서툶을 감추지 못한 채 ‘군’에게 키스한다. 성훈의 첫 키스. 하지만 놀란 ‘군’은 성훈을 밀쳐낸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엔 자신조차 당혹스럽던 감정이었기에 그가 사랑한 상대 ‘군’에게 가닿지 못한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난 후 ‘군’과의 사건이 학교에 알려지고 성훈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학교를 떠난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성훈의 기억 속에 ‘수치’로 남은 첫사랑, 첫 키스.
내 진심은 다 어디로 증발했을까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향의 인간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 그래서 지금껏 ‘나’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삶이 다른 무엇으로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납득하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통. 성훈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취향이나 관심사 모두 단지 성적 기호에 맞추어 해석되어지는 현실에 절망한다. 자신이 학교 선생님들, 형제나 다름없던 친구 영무뿐 아니라 엄마에게조차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무엇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며, 한순간에 세상으로부터 낙오했다고 느낀다.
나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아침이면 일어나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툭탁거리고, 지루한 수업도 견뎌가며 어딜 가든 내 이름과 함께하는 ‘A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문장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 나는 정말 낙오자가 된 거였고, 그게 바로 첫 키스 때문이라는 건 웃어넘길 수도 없는 악질적인 농담 같았어. 거짓말로 시작된 설문을 위해 쉬는 시간을 몽땅 바쳤던 일들이며 군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던 모든 과장된 말과 행동들, 군에게 가졌던 터무니없는 기대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내게는 ‘수치’ 그 이상은 아닐 첫 키스의 당혹스럽고 황망한 기억. 도대체 어디쯤에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어.
― 본문에서
‘나는 나’면 안 되는 것인지, 세상은 왜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까지 변질시켜 받아들이는지 묻고 싶은 한편, 성훈은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성훈의 내면을 혼란스럽게 하고 이제 그 커다란 입을 벌려 성훈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고 한다. 가혹하기만한 성훈의 첫사랑. 성훈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대로 멈추어 서서 “내 안에는 벌레밖에 없어요”라는 자조를 읊조려야 할까 세상으로부터 낙오했다는 절망감에 몸을 한껏 웅숭그리고 있어야 할까 첫사랑의 실패 때문에 스스로를 혐오하며 안으로 침잠하는 성훈에게 ‘애미 청소년 상담소’의 양나 씨는 말한다.
“어떤 누구라도 자신의 본모습은 절대 수치스러운 게 아니야. 자연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거든. 단지 그 모습을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은 수치스러워해야 해. 자신을 인정할 수 없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야.”
― 본문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 애미 청소년 상담소의 한 벽면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그려져 있다. 성훈은 비너스를 보며 말한다. “저 애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겠군요”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비너스는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여신이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랑의 여신’일 것이다. 그리고 비너스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잘 알기에, 다름 사람의 아름다움도 아는 ‘미의 여신’일 것이다.
성훈은 이러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애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사랑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한다. 그리고 ‘수치’로 남은 첫사랑의 기억을 그 다음 사랑으로 극복하며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