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대담을 엮은 책.
『박탈』은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그리스의 사회인류학자 아테나 아타나시오우가 그리스 판테이온 대학교에서 나눈 대화, 이메일을 통한 토론과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한 대담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상대적으로 그 역사가 오래된 좌파 정치학이 불확실한 삶의 조건에 저항하는 최근의 페미니즘, 퀴어 등의 이슈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논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제목이기도한 ‘박탈’은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버틀러와 아타나시오우는 박탈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민족주의’,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적 규범성’ 등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민중에 대한 박탈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질서 가운데 인간의 육체가 단기간에 도구화되고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폐기되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탈과 인정 폭력의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타자들과 함께 서투르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것’, 타자들을 향한 ‘관계성’을 인식하면서 윤리적 자세로 나아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다양한 차원의 박탈의 경험이 민중의 거리 정치로 이어지는 점을 논하며 이야기하는 ‘육체 정치를 통한 수행성의 정치’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취약성에 대해 반응하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갖는 것의 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
퀴어 이론의 창시자이자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적 이론가. 1956년에 태어나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자랐다. 1984년 예일 대학교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에서의 헤겔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7년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첫 책 『욕망의 주체』를 출간했다. 그리고 1990년 『젠더 트러블』을 출간하며 학계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섹스/젠더의 이분법을 허물면서 기존 페미니즘 정치학에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스스로 레즈비언임을 밝힌 바 있는 버틀러는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부아르, 크리스테바, 프로이트, 라캉, 이리가레, 위티그, 데리다, 그리고 푸코에 이르기까지 유명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논의했다. 이 책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1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인터넷상에 국제 팬진(fanzine) ‘주디!’를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버틀러는 1999년 미국 학술지 『철학과문학』에서 ‘최악의 저자’에 뽑힐 만큼 난해한 글쓰기로 악명이 높지만, 다양한 학술 분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오늘날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로 인정받고 있다. 2012년에는 ‘정치이론, 도덕철학, 젠더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아도르노상을 수상했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가이자 여성주의 이론가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버틀러는 최근에는 시오니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에 반대하는 유대인 행동주의자로서 당면한 쟁점들에 대한 글쓰기와 집단적 행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그녀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언제나 탁월한 문학적 수사를 경유해서 구체화된다. 그런 면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성찰성은 시적 문장들과 만나면서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슬픔을 전염시키는 기이한 장면을 드러낸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수사학 및 비교 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내에서 번역되어 나온 저서로는 공저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단독서인 『불확실한 삶』,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안티고네의 주장』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공저) 등이 있다.
서문
1장아포리아로서의 박탈, 혹은 박탈이라는 개념의 곤란함
2장(실체의 형이상학 비판 이후의) 박탈의 논리, 그리고 인간이라는 질료
3장“경제 우선주의”에 대한 제동
4장섹슈얼리티와 박탈
5장(트랜스)포제션, 혹은 육체 너머의 육체들
6장자아 생성의 사회성: 인정 폭력에 대한 응수
7장인정과 생존, 혹은 인정을 견디어내기
8장자기-박탈로서의 관계성
9장집계되지 못한 육체들 혹은 시신들, 그리고 계측할 수 없는 수행성
10장책임감으로서의 반응성
11장수행성에 대한 비전유
12장박탈된 언어, 혹은 단수적 존재들의 이름
13장수행성의 정치적 전망
14장“위기”의 통치성,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들
15장또 다른 취약성을 보여주기: 빚지고 있는 것과 소유하는 것에 관하여
16장경계 횡단에 대한 감응적 폐제와 국가적 차원의 인종주의
17장공적 애도 가능성과 추모의 정치
18장복수적 수행성의 정치적 감응
19장연대라는 이름의 난제
20장대학, 인문학, 그리고 북 블록
21장출현의 공간들, 노출의 정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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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우리에게 정치적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토록 잔인하고도 불확실한 시대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
우리는 무엇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특별한 대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박탈(dispossession)’이다. 버틀러와 아타나시오우가 내놓은 박탈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다. 두 사람은 박탈이 단순히 위력에 의해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기는 상태만을 의미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소위 탈취적 속성을 지닌 박탈과 관계적 박탈, 그리고 탈-소유로서의 박탈을 구분하고, 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토대로 어떤 윤리적인 자세를 이끌어낸다. 즉, 탈취적 속성을 지닌 박탈을 경험하거나 타자가 박탈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성’을 인식하고 타자의 취약성에 허물어지는 반성의적 차원의 박탈을 통해 타자와의 연대를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박탈당한 이들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박탈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민족주의, 인종차별, 이성애 중심적 규범성 등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민중에 대한 박탈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질서 가운데 인간의 육체가 단기간에 도구화되고 처분 가능한 대상으로 폐기되는 상황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무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정의 논리 역시 이해 불가능성을 양산하는 폭력적인 박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위험함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탈과 인정 폭력의 위험성에 주의하면서 ‘타자들과 함께 서투르게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것’, 타자들을 향한 ‘관계성’을 인식하면서 윤리적 자세로 나아가는 것임을 강조한다. 다양한 차원의 박탈의 경험이 민중의 거리 정치로 이어지는 점을 논하며 이야기하는 ‘육체 정치를 통한 수행성의 정치’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취약성에 대해 반응하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갖는 것의 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사례는 서구나 중동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두 저자가 예로 드는 대상자들의 모습은 그 형태만 다르게 한 채로 우리나라의 어제와 오늘에 여전히 드러나고 있고,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정리해고제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등 신자유주의적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드러나는 폐해, 최근 들어 논란이 되고 있는 여성 혐오나 남성 혐오 논쟁,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을 겨냥한 인종차별, 성소수자 혐오 문제, 그리고 ‘세월호’ 문제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문제의식에 따라서 ‘박탈당한’ 이들의 자리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합의된 사항이라고 여기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정확한 언어로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것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타자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이 정당성을 갖는지를 고려하고,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용인되기 쉬운 주장의 허점을 찾아 의문을 던지는 저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입장과 배경을 지닌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면서 각자의 의견이 어떻게 충돌하는지, 대담자들은 각자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타협하는지, 그리고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두 사람이 어떻게 사유의 실험을 행하고 있는지를 조금씩 확인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