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정의 장편소설『매창』.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허균,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여인 매창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매창, 부안의 기생이다.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지만 시와 거문고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그 이름을 한양까지 떨쳤다. 한 남자가 한양에서 그녀를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유희경, 그 역시 천민 출신의 이름난 여항시인이다. 둘은 서로 닮은꼴 영혼임을 알아보고 첫눈에 격정적인 사람에 빠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흉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최옥정
저자 : 최옥정
저자 최옥정은 196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을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영어교사를 하다가 삼십 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했다. 등단 후에는 번역과 어린이 책 집필로 생활했다.
소설집으로 『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로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으로 『ON THE ROAD』, 에세이집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로 『소설창작수업』, 번역서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을 수상을 수상했으며, 한문 고전읽기 모임인 이문학회에서 9년여 동안 수학했다.
그리고 작가는 “소설과 인생은 등을 맞댄 한 몸이라는 생각으로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거기서 창작의 모티브를 찾고자했다. 인간은 엄청난 일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소설은 진짜여야 한다.’ 얼핏 터무니없는 것 같은 이 말을 바라보며 소설을 써왔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한 줄도 삶과 동떨어진 가짜여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다. 내가 발견한 ‘인물’은 끝까지 나의 분신이라 여기며 책임을 지는 게 작가의 일이라 믿는다”고 한다.
묵墨의 세상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이 맑고 시린 공기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너는 나의 심복지우니라
이화우 흩날릴 제
길은 멀고 몸은 고단하구나
초사한담樵士閑談
거문고의 노래
해설
이 소나무와 바다, 거문고의 울림 : 방민호
작가의 말
■ 이 어지러운 시대에 읽는
고결한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
정화가 필요한 시대
■ 황진이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기생 시인
■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허균,
그리고 죽음을 넘어선 여인 매창의 사랑 이야기
■ 2016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선정작
어찌하여 이 작품에 나타나는 매창은 이렇듯 난하지 않으면서도 향기를 머금고 작품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며 더욱 아득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이매창의 ‘몸’에 실린 작가 자신의 담백한 마음 세계 때문일 것이다.
매창은 끝내 이 남성적 세속 세계의 울타리 바깥, 월명암과 변산 바다의 소나무 냄새, 바다 내음새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생명을 받았다 떠나는 인간의 숙명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거쳐 그녀는 그녀 자신이 평생 생각해 온 죽음과 묵연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작중에 그려진 매창의 ‘처음과 끝’이 모두 최옥정 작가 그 자신의 것이리라고…….
소나무와 바다와 거문고 소리가 울리는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는 한동안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 『매창』, 해설 중에서
■ 고결하고도 뜨거운 성정의 소유자 이매창은…
– 황진이와 함께 조선 여성 시조 및 한시의 명인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매창은 한낱 기생이었으되 신분과 직업의 한계를 넘어 예술의 높고 깊은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안현 아전의 여식으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게 글을 익히며 자라난 매창은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는 허경진에 의해 「취한 손님에게」로 번역된 오언절구의 한시에 얽힌 일화로 널리 알려졌다.
어느 날 술 취한 손님이 매창의 명주 저고리를 잡으니 그 손을 따라 저고리가 찢어졌다. 매창은 명주 저고리 찢어진 것은 아쉽지 않으나 그가 베푼 정조차 끊김을 두려워한다고 노래했다. 술과 가무가 있는 남성들의 놀잇상에서 살아가야 했던 매창은 그럼에도 시로써 양반을 타이를 수 있는 높은 품격의 소유자였다.
매창이 불과 서른여덟 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시 수백 편이 이리저리 흩어짐에 부안 아전들 손으로 매창집이 엮이어 모두 쉰여덟 편 시들이 『매창집』 이름 아래 모이게 되었다.
최옥정 작가의 원고 덕분에 나는 아주 오래전에 백광훈, 최경창, 이달의 삼당시인을 비롯하여 애틋하게 읽던 허경진 번역 한시집의 하나인 『매창 시집』을 다시 읽었다. 여기서 그의 주석을 통하여 매창의 고독한 예술혼이 표백된 시 한 수를 접할 수 있었다.
칠언절구 「자한박명ㅡ기막힌 운명을 스스로 한탄하다」에서 매창은 자신의 고독한 심경을 먼 옛날 초산에서 옥덩이를 주워 세 번이나 임금께 바쳤던 ‘변화’라는 사람의 참극에 비유하여 노래했다. 처음에는 여왕, 다음에는 무왕에게 옥덩이를 바쳤지만 왕으로부터 감정을 의뢰받은 사람은 그것이 한갓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 화가 난 왕들은 변화의 발을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차례로 하나씩 잘라버리고 말았다. 문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초산 아래서 그 옥덩이를 안고 사흘 밤낮을 울었다. 그런 참담 끝에서야 마침내 억울함이 밝혀졌다는 고사를 빌려 매창은 모두들 피리를 좋아하는 세상에서 거문고를 타며 세상을 견뎌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감해 했다. 그녀는 이 시에서 초산을 형산(荊山)이라 표현하여 자신의 삶을 형극의 길을 가는 것에 비유했다.
이러한 매창이었던 만큼 그녀의 사랑 또한 황진이처럼 관능이 흐른다기보다 기다림과 외로움, 쓸쓸함, 한탄과 허무로 점철된 것이었다. 황진이의 시조에도 「어저 내일이야」나 「동짓달 기나긴 밤을」처럼 기다림과 회한이 담긴 시가 없지 않으나 다른 한쪽에 「청산리 벽계수야」도 있다. 또 지족선사, 서화담과의 일화가 있어 애욕과 풍류가 어우러진 황진이의 인생을 전달해 주기에 충분하다. 반면에 매창의 사랑은 유희경과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 그 뒤의 기약 없는 재회가 보여주듯이 품격과 인고와 기다림이 따르는 것이었다. 또 당대의 문장가 허균과의 만남과 그 사제적 교류가 보여주듯이 그녀는 시악과 철학이 한데 어우러진 플라톤적 사랑의 차원을 감내해마지 않았다.
최옥정 작가의 이번 소설이 훌륭한 것은 이러한 매창의 삶과 인격이 손에 잡힐 듯 여실하게 그려지는데 있다. 작중 곳곳에서 조선 중기를 살아가는 기녀이자 예인인 매창의 고절한 모습이 살아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폐병이 깊어 죽음에 다다른 매창의 모습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처절하게 묘사했다.
세 가지가 검어서 고왔던 여인 매창은 어둠에 한 덩어리의 어둠을 보태며 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도, 머루알 같던 검은 눈동자도, 까마귀 깃털 같은 눈썹도 어둠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침침한 달빛에 그녀의 얼굴이 희게 빛났다. 지병으로 창백해진 얼굴이 마지막으로 한번 환히 빛났다. 한때는 이슬에 젖은 매화를 닮았던 얼굴에 쇳조각처럼 차갑고 결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배에서 올라오던 숨이 가슴에서 나오다가 차츰 위로 올라와 목에서 밭은 숨이 나왔다. 누가 깰까 봐 기침을 참는 것이 병증을 악화시켰다. 들이쉬는 숨은 부드럽게 흘러들지 못하고 그물 같은 것에 턱턱 걸렸다. 그때마다 기침이 터졌다. 기침은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기력을 더 빨리 소진시켰다.
풍수화토로 이루어진 몸은 죽으면 다시 풍수화토로 돌아가는 법. 매창은 밭은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다. 무명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엎어진다. (16쪽?17쪽)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매창은 병 속에서 오히려 차갑고 결연한 태도를 비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최옥정 작가는 매창을 죽음에 이르러서조차 “돌아보면 한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삶을 긍정하는 존재로 그리되 이를 위해 자신의 짧은 삶을 거문고 하나에 의지하여 차갑게 버텨내도록 했다.
■ 이룰 수 없는 사랑, 타락할 수 없는 마음
– 유혹과 고독을 이겨낸 예술가 기생
소설 속에서 사랑하는 남자 유희경과의 기쁨은 짧고 이별과 기다림의 시간은 길다. 매창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마흔여덟 살 유희경을 만나 그의 시와 성품에 깊이 들어 평생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기록과 남겨진 시가 말해주듯 말 못할 사랑의 감정이 흐르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이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최옥정 작가는 시조 「이화우 흩뿌릴 제」에 나타나는 여성 화자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으나 그 기다림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지키는 매창의 삶의 태도를 그렸다. 이귀에서 허균으로 나아간 그녀의 남자들 관계에서도 매창의 마음은 어지럽혀지지 않고 귀하게 남았다.
어찌하여 이 작품에 나타나는 매창은 이렇듯 난하지 않으면서도 향기를 머금고 작품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며 더욱 아득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이매창의 ‘몸’에 실린 작가 자신의 담백한 마음 세계 때문일 것이다.
황진이 이야기가 거듭 발표, 출간되어 온 것과 달리 매창의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빈번하게 쓰이지는 않았다. 홍종화의 『매창』(이가서, 2005), 윤지강의 『기생 매창』(예담, 2013)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 매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진이 이야기가 두고두고 거듭 새로 쓰여 온 것과 무척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새로 쓰인 최옥정 작가의 『매창』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 걸까?
이는 김훈의 『칼의 노래』에 비견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훈 작가는 이순신의 새 이야기 『『칼의 노래』로 큰 각광을 받은 후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차례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칼의 노래』는 문학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가장 성공적이었다. 그 특장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삼엄한 칼날 위를 살아가야 했던 이순신의 절박하고도 가파른 내면세계를 깊게 파헤쳐 조각해 보인데 있었다.
국가, 당파싸움, 전장,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배경으로 이순신이라는 한 초인적 존재의 생사관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국가와 국민을 문제 삼는 현대적 시사성과 작품 전체에 흐르는 남성적 체취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에 이입된 작가의 내면성은 풍부하고 깊다.
최옥정 작가의 『매창』에 흐르는 주인공의 내면성을 『칼의 노래』의 그것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여성작가가 쓴 여성 시인의 삶에 관한 소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매창』은 임진, 정유 국제전쟁 시기를 살아간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음에도 국가, 전쟁, 당파싸움 같은 문제를 의제화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치 버지니아 울프 소설 『등대로』의 짧은 2부에서 다루어지듯이 인생이라는 이름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들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에 작가는 매창의 삶의 감성과 감각을 전면에 배치한다. 즉 내면을 풍부하게 그리는 점에서는 같되, 최옥정 쪽은 김훈 쪽에 비해 훨씬 더 인생 자체의 의미에 접근한다. 비록 이것이 큰 작가 김훈의 작의를 왜곡 이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나로서는 『매창』을 그렇게 읽었다.
■ 유려하고 깊이 있는 문장으로 매창의 육성이 들리는 듯 써 내려간 소설
– 어지럽고 힘겨운 시대에 읽는 고결한 여성의 초상
최옥정 작가의 거문고를 타는 듯한 문장들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내 기억의 어둠침침한 광 안에 버려두었던 옛 물상들의 세상을 떠올렸다. 그런 움직임이 일 때마다 또한 최옥정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섬세한 공을 길게 시간을 늘여 들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그 실례가 될 것이다.
(가)
춘분이 지나면서 햇살은 하루가 다르게 따사로워졌다. 매창은 마루에 앉아서 앞마당을 내다보거나 뒷마당을 걸으며 낮 시간을 보냈다. 배롱나무 이파리의 초록색도 날마다 새로 태어난 듯 짙어졌다. 냉이, 광대나물, 벌금자리 같은 자잘한 풀꽃들도 때를 놓치지 않고 개화의 행진을 이어갔다. 꽃들은 봉오리를 급히 벌리며 향기 있는 것은 향기를, 향기 없는 것은 비린 풋내를 뿜어냈다. 새 발자국이 보일 정도로 말끔히 쓸어둔 마당으로 미풍이 불었다. 고소한 나물 냄새가 바람에 실려 집 안 곳으로 퍼져나갔다. 매창은 산수유를 한 다발 꺾어서 화병에 꽂아 문갑위에 올려놓았다. 잠이 덜 깬 듯 은은한 산수유 향이 방 안을 떠다녔다. (27쪽)
(나)
남자들은 광 밑바닥에 숨겨둔 종자들을 꺼내고 뒷간의 두엄을 뒤집었다. 곰삭은 두엄에서 밥 냄새만큼 푸짐한 냄새가 났다. 이따금씩 봄비가 내리고 나면 풀들은 부쩍 자랐고 날은 푹해졌다. 매창도 마당의 잡초를 뽑고 좁아진 빗물 도랑을 넓혔다. 찬모와 함께 뒤뜰에 채마밭을 가꾸었다. 호박과 아욱과 가지를 심었다. 매창은 가지꽃의 보랏빛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둥실 열리는 가지에 비하면 그 꽃은 얼마나 우아한가. 매창은 해마다 빼놓지 않고 가지를 꼭 심었다. 여름에 가지를 따다가 쪄서 쪽쪽 찢어 냉채를 만들기에 앞서 늦봄부터 그녀는 꽃이 언제 피나 아침마다 들여다보았다. (105쪽?106쪽)
(다)
항아리를 열어놓은 장독대에서는 익어가는 장 냄새가 진동했다. 바지런하게 항아리를 행주로 닦아놓아 햇빛이 비칠 때면 항아리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윤금이가 된장이 제대로 익었는지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보다가 매창에게도 맛을 보였다. 짭짤하고 구수한 된장만 있어도 겨울 반찬 걱정은 없었다. 게장과 산초장아찌는 입맛 없을 때 물이나 녹차에 만 밥에 곁들여 먹으면 별미였다. 명아주잎과 깻잎 장아찌도 두 항아리 담가두었다. 손 많이 간다고 관두라고 해도 간장만 두 번 끓여 부으면 되는데 뭐가 힘드냐면서 윤금이는 팔을 걷어붙였다. 부엌에서 물동이 나르던 시절 어깨 너머로 음식 만드는 걸 배워뒀다고 모처럼 큰소리를 쳤다. 채소를 다듬은 뒤 장독대를 정리하는 건 장덕이 몫이었다. 장독대에 물을 끼얹어가며 항아리와 바닥을 말끔히 소제하고 나서 점심을 먹었다.
털게로 담근 게장은 싱싱한 냄새가 일품이었다. 등껍질 안에 꽉 찬 살에서 단맛이 났다. 장덕이는 게장과 깻잎만 갖고도 밥 두 그릇을 비웠다. 매창도 요즘은 밥맛이 좋았다. 수수와 기장이 섞인 잡곡이었지만 혀에 단맛이 괴며 쌀밥마냥 잘 넘어갔다. 배가 부르면 시름도 줄어드는 법이다. 맛난 밥을 먹고 게을러진 몸으로 마당에 내려섰다. 매창은 손수 싸리비를 들고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과 국화 이파리를 쓸어서 한쪽 구석에 모아두었다. (128쪽?129쪽)
이 아름다운 문장들은 작가가 매창으로 하여금 그녀의 시대의 남성들조차 다가서지 못한 세계로 나아가게 했음을 보여준다.
■ 천민과 서얼의 울분과 설움
– 모두 함께,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의 꿈
시의 달인이자 도인인 유희경도, 도저한 문필가이자 뜻 다 이루지 못한 경세가 허균도, 끝내 사람의 세속 삶의 울타리 너머로 완전히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이 살아간 시대는 반상과 적서의 구별이 엄연하고, 남성과 여성의 지체가 다르고, 나아가 당파싸움과 전란과 죽음과 굶주림이 군림하는 시대였다. 유희경도 의병으로 나가 공을 세워 면천을 하고 관직을 받았다. 기생과 어울리고 불도를 숭상한다 하여 모함을 받으면서도 율도국으로 상징되는 이상 세계의 꿈을 버리지 못한 허균. 그는 매창이 세상을 떠난 후 끝내 역모의 주역으로 처형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매창은 끝내 이 남성적 세속 세계의 울타리 바깥, 월명암과 변산 바다의 소나무 냄새, 바다 내음새 속에서, 자연의 일부로 생명을 받았다 떠나는 인간의 숙명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거쳐 그녀는 그녀 자신이 평생 생각해 온 죽음과 묵연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작중에 그려진 매창의 ‘처음과 끝’이 모두 최옥정 작가 그 자신의 것이리라고…….
소나무와 바다와 거문고 소리가 울리는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는 한동안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 고니의 노래, 백조의 노래 : 작가 최옥정…
작가 최옥정 씨. 내가 그를 안 것보다 그가 나를 안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가 귀함을 일찍 알지 못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처음의 그녀는 그날 인사동 어느 한식집에 있었다. 마루방 같은 곳에 밥상 여러 개가 비좁게 놓인 서민풍 식당이었다. 소설가 방현희 씨와 절친이라고 함께 만난 그녀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키가 컸고 말이 시원스러워 마음에 담아 숨겨둘 것이 없는 투명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몸이 좋지 않다고 했다. 수술을 받고 양의학과 자연요법을 병행하며 계속 치료를 받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자연요법 쪽으로 미치자 나는 제이티비씨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암을 비롯한 큰 병에 걸린 사람이 복어 독 처방으로 호전되는 것을 본 기억이 난 것이다. 최 작가는 그렇지 않아도 복어 독을 복용하는 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고, 나는 부디 특효가 있기를 기원해주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최 작가는 멀리 지리산에 가 있다. 서울에서는 병원 치료를 받고 쉬는 기간에는 산 깊은 곳에서 정양을 하는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그런데도 어디 어두운 빛 하나 보여주지 않고 시종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작가의 강인하고도 대범한 성격이었다.
그 후 얼마 전 나는 이 소설 『매창』이 출판 지원을 위한 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것을 축하해주는 자리를 마련했다. 어쨌거나 좋은 일이니, 다른 작가들과 함께 즐겁게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두 시간 넘게 계속된 저녁 자리를 최옥정 작가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버텼다. 그가 그 자리를 문자 그대로 버텨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방현희 씨에게 들어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가 마침 통증이 심할 때였던 것이다.
이럭저럭 시일이 흐르고 이 소설 『매창』의 해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다가오자 나는 비로소 작품 원고를 복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최옥정 작가란 이렇게 간간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 태도나 말로서 그의 상황을 짐작해 보는 정도였다. 『매창』의 원고는 이와 달리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 작가인지 분명히 알게 해주었다.
왜 그는 조선시대 부안의 명기 매창의 이야기를 쓰려 한 것일까. 그는 고향이 익산이라 했으니 이웃 고장이나 다름없는 부안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을 법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알다시피 매창은 예사 기생 아니요 황진이와 함께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여성 시인의 하나다.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깊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익산 사람으로 시조 부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매창을 시조로 노래한 것처럼 소설가로서 최옥정 씨도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원고를 읽어가며 나는 이 창작의 깊은 동기를 읽어낸 것만 같다. 그것은 작가의 대상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민과 동류의식이다. 평생 수백 편의 시를 쓰고 뭇 사람들의 비상한 칭송을 받았으되 어지러움, 문란함과 거리를 두고 깨끗한 예술의 세계에 머물다 끝내 그 사랑하는 거문고와 함께 묻힌 매창이었다. 매화꽃 보이는 창이라는 매창의 호는 계랑이라 불린 그녀가 스스로를 향해 붙인 호였다고 한다.
최옥정 작가는 이매창에게서 그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이상적 태도를 발견했던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된다.
원고를 읽어나가며 나는 처음에는 왜 작가가 매창 이야기의 부제를 ‘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라 붙이려 했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고 깊어짐에 나는 이 탄금가의 연주가 실수 없이 이어지기를 가슴 졸이며 읽었고, 마침내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나아감에 이야기의 새로운 예인이, 그 탄금의 명인이 탄생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멋진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방민호(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 매창에 들린 혼, ‘내가 매창’이다 – 집필 동기
매창에 대한 매혹과 호기심이 첫 번째 동기였다면, 사적인 이유가 두 번째다.
수십 편의 단편과 장편 두세 편을 쓰고 나서 든 생각이 취재해서 쓰는 걸 좋아하지도 않다보니 영영 못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그걸 극복해보고 싶었다.
매창이라는 인물이 내적 동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취재나 조사, 공부 등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국회도서관에서 논문을 찾아보며 대학원생이 논문 쓸 때처럼 몰두했으며, 그 과정에서 작가로서 한 단계 성장한 느낌도 들었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이라는 게 작가의 지문이 묻게 마련인데 매창을 알면 알수록 닮은 점, 완전히 다르지만 닮고 싶은 점들이 많아서 애착을 많이 느꼈다.
– 유희경, 이귀, 허균, 권필 등 당대의 쟁쟁한 남성들을 움직인 여성 매창
한시집을 읽다가 매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시도 절창이고 인물도 매력적인데 이렇게 문제적인 인간이 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화려하고 활달한 성정이 아니라 묵묵히 고요히 자신의 예술과 생각을 견지하면서도 강한 인물이라는 점이 감당할 수 있겠다 싶어 쓰고자 하는 열망을 부추겼다.
작품을 쓰다 보니까 구체적인 현실과 일상을 묘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매창의 삶이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와 버려서 몇 번이나 구성을 바꿔 다시 쓰느라 이 년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끝까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매창 같은 예술과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기생이면서도 지조를 지켰고, 삶의 고통을 예술로 극복하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영혼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낸 매창은 동시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시인과 지식인과 교류하며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솔메이트를 유지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 작품 줄거리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매창, 부안의 기생이다.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지만 시와 거문고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그 이름을 한양까지 떨쳤다.
한 남자가 한양에서 그녀를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유희경, 그 역시 천민 출신의 이름난 여항시인이다. 둘은 서로 닮은꼴 영혼임을 알아보고 첫눈에 격정적인 사람에 빠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임진란이었다. 남쪽에서 부산을 점령한 왜군이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올라오고 있었다. 전쟁은 그들은 갈라놓았다. 유희경은 의병으로 참가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아무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조선은 쳐들어온 왜군을 막아내기는커녕 제 땅과 백성을 고스란히 내주었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국토는 초토화된다.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갔던 임금은 의병이 명군과 합심하여 평양과 한양을 되찾은 후 한양으로 돌아왔다. 피난길에 민심의 이반을 겪은 임금은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의병들을 역모 혐의로 처벌한다. 신하들은 동인,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에 골몰한다. 백성들은 왜군의 도륙에 이어 기근과 수탈에 시달린다.
매창은 전쟁 중에 유희경을 찾아 한양까지 갔다. 의병으로 참가한 그가 북쪽 어디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 만나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전쟁이 끝났지만 유희경은 매창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매창은 절개를 지키며 유희경을 기다린다.
유희경을 만날 때 스무 살이던 그녀는 스물아홉 살이 되어 또 한 남자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허균, 등용과 파직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삶은 사는 천재다.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정인처럼 가까이 지내던 김제 군수 이귀의 친구였다. 당쟁으로 얼룩진 조정에서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한 그는 부침 많은 삶을 시와 문장으로 남긴다. 그를 담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너무 작은 그릇이었다. 매창은 그에게 백 년 일찍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허균은 은일한 삶을 꿈꾸면서도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화한다.
서로의 시세계를 알아본 두 사람에게 신분의 차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허균은 매창이 심중에 둔 사람이 있음을 알고 그녀에게 평생의 벗으로 지낼 것을 제안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유려하고 솔직한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허균에게 매창은 차츰 마음을 연다. 육체를 탐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여인인 매창과 심복지우가 되겠노라 다짐한다.
허균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책을 한 수레 사가지고 온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으며 중국과 서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매창에게 알려준다. 그에게 명분에 사로잡힌 성리학은 갑갑할 뿐이었다. 모친상 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러 다니고 나라에서 금하는 참선과 예불을 빠뜨리지 않는 파락호라는 세간의 평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문장과 학식 덕분에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임금은 그를 불러들였다.
그녀에게 허균은 세상과 그녀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양반과 천민, 여자와 남자, 부자와 빈자, 그 모든 것은 넘어선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는 그의 포부를 만날 때마다 설파했다. 아름답지만 실현이 불가능한 그의 꿈을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허균은 유학자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재능과 사랑 때문에 신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매창에게 마음의 고통을 잠재우려면 참선을 하라고 권한다. 그녀는 불경을 읽고 참선을 하면서 평온한 삶 속에 자신을 내려놓고자 한다.
유희경은 십오 년 만에 매창을 다시 찾았다. 그의 처지는 달라졌다. 의병의 공을 인정받아 임금은 그를 당상관에 임명했다.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려는 방편으로 천민을 기용한 것이다. 사대부가 되어 나타난 그는 헤어질 때 했던 약속을 상기시킨다. 언제고 다시 만나 열흘 동안 시를 나누며 함께 보내자는 옛날의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그들의 열흘은 그렇게 흘렀고 다시 이별의 순간을 맞는다. 매창은 유희경이 삶의 지렛대 역할을 해줄 뿐 자신의 정인으로써 일상을 공유할 사람은 아님을 깨닫는다.
허균은 어지러운 정세 한 가운데서 불리한 위치로 몰려 공주 목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부안의 정사암에 머물며 홍길동전을 집필한다. 매창을 찾아와 술을 마시고 거문고 연주를 듣다 가는 것은 그의 지복이자 낙이었다. 친구도 죽고 부모와 형제도 죽고 그는 홀로 세상과 싸운다. 그에게 매창은 유일하게 흉중의 포부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율도국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빈부도 계급도 없는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다짐한다. 정사암에서 은일하며 새 작품을 쓰겠다고 계획했지만 임금의 부름을 받아 다시 한양으로 떠난다. 조용히 암자에서 참선에 전념하고 글이나 쓰면서 살겠다는 계획과는 점점 멀어진다.
남자는 그녀에게 세상을 만나는 통로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법,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기도 했다. 유희경에게는 소외된 자가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이귀에게는 두루 세상과 노니는 법을 배웠다. 허균에게는 세상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내보이고 더불어 변화를 만들어내는 패기를 배웠다. 그 배움이 실천으로 연결되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렇게 그녀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아픔들, 빈자리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함께 하지 못해도 남긴 자취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스스로의 자리를 정했다.
이듬해 매창은 객점을 닫고 바닷가 모옥으로 옮겨 조용한 삶을 살아간다. 이번에 그녀를 찾아온 것은 지독한 병고였다.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도 끝내 일어나지 못한다. 서른여덟 살의 봄날 매창은 남의 집 마루에서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 친구인 동네 아전들이 무덤을 만들고 유언에 따라 그녀를 거문고와 함께 묻어주었다.
유희경은 매창의 죽음을 전해 듣고 무덤에 숫눈이 소복할 무렵 부안을 찾았다.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하는 그에게 여종은 매창이 남긴 솜저고리를 전한다. 유희경과 재회하고 또 이별한 뒤 삼 년 동안 그녀는 해마다 가을이면 솜저고리를 지었다. 한 벌은 자신에게 입혀서 묻어달라고 했고 나머지 두 벌은 그가 다시 찾아오는 날 전해달라고 했다.
“의리는 바위처럼 무겁고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하였거늘, 나의 의리는 깃털보다 못하고 너의 죽음은 태산만 한 바위처럼 무겁고 무겁도다.”
그는 핏줄을 통과해서 나온 소리처럼 진한 그녀의 거문고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조시를 한편 지어 여종에게 주면서 매창의 제삿날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 예옥은 문학전문 출판사입니다
예술가 소설 출판 십 년째로 한국 작가를 대표하는 이상, 손창섭, 채만식, 이효석, 박태원 등의 작품집과 인문학 서적을 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