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특급우편』,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의 작가 방현희
등단 12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소설집
2001년 등단한 이래 12년 동안 한 권의 소설집과 세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며 꾸준히 작품세계를 심화시켜온 작가 방현희의 두 번째 소설집 『로스트 인 서울』이 출간되었다. 표제작 「로스트 인 서울」을 비롯해 7편의 단편이 소설집에 수록되었다. 비의로 가득 찬 생의 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회적 금기, 욕망의 억압과 해방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일단의 변화를 내비친다.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주제들을 밑그림으로 삼고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몰락과 파국을 맞이하는 개인 혹은 관계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파하는 탁월한 역량은 여전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거나 선택의 여지 없이 위기에 내몰리며(「로스트 인 서울,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후쿠오카 스토리」), 환상과 죽음의 세계로 도피하거나(「세컨드 라이프」, 「퍼펙트 블루」), 무기력하고 답답하게 현실의 쳇바퀴를 돌 뿐이다(「탈옥」, 「그 남자의 손목시계」), 여기에서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 (탈)근대 도시의 보편성을 함유한 ‘장소’”(허희, 문학평론가)로서 제시된다. 작가는 ‘병든 서울’에서 “꿈을, 기억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을, 자신을, 삶을 상실하고 있”는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미세한 결까지 잡아낸다. 7편의 수록 작품이 개별적으로 쓰인 것이지만 연작처럼 긴밀하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현희
소설가. 삶의 이면을 투시하는 날카로운 시선, 섬세하고 감각적인 심리묘사, 창의적인 이야기와 구성으로 인정받아온 그의 또다른 직업은 간호사. 소설가와 간호사로 사는 세계는 몹시 멀고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범주로 충분히 묶일 수 있었다. 십여 년 동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에서 치열한 사랑, 숱한 기대와 좌절을 겪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삶의 공포와 두려움을 말할 수 없었기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시간은 곧 그를 끊임없이 글쓰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9년을 간호사로, 17년을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다.
2001년 『동서문학』에서 「새홀리기」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2년 제1회 『문학│판』 장편 공모에서 『달항아리 속 금동물고기』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단편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 『로스트 인 서울』 장편소설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 『달을 쫓는 스파이』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복수』 등을 썼다. 장편소설 『불운과 친해지는 법』은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BOOK TO FILM에 선정되었고, 단편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로 2018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로스트 인 서울
세컨드 라이프
탈옥
그 남자의 손목시계
후쿠오카 스토리-위급 상황에서의 이별에 관한 섬세한 보고서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퍼펙트 블루-기이한 죽음에 관한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사례
해설 서울 기행: 잃는 세계를 앓기_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그곳에서 나는 꿈을 꾸었어. 지금의 나를.”
찰나의 행복, 깨진 꿈, 파괴된 사랑
거짓과 환상으로만 유지되는 세상에서 삶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
『바빌론 특급우편』, 『네 가지 비밀과 한 가지 거짓말』의 작가 방현희
등단 12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소설집
2001년 등단한 이래 12년 동안 한 권의 소설집과 세 권의 장편소설을 펴내며 꾸준히 작품세계를 심화시켜온 작가 방현희의 두 번째 소설집 『로스트 인 서울』이 출간되었다. 표제작 「로스트 인 서울」을 비롯해 7편의 단편이 소설집에 수록되었다. 비의로 가득 찬 생의 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사회적 금기, 욕망의 억압과 해방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일단의 변화를 내비친다. 지속적으로 다뤄왔던 주제들을 밑그림으로 삼고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몰락과 파국을 맞이하는 개인 혹은 관계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파하는 탁월한 역량은 여전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의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거나 선택의 여지 없이 위기에 내몰리며(「로스트 인 서울, 「로라, 네 이름은 미조」, 「후쿠오카 스토리」), 환상과 죽음의 세계로 도피하거나(「세컨드 라이프」, 「퍼펙트 블루」), 무기력하고 답답하게 현실의 쳇바퀴를 돌 뿐이다(「탈옥」, 「그 남자의 손목시계」), 여기에서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 (탈)근대 도시의 보편성을 함유한 ‘장소’”(허희, 문학평론가)로서 제시된다. 작가는 ‘병든 서울’에서 “꿈을, 기억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을, 자신을, 삶을 상실하고 있”는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미세한 결까지 잡아낸다. 7편의 수록 작품이 개별적으로 쓰인 것이지만 연작처럼 긴밀하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든 현실, 이방인이자 타인으로 떠도는 인물들과 무기력한 ‘나’들
「로스트 인 서울」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서울로 유학 온 여성 ‘그렉안나’를 둘러싼 이야기다. 평범한 유학생이던 그녀는 우연히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국민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케이블 방송업체를 운영하는 ‘강’의 여자가 되어 고급아파트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를 거스르는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인기는 급락하고 결국 강에게도 버림받는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열렬히 지원해주는 룰렛 구슬처럼 그녀도 그녀 앞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그녀는 룰렛 구슬이나 다름없다. 룰렛 구슬은 굴려질 때마다 언제나 새롭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써봐도 핑핑 돌아가는 룰렛 판처럼 한창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에 던져진 그녀는 이제 거기서 내려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냥 룰렛 구슬의 이야기이다. 수없이 던져진 카지노 룰렛 구슬의. —「로스트 인 서울」, 13쪽
― 돌아가겠다는 게 아니야. 난 잊었던 나를 찾은 것이지. 잊고 싶다고 해서 호락호락 잊히겠어? 내가 저 거리에 들어섰을 때 저 거리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이 강물을 봐. 흘러가버리지 않았다구, 여기서 이렇게 모든 기억을 부풀어 오르게 하잖아.
그토록 행복했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 지금보다 나은 게 아닐까? 지금은 그 삶의 잔여로서 흘려보내고 있을 뿐인데, 이 하찮은 삶을 위해 기억을 버려야 하는 걸까?—「세컨드 라이프」, 77쪽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잔인하게 빛나는 간수 놈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감옥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넌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네 내장을 송두리째 다른 곳으로 도망시킨다 해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이제 내 몸의 무엇을 빼돌려야 할까. 그다음은 뇌수일까? 뇌수를 빼돌리면 나는 탈옥에 성공하는 걸까? —「탈옥」, 114쪽
나는 아버지의 금고를 박살내고, 그러나 시계들은 그대로 두고 미장원으로 가 머리를 깎았다. 머리카락이 듬뿍 잘려 나갈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둔 분노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폭발하는 분노만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쌓인 분노는 스스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래 억누른 사람은 뚝뚝 떨어져 나가는 분노를 보며 가뿐한 마음으로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 148쪽
언제나 고요하게 비어 있는 그 뒤뜰에선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졌으니까. 고요한 뒤뜰의 반듯한 살창 앞에 앉으면 언제나 그의 입술은 내 목덜미를 자근자근 물었고, 그의 숨은 언제나 내 귓속에 가득 들어와 내 숨을 막히게 했고, 도란도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관심을 돌리는 찰나, 검은 먼지 정령이 우릴 먼지로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오직 서로만 바라보고 서로에게 열중하던 그때. —「후쿠오카 스토리」, 158~159쪽
오늘 수고 많았어. 너무 어려워 말고 하나씩 배운다고 생각해.
그 말은, 이제 그만 느슨해지려고 천천히 풀어지는 가슴을 예고도 없이 퍽 때리는 것 같았다. 톰의 뒤를 따라 침실로 가다가 그녀는 순간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주방 조명 아래에서 빛을 발하는 찻잔 조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찻잔 조각 앞으로 다가갔다. 영국 여왕의 하사품이라. 영국의 전통적인 문양, 영국인들의 영혼이 깃든……. 한 조각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그때 탐욕스러웠는지, 절망스러웠는지 그건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녀는 발레를 버리고 떠나왔던 그날을 떠올리며, 식도를 찢으면서 내려가는 찻잔의 비릿함을 억지로 삼켰다.—「로라, 네 이름은 미조」, 198쪽
얼마 전까지 나는 하얀색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블랙 아니면 화이트였지. 그런데 지금, 온통 파란색이야. 하얀 피부 위에서 핏줄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혈관에 푸른 잉크를 강제로 밀어 넣은 것처럼 점점 푸른 혈관이 길어지고 굵어지더군. 어느새 푸른 핏줄이 굼실굼실 기어 다니듯 커져갔어. 그리고 마침내 온몸을 뒤덮고 말았어. 푸른색은 아마도 색을 전부 날려버리는 특징이 있는 모양이지. 짙푸른 어둠이 걷히는 새벽 무렵 첫 빛에 색이 증발하듯 조금씩 조금씩 피부에서 색이 날아가고 있어. 이제 점점 투명해지는 중이야. 그래서 곧잘 사라지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