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
박금산 소설집『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현대인들의 일상과 심리를 세련된 필체로 세밀하게 관찰하는 박금산의 이번 소설집에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결핍되고 메마른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은 대부분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가면서도, 세상을 대하는 모습에서 나약한 면모를 보인다.
<이국종 고양이의 방>에는 외국인 여성을 세입자로 하여 살아가는 남자가, <누가 피리를 부는가>에는 연상의 여인과 일탈을 감행하는 의료 보조기구 제작사가, <17층 아래의 나뭇잎-현기증>에는 심한 고소공포증으로 아내와 여행을 하지 못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작가는 그들을 통해 정상을 추구하려는 정상적이지 못한 인물들의 노력을 무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추억, 사랑, 도덕, 정의 등 자신들로부터 사라졌다고 여겨지거나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들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상반된 모습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제도, 관계, 일상,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로부터 일탈의 유혹을 느끼지만, 끝내 삶으로부터의 일탈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탈’이었음을 고백한다.
박금산
저자 : 박금산
1972년 여수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1년『문예중앙』신인상에 중편소설「공범」이 당선되어 작품 발표를 시작, 작품집으로는 소설집『생일선물』(2005), 장편소설『바디페인팅』(2007)이 있다.
1. 이국종 고양이의 방
2. 17층 아래의 나뭇잎 – 현기증
3. 누가 피리를 부는가
4. 사라진 것, 없었던 것
5. 라디오와 사랑할 때
6. 불광동 성당
7. 나는 아버지에게 간다
거대한 일상, 왜소한 사랑
왜소한 체격의 남자는 부모님이 물려준 집에서 자신과 동거할 세입자를 찾는다. 그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졌으며,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 남자는 스스로 세입자를 고르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만들어 외국인 여성을 세입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처음에는 여인으로 인해 ‘계약 동거’를 하는 듯한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호의의 거절, 방마다 설치된 잠금장치 등 기대와는 다른 여자의 행동으로 결국 자신의 세입자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이국종 고양이의 방」)
백화점에서 방송 일을 하고 있는 남자와 법원 속기사를 하는 여자가 있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이 남자는 여자의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비행에서 여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앞에 ‘SUV’를 모는 옆집 남자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 돌발적인 외부 인자의 출현으로 이들 연인의 관계는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17층 아래의 나뭇잎 – 현기증」)
현대인들의 일상과 심리를 세련된 필체로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박금산의 이번 소설에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결핍되고 메마른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세상을 대하는 모습에서는 일면 나약한 면을 보이고 있다. 가령, 위에서 예를 든 두 작품에서처럼 작가는 작품 속 인물들―외국인 여성을 세입자로 하여 살아가는 남자(「이국종 고양이의 방」), 연상의 여인과 일탈을 감행하는 의료 보조기구 제작사(「누가 피리를 부는가」), 심한 고소공포증으로 아내와의 여행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17층 아래의 나뭇잎-현기증」)―을 통해,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들이 가상하는 ‘정상(正常)’이라는 것이 실상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기준임을 전제로 정상적이지 못한 인물들이 정상을 추구하고, 보전하려는 노력들을 무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한 어투로 그려내고 있다.
선(線) 밖의 일들에 대하여
박금산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탈주를 꿈꾼다. 그들은 젊은 시절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어떤 자리에서 몸부림쳤거나, 어른이 되어서 사회가 가진 제도(적 모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는 것은 ‘혁명’이나 ‘대의’와 같은, 지금의 그들이 짊어지고 가기에는 턱없이 무거운 것들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겉보기는 풍요로우나 결핍되고 메마른 내면을 가진 현대인들이 내뱉는 작은 고백일 따름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추억이나 사랑, 도덕, 정의와 같은 것들을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소설집의 한 제목처럼 ‘사라진 것’이자, 한편으로는 ‘없었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사라진 것, 없었던 것」)
앞에서 말한 것들, 사랑이나 정의와 같이 지금 우리들로부터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애초에 가지지 못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흔히 ‘소외’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사랑이나 정의의 주변을 맴돌다 어느 날 그것의 부재를 느끼고는 뜬 눈의 봉사처럼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헤매는 것이 현대인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박금산의 소설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특징적 면모들 속에서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들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상반된 모습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제도로부터, 관계로부터, 일상으로부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로부터 일탈의 유혹을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끝내 자신의 삶이, 혹은 삶으로부터의 일탈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탈’이었음을 조용히 고백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삶이야말로 가질 수 없는, 늘 주변을 맴도는, 중앙도 중심도 중간이라는 것도 없는 오로지 탈주의 공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작가의 말
상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과장을 하게 된다. 옛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당시에 느꼈던 누추함을 누락시켜 말하려고 한다. 우정을 공개하려고 하는 사람은 당시에 만들어 가지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영웅담을 추가하려고 한다. 둘 다 과장이다.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없었던 것을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점에서 같은 거짓이다.
상실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무너진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꿈은 이루려고 했던 것이지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너진 꿈을 상실에 넣어 말하는 것은 없었던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 격이 된다. 그것은 거짓이다. 가지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 어떻게 잃었을 수가 있겠는가. 내게 없는 것은 남이 빼앗아 갈 수도 없다. 하지만 뭐랄까. 조금 이상하다. 꿈을 제해놓고 상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다. 과장이 되더라도 꿈을 넣어 이야기를 해야 제대로 된 상실이라는 느낌이 오는 것이다.
사랑 아닌 것들은 진짜인 사랑을 위협하고,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꿈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상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것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미래가 없다면 상실에 대한 이야기 또한 불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