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향기>의 작가 김하인이 쓴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에 관한 110여편의 산문시 모음집. <사랑의 사계>라는 부제를 달고 계절마다 출간되는 시리즈의 마지막편 가을여행. “..//그러니까 당신 내게로 걸어온 걸 두려워하지 마. 사람이라는 기쁨과 슬픔으로 고여 오르는 우물 하나 가진다면 사막도 건너갈 수 있으니까.” – <우물> 中.
김하인
김하인 감성·서정소설 작가인 김하인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대학교 3학년 때 「조선일보」, 「경향신문」, 「대구매일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현대시학』을 통해 시, 소설, 동화를 아우르며 문단에 등단했다. 잡지사 기자, 방송 작가를 거쳐 현재는 강원도 양양에서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 작품으로는 『국화꽃 향기』『국화꽃 향기, 그 두번째 이야기』『국화꽃 향기, 그 마지막 이야기』 이외에 『허브를 사랑하나요?』『아침인사』『일곱송이 수선화』『내 마음의 풍금소리』『소녀처럼』『목련꽃 그늘』『유리눈물』『나는 못생겼다』『천 개의 눈』『연어』『이상한 나라의 프로포즈』『사랑의 기원』 등이 있다. 또한 성인을 위한 동화와 시집 외에 추리소설도 발표하였으며, 『왕목』으로 제5회 ‘추리 문학 매니아상’을 받았다. 특히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소설들이 이미 출간되거나 출간 예정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작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1. 당신을 입은 내 몸이 내 사랑이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내밉니다
물의 감촉
지난여름의 수국
안개
(…)
2. 내 눈 속에서 네 가슴을 꺼내고, 네 가슴 속에서 나의 사랑 꺼내고
마술
오아시스
돌
대나무
잊지 마세요
(…)
3. 외로워지기 전에 그리움이 먼저 길을 냈네
단풍나무
갈대
철새
상실
서울역 플랫폼
(…)
4. 사랑아, 그럼에도 나는
매듭
이별
손톱깎기
차 맛이 어때요
늦가을 한 잔
(…)
일 년의 사랑, 긴 여운
우리 시대의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가장 예리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작가 김하인의 《가을여행》이 자음과모음에서 출간되었다.
“…겨울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낙엽 모아 불 지피고 손바닥 쬐듯, 책갈피에 끼워둘 사진이나 갈잎 정도는 이 가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제 마음 느껴주신 님이 늘 그리울 겁니다. 님과 함께 나눈 일 년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며 햇살의 사랑으로 제 가슴 따스하게 물들입니다.”
작가의 말마따나 겨울이 멀지 않은 계절에 출간된 《가을여행》은 2002년 1월, 3월, 7월에 각각 출간된 《눈꽃 편지》(겨울) 《당신은 내 첫사랑의 부임지입니다》(봄) 《당신은 추억이라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사랑이라 말합니다》(여름)에 이은 네 번째 작품으로, ‘김하인의 사랑의 사계’ 시리즈의 완결편. 이로써 일 년에 걸쳐 펼쳐졌던 김하인의 사랑의 4중주가 완성되었다.
“비가 오면 무너진 흙더미에서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내는 뿌리, 그 미지의 곳에서 뻗어나온 줄기, 그리고 가지들과 잎새들을 바라보고 또 그 모든 것을 이루게 하는 흙과 하늘이라는 전체에 빗대어 현상이나 사물을 바라보면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글 엮어나가는 모습을 나무에 빗대어 표현하는 작가 김하인.
그런 그가 “일 년의 사랑”이라고 표현했던 ‘김하인의 사랑의 사계’(사랑도 설렘으로 시작해 충만함을 거쳐 쓸쓸함을 남기고 어느 결에 다시 시작되는 순화의 경로를 거친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모습이 꼭 계절을 닮았다) 시리즈는, 사랑과 이별 와중에 겪는 모든 열병 같은 감정을 겨울의 편린에 실어낸 ‘겨울편’, 사랑의 설렘, 기대, 떨림, 그리고 거기에 따른 낯선 행복, 불안함 등을 담은 ‘봄편’, 산으로 바다로 집 안에 놓여 있는 냉장고 속, 눈을 돌리는 곳 어디서나 투영되는 싱싱한 사랑을 그린 여름편,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가을편’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감성을 간결한 시적 리듬과 자유롭고 읽기 편한 산문적 문체로 고스란히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움의 먼 여정
가을의 사랑은 길 위에 있다. 작가는 서울역 플랫폼에서 시작해 오대산 상원사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는 “낙엽여관”(작가가 꼭 가보고 싶다는), 어청도와 가평 유원지, 법수치 계곡을 따라가면서 한 해의 노을을 느끼고 한때의 열정을 반추한다. 그리고 길 위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듯 여러 가지 사랑의 모습을 만나 그것들을 하나하나 포착해낸다. “사랑이 스몄는지 장난이 어렸는지 어깨 뒤로 피고 졌던 당신의 표정”(〈어깨 뒤의 얼굴〉, 75p), “술에 만취해 넥타이를 풀어 젖힌 채 귀가하는” 내게 “내 아픔을 사겠어요? 아니면 내 슬픔을 사겠어요?”라고 묻는 옛사랑의 엉뚱함(〈비루한 옛사랑〉, 152p), “한 번도 사랑이라 불러주지 못”했지만 “역시 사랑이었음을” 인정하는 늦은 고백(〈일기〉, 149p), “소주 네 병을 연이어 까”면서 욕설을 해대며 “이후 나를 만날 남자 전부 슬픔일 거라고 쓸쓸함일 거라고 선포”하는 “갈매기 소줏집”에서 만난 예쁘장한 여자(〈갈매기 소줏집〉, 21p), “어디 사랑이 닭털 뽑듯 쥐어뜯는다고 잡혀지는 것이냐”며 사랑을 향해 자신을 놓아버리라고 패악을 부리는 남자(〈통닭집 남자의 사랑〉, 105p) 등.
그런 작가에게 “토끼 같은 여자”가 연애를 건다. 거대한 정육점이나 도살장처럼 변해버린 세상에서 “몸은 가져오지 말고 마음만 가”지고 만나자는 약속으로 말이다(〈토끼 같은 여자〉, 29p).
이 모두 일상에 침투한 떨쳐버릴 수 없는 솔직한 생활의 모습으로 구현된 사랑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그리움의 모호함에 표정을 만들어낸다. 작가가 요즘의 사랑에 대해 “효율을 제일로 따지”고 “화살처럼 명쾌하고 즉흥적으로 꽂히는 직선”이라고 하면서 그래도 아직은 “물기 많은 가슴”으로 “구부러지는” 곡선의 사랑이 그립다고 한 것은 아마 그런 솔직함을 절제된 문장으로 다듬을 수 있는 능력이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