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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허구영
저자2
출판사 에브리북
발행일 2020-07-09
분야 예술/대중문화
정가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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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 그리기(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지니는 관념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그림이 자기감정의 표출, 부추김에 있다기보다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잠재우는 장치로서 놓여야 하겠다는 것일 게다. 이를테면, 자못 두터울 수 있는 의미질 층의 한 껍질, 한 껍질을 벗겨내기 위한 삶의 지속적인 장치와 같은 것으로서의 그림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림은 항상 삶의 평형적 지속을 이루고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으로만 남기를 바란다.
W. 칸딘스키에 다가가 본다. 내가 그의 그림에서 읽혀지는 것은 빠른 붓놀림의 흔적들이 보여주는 그의 호흡과 맥박이 전부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 그렇게밖에 보이는 것이 없소?”라고 한다면, 나는 차라리 나무나 돌이 되어 버리련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내가 인정하는 칸딘스키란 그 이전의 어떠한 그림보다도 빨리 그릴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그 나머지는 그의 체취이다. 내가 칸딘스키를 좋아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그러한 점에서 가능할 일이다.
나는 문득 손에 펼쳐 든 텍스트의 한 부분일 수도 있는, 예기치 않은 사물과의 은밀한 육질적 조우(encounter)일 수도 있는 거기에서 한동안 머물며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구석구석을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궁리를 한다. 그것은 마치 물먹은 종이가 흐늘흐늘 해졌다가는 어느새 다시 팽팽해지고, 다시 그 위에 물을 적시면 흐늘흐늘해졌다가 다시 팽팽하게 되어 지는 반복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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