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 어디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할까.
하성란이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A』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하성란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 정밀한 묘사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답게 작가 특유의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대양 사건’을 모티프 삼아 한 시멘트 공장에서 일어난 의문의 집단 자살을 중심으로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짜 이유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많은 등장인물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얽히고설킨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려 다소 복잡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탄탄한 플롯을 지켜가며 작품의 속도감과 긴장감을 유지해 간다.
‘신신양회’라는 시멘트 공장에는 오랜 세월 함께 일하고 살아온 여덟 명의 여자가 있다. 공장을 만든 장본인이자 사장인 여자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매처럼 지내는 일곱 명의 여자들은 미혼인 채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공장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어느 날 또 다른 공장 직원들과 함께 모두 교살된다. 하지만 그들의 시신에는 저항의 흔적이 없다. 이는 그녀들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 참혹한 사건의 진실은, 그들의 자녀들이 사건 이후 3년 뒤 재회하여 다시 예전의 공동체 생활을 꾸리고 신신양회를 재건하면서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 진실을 향해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비밀이 단지 그들만의 사연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님이 밝혀진다. 작가는 그 과정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처절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상대 남자도 모르게 아이를 배고 낳아서 기르는 젊은 ‘엄마’들의 자족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 결혼제도와 성 풍속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가. 소설 속에, 아니 소설이 끝난 후에도 작가가 던지는 의미있는 질문은 여전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남아 있다.
깊은 성찰과 인간에의 따뜻한 응시를 담아낸 섬세한 문체로 주목 받아온 작가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풀」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탁월한 묘사와 미학적 구성이 묵직한 메시지와 얼버무려진 작품을 쓰며, 평소 일상과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묘사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 자신의 대답을 적어 내려가는 노란 메모 노트를 늘 인터뷰 시에 지참한다. 이러한 습관을 통해 작품 속 작은 에피소드에서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아낸다.
거제도가 고향인 부친이 서울에 올라와 일군 가족의 맏딸이기도 한 그녀는, 부친의 사업 실패로 인문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여상(女商)을 졸업한 뒤 4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청춘의 초반부를 보냈다. 뒤늦게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소설을 쓰면서 ‘언젠가는 그 소설의 울림이 세상의 한복판에 가 닿는다고 믿는 삶’을 꿈꿨다.
습작시절, 신춘문예 시기가 되면 열병을 앓듯 글을 쓰고 응모를 하고 좌절을 맛보는 시기를 몇 년 간 계속 겪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6년 그녀가 스물 아홉이던 해, 첫 아이를 업은 상태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으며, 1990년대 후반 이후 늘 한국 단편소설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다.
일상과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스타일로 ‘정밀 묘사의 여왕’이란 별칭을 얻으면서 단편 미학을 다듬어온 공로로 동인문학상(1999)·한국일보문학상(2000)·이수문학상(2004)·오영수문학상(2008)을 잇달아 받은 중견작가이다. 그녀의 소설은 지나치게 사소한 일상에 몰두하다 보니 사회에 대한 거시적 입장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 심리와 사물에 대한 미시적 묘사를 전개하면서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곰팡내 나는 쓰레기 더미 속에 숨어 있는 존재의 꽃을 찾아간다’는 1999년 동인문학상 심사평은 여전히 하성란 소설의 개성과 미덕을 잘 말해준다.
대학 동문인 부군과 함께 운영하는 출판기획사에서 일하면서 창작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이 곳은 그녀에게 생긴 첫 작업실이기도 한 셈인데, 그 전에는 부엌과 거실 사이에 상을 하나 펴놓고 새벽녘 텔레비전에서 계속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썼다. 어느 대학 기숙사에 방을 얻어 한 달 동안 글 쓰겠다고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결국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나왔다고 한다. 2009년부터 방송대학TV에서 ‘책을 삼킨 TV’ 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얼마 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작품을 심사하기도 하였다. 현재 살아있고 같이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특히 ‘권여선’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저서로는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웨하스』,『여름의 맛』 장편소설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A』, 사진산문집 『소망, 그 아름다운 힘』(공저) 등이 있다. 최근 동료 여성작가들과 함께 펴낸 9인 소설집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에 단편 「1968년의 만우절」을 수록하였다.
정밀한 묘사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 하성란의 신작 장편 『A』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에 있는 오대양(주)의 공예품 공장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와 가족 · 종업원 등 신도 32명이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긴 채 시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집단 자살의 원인이나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수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오대양 종교집단의 신도 몇 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사건의 의문점들이 얼마간 밝혀지는 듯 보였으나 결국 여러 가지 논의만 무성했을 뿐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집중된 관심과 기대 속에서 계간 『자음과모음』에 2008년 가을호부터 2010년 봄호까지 연재된 『A』는 이 전대미문의 참사인 ‘오대양 사건’을 모티프 삼아 쓰여진 소설이다. 실제로 『A』는 한 시멘트 공장 기숙사에서 24명(여자 21명, 남자 3명)의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자의에 의한 타살로) 사망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 있다. 또한 ‘오대양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처럼 소설 속에서도 이 사건은 전모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과 추측만을 남기고 마무리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미궁에 빠진 사건의 진짜 이유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과 그들의 사연은 모두 작가의 상상에서 탄생된 허구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이 모두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하성란 작가 특유의 치밀한 구성과 섬세한 묘사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도 많은 데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얽히고설킨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터라 자칫 복잡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작가는 단 한 치의 오류나 불필요한 설명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탄탄한 플롯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그 덕에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속도감과 긴장감을 철저히 유지한다.
멈출 수 없는 미로 같은 이야기, 가슴 서늘한 진실을 보여주다!
서울에서는 공예 공장을, 한 시골 마을에서는 시멘트 공장을 운영하며 단기간에 급성장한 ‘신신양회’. 시멘트 공장에는 오랜 세월 함께 일하고 살아온 여덟 명의 여자가 있다. 신신양회를 만든 장본인이자 사장인 여자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매처럼 지내는 일곱 명의 여자. 밝고 유쾌하며 당당한 그녀들은 미혼인 채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공장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어느 날 또 다른 공장 직원들과 함께 모두 교살된다. 하지만 그들의 시신에는 저항의 흔적이 없다. 이는 그녀들이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뜻. 바람처럼 자유롭고 공기처럼 가벼워 보였던 그녀들이 왜 그러한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참혹한 사건의 진실은, 그들의 자녀들이 사건 이후 3년 뒤 재회하여 다시 예전의 공동체 생활을 꾸리고 신신양회를 재건하면서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나’의 기억을 통해, 그리고 신신양회 사건의 진실을 조사하던 신문기자 최영주를 통해서다. 신신양회가 번창하면서 공동체가 점차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예전의 신신양회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갔던 때의 일을 떠올린다. 예전의 신신양회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고 어쩌다가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무슨 수단을 동원했는지가 드러난다.
그 진실을 향해 깊숙이 들어갈수록 독자는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비밀이 단지 그들만의 사연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이야기이며,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탐욕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어느 순간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가.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이, 그리고 소설 밖 우리들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주홍 글자 A
‘신신양회의 아이들‘이 재회하여 공동체 생활을 되찾은 뒤 맨 처음 한 일은 건강하고 현명하며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남자들을 골라 (발신인란에 주홍 글자 A를 인쇄해서)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은 채 버리지만 간혹 내용을 확인하는 이들도 있다. 편지를 보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남자에게 접근하여 가까워진 뒤 관계를 맺고 임신하고는 사라진다. 그들의 엄마들이 결혼하지 않은 채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며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날 때면 자유로이 사랑을 나눈 것처럼, 그들 역시 (약간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임신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데 ’남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편으로서의 남자가 아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제도 밖의 관계. 오로지 여자와 남자로서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자신에게 건강하고 현명하고 강한 아이를 낳게 해줄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꿈꾸는 사랑과 가족, 공동체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하나는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며 사는 여자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적대시하는 편견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끝내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그들의 기본적인 욕망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