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소개
고단한 삶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포착하며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강지영 작가의 장편소설 『하품은 맛있다』가 ON 시리즈 서른두 번째 이야기로 출간되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두 여자의 일상이 꿈속에서 얽히며, 상처와 욕망으로 얼룩진 비밀을 향해가는 이 소설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멈출 수 없는 몰입감으로 독자 여러분의 시간을 빼앗을 예정이다.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소설의 세계 속에서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
강지영
장편소설 『신문물검역소』 『심여사는 킬러』 『엘자의 하인』 『하품은 맛있다』 『프랑켄슈타인 가족』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 『페로몬 부티크』 『살인자의 쇼핑몰1, 2』 『굿 드라이버』 『죽지 않고 어른이 되는 법』 『인간보다 인간적인』 『거의 황홀한 순간』, 소설집 『굿바이 파라다이스』 『개들이 식사할 시간』 『살인자의 쇼핑목록』을 출
■■■ 차례
하품은 맛있다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불행은 물과 같아서 언제나 낮은 곳에 고이기 마련이었다. (16쪽)
“드디어 악몽이 나를 집어삼켰다. 깨어 있어도 악몽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기록은 무의미하다.” (74쪽)
“다운이의 현실이 악몽이 되었다면, 그건 너의 꿈도 더 이상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얘기가 되겠지.” (74쪽)
“현재의 너는 단아름다운의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과거의 그 애는 네 미래를 바꿀 수 있어.” (129쪽)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어쩌면 사신의 눈에 덮어놓은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일지 몰랐다. (146쪽)
과거의 내가 죽어버린다면, 나는 다운의 몸에 갇힌 채 두 번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건지 몰랐다. (146쪽)
우리 넷은 퍽 닮은 사람들이었다. 뒤늦게 깨닫고, 뒤늦게 반성하는 열등반 어른들. 포장은 다르지만 뜯어보면 맛이 같은 문구점 백 원짜리 초콜릿 같은 우리들이었다. (156쪽)
관계란 기차 레일처럼 어느 한 지점이 어긋나버리면 아무리 먼 길이 남아 있어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소녀들의 행복한 시간이 고인 스노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어쩌면 모든 것의 시작이 아주 작은 눈덩이 하나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63쪽)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세탁기 한 대씩은 있어.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치 오염을 들고 주말에 교회나 절에 가서 깨끗하게 빨아달라고 기도를 하지. 일기를 쓰기도 하고, 봉사를 하기도 해. 하지만 거기서 해결되지 않는 오염은 특별한 곳에 가서 드라이클리닝을 해줘야 하지.” (174쪽)
보통의 꿈에는 의식이 개입하지 못한다. 철저히 관찰자가 되거나 주어진 상황을 따라가며 수동적인 행위를 할 뿐이다. 하지만 강력한 마취제를 맞은 다운은 지금, 루시드 드림을 꾸고 있었다. 마치 깨어 있는 것처럼 꿈속의 상황을 통제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으며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게 된 거였다. (186쪽)
상처를 보란 듯이 드러내는 사람은 항상 복수를 꿈꾸기 마련이야. 그냥 덮어두면 아물 텐데 혹시나 잊어버릴까 봐 자꾸 자기 살을 도려내고 상처에 상처를 보태잖아. (199쪽)
이젠 꿈을 꾸는 것조차도 꿈이 되었다. (216쪽)
둘을 향한 나의 동경은 오해에 가까웠다. 마치 어른이 될 때까지 상상만으로 맛을 단정 지어버린 치즈케이크처럼 말이다. (……) 나는 십수 년 동안 치즈케이크에 대한 환상을 품어왔다. 물론 그사이 몇 번이나 치즈케이크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 하지만 나는 제과점에 갈 때마다 케이크 진열대를 외면하고 슈크림이나 페이스트리를 계산대로 가져갔다. 맛있는 케이크의 한 종류일 거라는 애초의 상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없으면 안 되는 궁극의 요리로 진화해갔고, 종래에는 만에 하나 맛이 없을까 봐 맛볼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갔다. (221쪽)
나뭇잎에서 몸을 빼낸 거미는 몸을 돌려 자신이 나온 구멍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참깨만 한 새끼 거미 한 마리가 구멍을 통과했다. 운 좋게 무덤을 탈출한 어미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어미가 아래턱을 벌리며 새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 새끼를 먹어치우고 뒤따라 나온 다음 새끼에게 아래턱을 벌렸다. 어미는 새끼가 나오는 족족 쉬지 않고 턱을 움직여 여린 살점을 집어삼켰다. 새끼를 모조리 먹어 치운 어미는 아름다운 여덟 개의 다리를 하느작거리며 유유히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230쪽)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다. 어긋난 패턴과 간격이 일정치 않은 재봉선, 불균형한 셰이프를 가진, 열여덟 살 중국 여공의 미숙한 손길에서 탄생한 이백 위안짜리 가짜 샤넬백들이었다. (242쪽)
자연에서 누리는 자유는 생명을 담보로 하지만, 우리 안의 구속은 안락한 여생을 약속한다. (245쪽)
내게 불행은 척추를 공유한 샴쌍둥이처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일부분이었다. 막연히 죽음이 두렵긴 했지만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254쪽)
우리는 경쟁하듯 하품을 나누며 깨어날 기약 없는 잠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영원한 밤이 시작되었다. (267쪽)
살해 현장을 청소하는 가난한 여대생 ‘이경’
여대생 이경은 평범하다. 작은 키, 못생긴 축에 속하는 얼굴,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 쓰러져 입원한 아버지, 병간호로 집에 잘 오지 않는 어머니……. 이경이 가졌거나 그녀 주위의 것들은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 오히려 쿰쿰하고 어둑어둑한 것뿐이다. 아, 특별한 게 하나 있다. 그녀의 아르바이트. 이경은 특수청소 업체에서 일한다. 자살했거나 살해당한 사람들의 집에서 핏자국을 지우고 시체를 거두며 돈을 번다. 이십대 초반의 청춘을 누구보다 피폐하게 그려나가는 중이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욕조에서 죽은 여자의 집을 청소했고, 피가 온 천지에 튄 욕실과 다르게 환하고 단정하게 꾸며진 집 안을 살펴보며 약간의 기묘함을 느꼈을 뿐이다.
원룸에 어울리지 않게 가구와 침구 모두 견고하고 고급스러웠다. 침대 앞에 얌전히 벗어놓은 양털 슬리퍼, 순백의 이불, 책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욤 뮈소와 알랭 드 보통의 컬렉션들, 헤벌어진 샤넬 퀼팅백, 구둣발에 뭉개진 코랄 컬러 립스틱이 여자의 취향을 설명했다. 남 사장이 방바닥에 구겨놓은 아이보리색 러그를 들어 올렸다. 한가운데에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12쪽)
여자의 침대 아래에는 수십 개의 스노볼이 있었고, 이상하게 하나의 스노볼에 끌림을 느낀 이경은 야구공만 한 스노볼 하나를 챙긴다. 그 속에는 두 소녀가 하나의 목도리를 두른 채 잠들어 있었고, 흔들면 눈이 내리듯 새하얀 입자가 날렸다.
그 집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날, 이경은 이상한 꿈을 꾼다. 꿈속의 이경은 고급스러운 집에 살았고, 늘씬하고 빼어난 외모를 갖췄으며, 세련되고 우아한 엄마를 가졌다.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이었다.
학벌 미모 재력 모두 갖춘 연예인 지망생 ‘다운’
여대생 다운은 화려하다. 큰 키와 마른 몸매, 손바닥만 한 얼굴과 도자기처럼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졌다. 명문대에 재학 중이며, 그녀의 장래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재력가 부모도 있다. 인기가 많아 이성의 연락이 끊이지 않고, 연예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미래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친구도 있다. 모자랄 것 하나 없이 완벽한, 밝고 상쾌한 기운만을 가진 듯하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피부 관리와 쇼핑을 위해 집을 나서던 그녀는 자신의 엄마에게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한다.
“내가 키 작고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되는 꿈. 웬 아저씨들이랑 어딘가 몰려가서 억세게 청소를 했어. 왜 예전에 우리 잠원동 살 때 사거리 행운아파트 기억나? 베란다에서 그 아파트 103동이 보이는 집이었어. 방 안엔 죽은 개가 있고, 더러운 이불에 핏자국도 보였어. 설거지거리도 산더미 같았는데,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서 맨손으로 다 했다니까.” (27~28쪽)
달콤한 꿈을 꾸던 이경은 꿈속에서 별안간 정신을 차렸다. 다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하는 악몽은 자신의 일상이었다. 억척스러운 이경의 현실은 다운에게 있어 끔찍한 악몽이 되고, 윤이 나게 빛나는 다운의 현실은 이경이 잠들면 펼쳐지는 깨고 싶지 않은 꿈인 것이다. 이경은 꿈을 통해 다운의 과거를, 다운은 이경의 미래를 체험하고 있었다.
오직 꿈속에서 이뤄지는 전혀 다른 두 여자의 수상한 동거
며칠 뒤 출근한 이경은 사무실에서 누군가의 주민등록증을 발견한다. 볼록한 이마, 크고 청신한 이목구비, 윤기 흐르는 긴 생머리……. 낯익은 그 얼굴은 다운이었다. 캐비닛에는 다운의 일기가 적힌 스프링 노트가 있었고, 그것은 매일매일 새로 적히는 내용이 존재했다. 다운의 꿈에 등장한 이경의 이야기도 있었다. 문제는, 이것들이 모두 얼마 전 청소를 다녀온 여자의 유품이라는 것. 그러니까 죽은 여자가 이경의 꿈에 나온 거였고, 놀랍게도 그녀의 일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새로 적히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의 집 청소 의뢰를 받은 건 임 대리라는 남자였는데, 그는 이경의 꿈에, 그러니까 다운의 현실에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다운의 친구의 애인이자 다운이 몸담았던 연예기획사 직원이었다. 그리고 이경은 청소 업체 사장으로부터 임 대리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과연 다운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고, 임 대리는 이 일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이경의 꿈에 다운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다운의 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경은 무의식을 넘어 의식마저 통제되는 상황에 이르고, 이 꿈결 같은 현실이 사실은 모두 설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두 여자의 얽힘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이 판의 설계자는 누구일지, 그는 결국 무엇을 얻고자 이 일을 벌인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고요한 듯 보이는 스펙터클 속으로 진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