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훔친 여자

저자1 설송아
저자2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일 2023-05-31
분야 한국소설
정가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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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이제 과거와 같은 추운 겨울은 없다.

따뜻한 봄과 같은 미래만 있을 뿐!

북한에서 인생 2회차 살아가기

 

『국경을 넘는 그림자』 에 단편소설 「진옥이」를 발표한 이후 북한의 생활상과 여성들의 활약을 소설 속에서 주요하게 다뤄온 설송아의 장편소설 『태양을 훔친 여자』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998년부터 2015년까지의 북한 사회의 모습과 생활상을 낱낱이 그려내고, 그 안에서 새롭게 도약하는 여성 자본가들의 모습을 ‘인생 2회차’라는 흥미로운 키워드를 통해 펼쳐낸다. 또한 저자가 “소설에 나오는 개인 주유소와 항생제 제조 등 다양하게 펼쳐지는 사업들은 내가 직접 북한에서 살면서 몸으로 부딪쳤던, 살아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가 북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제로 행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담은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여성이 경제 주체로 성장하는 일은 아픔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여성들의 저력으로 북한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시장경쟁의 파도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는 주인공 봄순의 모습은 국가가 생산한 여성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성(城)을 찾아가고 있는 북한 여성들의 강인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 책 속으로

봄순의 삶이 따스했던 적은 없었다. 항상 추웠다. 부모와 두 자식을 다 잃었고, 남편에게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당에 충성하며 화학공장 설계실을 매일 다녔지만 결국 아이의 약 하나 못 구하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핏물이 눈앞을 가렸지만 아스팔트 바닥의 차가움이 더 살벌하게 느껴졌다.

봄순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분명 그랬다.

_18

 

주유소 수익이 고조에 오를 무렵, 봄순은 덜컥 임신을 했다. 아, 드디어! 봄순은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지난 삶을 떠올려보니 그때도 딱 이때쯤 임신이 되었었다. 그때 철욱은 처음으로 봄순에게 조그만 선물을 주었고, 시어머니도 먹을 것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이는 두 달 뒤에 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칠 년 동안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이 아이는 절대 유산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럼 칠 년 뒤에 미애가 태어나더라도 언니나 오빠가 굳건히 미애를 지키겠지.’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봄순은 이제야 자신의 삶에 봄이 오는가 싶었다.

_73

 

온돌 아랫목에 비닐 박막을 깔고 그 위에 나무틀로 만든 건조설비가 놓였다. 봄순은 세척한 덩어리를 나무틀 위에 쏟아부었다.

덩어리를 툭툭 쳐서 골고루 펴고는 한 시간가량 나무주걱으로 쉬지 않고 저었다. 그러자 보드라운 하얀 분말이 만들어졌다. 다시 빽빽한 여과망으로 분말을 걸렀다. 카나마이신 원료 분말이 수북이 쌓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분말 같았다. 성공이었다.

“아버지, 성공이에요!”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젊은 날의 활기가 눈동자에 실려 있었다. 오랜만의 기쁨으로 손수건을 꺼내 든 영민이 어느새 눈가를 훔쳤다.

“너는 할 수 있어. 뭐든지 말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감동에 젖어 있었다. 옛날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_117

 

구류장에서 몇 달간 예심을 받을 때는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감옥에 도착하니 엄청났다. 감옥을 둘러싼 담장 높이만 해도 보통 사람 키의 두세 배가 넘었다. 게다가 전기 철조망이 담장 위에 일 미터 높이로 늘어져 있어 영화에서 보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 떠올랐다. 오 미터 간격으로 감시 초소가 있었고, 초소 지붕마다 커다란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무장한 보초병이 구경거리가 생긴 듯 죄수들을 내려다보았다.

찬바람이 불었다. 담장에 써놓은 글들이 소름 끼쳤다. 검은 먹물로 획 하나하나가 톱날 모양으로 그어져 있었는데, 글자가 마치 승냥이가 금방이라도 사람을 씹어 삼킬 듯 이빨을 드러낸 것 같았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였다.

 

도주자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봄순은 등골이 오싹했다.

_164~165

 

“선불할게요. 절반 가격에 팔라요.”

“선불이요?”

봄순은 놀랐다. 이제 막 골재를 세우려는 살림집을 사겠다고?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솔직히 처음 듣는 말이었다. 보통은 살림집 공사가 완전히 끝나고 입사증까지 준비가 되어야 세입자가 사는 것이 절차였다.

“그럼…….”

“제가 선불하면 당신은 자재 비용을 해결해 좋고, 나는 이 아파트가 완공되었을 때 가격이 올라도 지금의 절반 값에 사니까 서로 손해볼 거 없잖아요.”

봄순은 옛날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연료를 살 때, 항생제 농축액을 살 때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해 흥분되었다. 어쩌면 시장은 사람들에게 봄순이 배운 것과 똑같은 수업을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_244

 

시대가 또 한 번 변화하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었다. 또다시 사회가 자본주의 과도기에 진입한 것이었다. 봄순의 야망은 한 단계 더 커졌다.

‘권력을 가져야 한다.’

평범한 돈주는 정부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돼지는 키워서 잡아먹는 게 이 나라의 정치 수법이 아닌가.

봄순은 이제 권력이 절실해졌다. 십만 달러를 가지고 있는 돈주의 위상보다 무일푼 간부의 위상이 아직은 훨씬 안전하고 높음을 알았다. 이는 성분 제도가 사회의 근간을 움직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또 권력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 할 무기라는 것도 깨달았다.

“성분을 개조하자. 이 사회의 성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_267

 

국영철도가 정상화되려면 경제를 완전히 개방하고 해외투자를 끌어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정부로서는 부담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시장의 확장을 장려하고, 국영기업들이 개인 돈주를 끌어들여 나라의 경제를 살리도록 부추겼다. 사회주의도 지키고 국가 경제도 살리고 민심도 챙기려는 전략이었다.

심 봉사가 눈을 뜨듯, 봄순은 번쩍 눈이 뜨였다. ‘철도 마비’라는 커다란 구멍을 들여다보니 황금덩이가 쌓여 있었다. 그것도 평양―신의주행 기차라면 차원이 다르다. 평양은 수뇌부, 신의주는 중국과 마주한 최대 교역 도시다.

‘음, 평양―신의주행 기차라.’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이 봄순의 눈앞에 펼쳐졌다. 철도야말로 미개척지였다. 별의별 장사가 세상을 휩쓸어도 기차만은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아니, 감히 못 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철길을 달리는 ‘봄순의 기차’를 상상했다. 희열이 용솟음쳤다.

_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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