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법이 우리를 봐준다잖아요.”
피할 수도 벌할 수도 없는 그들,
촉법소년을 바라보는 섬뜩한 상상력
네오픽션 ON시리즈 29권으로 범죄 앤솔러지 『촉법소년』이 출간되었다. 이제는 놀랍다 못해 익숙해진 ‘촉법소년 범죄’를 소재로 두고 다섯 명의 작가가 모였다. 『비스킷』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김선미 작가와 뛰어난 반전과 미스터리 서사로 각광받은 『홍학의 자리』의 정해연 작가, 현재 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 참여관으로 재직 중인 홍성호 작가와 교직에서 청소년들을 마주하던 윤자영, 소향 작가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르게 바라보았을 촉법소년의 면면이 바로 이 한 권에 실려 있다.
그 시선을 따라 자연스레 각 단편의 이야기를 읊조리는 인물 역시 달라졌다. 사건의 피해자가 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도 있고 피해자의 부모나 교사 등 주위 사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펼치기도 한다. 그리고 가해자의 목소리를 빌려 독자에게 선연한 공포를 선사하기도 한다. 소설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인물 시점을 활용해 촉법소년과 소년범죄의 실상을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는 점 또한 이 책의 관전 포인트다. 이처럼 촉법소년의 범죄를 다룬 섬찟한 상상력에 감응하며, 촉법소년에 대해 작가들이 던지는 질문을 고민해보는 것 또한 이 작품을 즐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책 내용
앳된 얼굴 뒤에 숨은 악마
당신도 그들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촉법소년은 어떤 모습인가. 또래를 대상으로 가해지는 집단 폭행이나 따돌림처럼 주로 학교 안에서 이뤄지던 촉법소년 범죄는 이제 학교 밖 거리로, 혹은 나의 옆집으로 옮겨오며 점점 성인 범죄에 못지않은 계획성과 잔혹성을 띠며 변모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명제를 얻게 된다. 더 이상 그들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의 범죄로부터 우리 역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
물론 모든 범죄가 그렇듯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두려움을 느끼기 어렵다. 설령 범죄 사건에 연루되더라도 나의 신변을 보호해줄 법이 존재한다는 것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인 범죄와 달리 법은 그들을 벌하지 않는다. 우리가 입을 피해에 법이 안전장치가 되어주기보다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이 불보듯 뻔하다는 얘기다. 그게 촉법소년 범죄가 주는 가장 큰 공포다.
국가가 인정한 피보호자로서의 가해자에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그들에게 부여된 서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다섯 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육만 명의 촉법소년
그들을 조명하는 다섯 편의 소년범죄 이야기
살고 싶다면, 이 침묵을 깨지 말기를
–김선미, 「레퍼토리」
김선미 작가의 「레퍼토리」에는 ‘침묵’에 집착하는 소년 범죄자의 시선을 그린다.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상대는 주인공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여성 피해자뿐이다. 이 여성은 주인공에게 꽤 협조적이다. 덕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맘껏 펼치던 주인공은 침묵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자신이 침묵에 집착하게 된 계기를 털어놓는다. 그릇된 가치관이 만든 확신이 교화되지 않고 레퍼토리처럼 반복되면 어떤 참극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신이 누구든 조용히 해주기를 부탁한다. 이 침묵을 깨고 내 발길을 멈춰 세운다면 다음 타깃은 바로 당신이 될 것이다.
납치 후 펼쳐진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떨칠 수 없는 기시감
–정해연, 「징벌」
정해연 작가의 「징벌」은 이제 막 배우의 꿈을 이룬 진솔의 이야기다. 원하는 작품에 참여하게 된 기분 좋은 날, 진솔은 납치된다. 영문도 모르고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다가 뜻밖의 인물을 마주치며 상황은 전환된다. 언뜻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준비된 반전의 맛은 작가 특유의 레시피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도 충격적인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덤.
“신고할 생각 마. 어차피 우리 촉법소년이거든? 금방 학교로 돌아온다고. 무슨 뜻인지 알지?”
정신과 상담보다 필요한 건
나를 지켜줄 핏불테리어
–홍성호, 「네메시스의 역주(逆走)」
홍성호 작가의 「네메시스의 역주(逆走)」는 제목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 등장한다. 초반부터 법이 아닌 자신의 규율대로 처벌을 집행하는 변호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복수를 하며 왜 그 복수가 시작된 건지는 작품을 끝까지 읽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초반에 등장한 사건을 기준으로 시간을 거슬러 사건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역주(逆走)의 끝에 마주하게 될 결말, 아니 시작을 목도하면 과연 그 복수가 정당한 복수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촉법소년이 무적이기는 한데 증거까지 없으니 완전히 최강 무적이 된 거지. 나를 누가, 어떻게 처벌하겠어. 안 그래?”
뭐든지 OK인 동네,
좌천된 선생과 문제아
–소향, 「OK목장의 혈투」
소향 작가의 「OK목장의 혈투」는 젊은 교사 성진의 이야기다. 불미스러운 일로 시골에 좌천된 성진은 성인 못지않은 덩치의 문제아 이솔에게 온 신경을 빼앗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솔의 문제 행동보다 이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리기 시작하고, 심지어 이솔을 괴롭히는 무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년과 범죄자의 기로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이솔에게 닿아야 할 이야기.
“애들끼리 어울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걔한테 베푼 게 얼만데. 당신이 알기나 해?”
아들의 수상한 죽음을 마주한
아버지의 추적기
–윤자영,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윤자영 작가의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어느 날 윤종석은 자신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매일 배달하며 오가던 길에서, 아들이 죽은 것이다. 울분을 참고 가해자들을 만난 윤종석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경찰 또한 협조적이지 않자 결국 자신이 직접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하는데, 그를 돕겠다는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과거에 묻어둔 비밀이 하나둘 수면 위에 오른다.
“민호야, 너 운전 안 했어. 너 머리 다쳐서 기억이 혼란스러운 거야.”
■■■ 지은이
김선미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9년 제3회 추미스 소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2년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스토리 부문 우수상, 제1회 서치-라이트 공모전 최우수상, 제1회 위즈덤하우스 어린이청소년 판타지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살인자에게』, 청소년 소설 『비스킷』이 있다.
소향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배우며 쓰고 있는 신인 작가다. 2022년 김유정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같은 해 한국콘텐츠진흥원 신진 스토리 작가 공모전에 선정되어 첫 장편소설 『화원귀 문구』를 출간했다. 제7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 『항체의 딜레마』와 『이달의 장르소설 4』 『올해 1학년 3반은 달랐다』 등 여러 앤솔러지에 작품을 실었다. 2023년과 2024년에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 지원 및 발간 지원을 수혜했다.
윤자영
추리소설 쓰는 생물 선생님. 2015년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데뷔했고, 2021년 『교통사고 전문 삼비 탐정』으로 한국추리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이후 『라라제빵소』 『십자도 살인사건』 등을 썼으며, 청소년 소설 『수상한 졸업여행』 『옐로우 큐의 살아있는 해양 박물관』은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됐다. 지금도 즐거운 상상을 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정해연
소심한 O형. 덩치 큰 겁쟁이. 호기심은 많지만 그 호기심이 식는 것도 빠르다. 사람의 저열한 속내나, 진심을 가장한 말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2012년 미스터리 스릴러 『더블』로 데뷔했고 『유괴의 날』 『홍학의 자리』 등 많은 이야기를 써왔다. 독자에게 재미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게 최대 목표이자 관심사이다.
홍성호
2011년 『계간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했고, 2014년 단편소설 「각인」으로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악의의 질량』과 다수의 앤솔러지를 통해 인간 본성을 파헤치는 추리/미스터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현재 의정부지방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 참여관으로 일하고 있다.
■■■ 차례
김선미, 「레퍼토리」
정해연, 「징벌」
홍성호, 「네메시스의 역주(逆走)」
소향, 「OK목장의 혈투」
윤자영,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 책 속에서
“쉿, 조용히 해.”
당신이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내 앞에서는 무조건 조용히 하기 바란다. 고요하고 잔잔한 그래서 아름답기까지 한 침묵을 방해하는 걸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김선미, 「레퍼토리」) (9쪽)
“겨우 이 년? 아줌마는 소년원에서 썩는 게 무슨 호텔에서 룸서비스 받고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나 보네. 이 년도 나한텐 길었어. 원래는 심신미야, 우발적 살인으로 9호 처분 받고 육 개월만 살다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 전에 절도로 보호관찰 받은 이력이 있어서 재수 없게 10호 때려 받은 거야.”
“개 같은 법이네.” (김선미, 「레퍼토리」) (22쪽)
‘버텨야 해.’
그렇게 생각한 것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철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에 진솔은 겁에 질렸다. 또다시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 아이들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우선 저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야 했다. (정해연, 「징벌」) (54쪽)
“논란 끝에 법은 통과됐지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 애의 인생을 망가뜨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인권 문제가…….”
집행실을 나가려던 최연희가 태성수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최연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말아요, 우리는 이제 가해자의 인권 따위를 우위에 두지 않기로 했어요.” (정해연, 「징벌」) (65~66쪽)
“너도 촉법소년이라서 이번 사건으로 형사처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네.”
“그래. 하루가 많이 다친 것도 알아? 장애를 얻어서 평생 뛰지도 못하고, 걸을 때도 몹시 불편하게 걸어야 한 대. 그리고 장애에 대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대.”
“네, 요즘은 학교에도 안 나오던데요. 하루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학교에 다 퍼졌어요.”
“지금은 하루에 대한 감정이 어떠니?”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하나…….” (홍성호, 「네메시스의 역주(逆走)」) (81쪽)
도무지 믿기지 않는 내용이어서 두 번을 듣고 난 뒤에야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자 뒤늦은 전율이 찾아왔다.
예린의 눈에 눈물 대신 불이 일었다.
“김하루, 내가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홍성호, 「네메시스의 역주(逆走)」) (99쪽)
세 사람이 한 시간여를 씨름하니 이솔 눈에서 독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마침내 이솔이 진정하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왔다. 나는 한 여자애를 붙잡고 괜찮냐고 물었다. 여자애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솔이 오빠 화났을 때만 빼면 착해요.” (소향, 「OK목장의 혈투」) (119쪽)
“쟤네 누구니? 아는 애들이야?”
“친한 형들이에요.”
“뭐? 근데 왜 때려?”
“놀다가 장난으로 그런 거예요. 평소엔 잘해줘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쟤들 어느 학교 누구야? 이름 말해.”
“귀찮게 하지 마요. 자꾸 간섭하면 저 학교 안 갈 거예요.” (소향, 「OK목장의 혈투」) (137쪽)
“여보세요?”
“윤민호 씨 아버지 되시나요?”
아들이 배달을 나간 지 삼십 분이 지났다. 이미 돌아왔어야 했다.
“네, 제가 윤민호 아버지 윤종석입니다만…….”
“교통사고예요.” (윤자영,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169~170쪽)
“교통사고입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말이 들렸을 때, 나는 ‘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나니 아들놈은 내 차를 운전하여 접촉 사고를 벌써 몇 번을 냈다. 처음에는 수리비를 물어주고 아들의 용서를 대신 빌었지만 이제 점차 지쳐갔다.
아들의 범죄로 학교에 불려 가 사죄하고 강제 전학을 가야 했다. 내 머리도 점차 내성이 생기는 건지 나는 뻔뻔해졌다. (윤자영, 「그는 선을 넘지 않았다」)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