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20
차고 단단한 슬픔의 파랑, 다정한 한 줄기 빛 노랑
그렇게 완성된 따뜻한 슬픔의 색 초록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스무 번째 안내서. 201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단정하게 그려가고 있는 임선우의 두 번째 소설집이 출간됐다. 엉뚱한 환상을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녹여내는 임선우만의 마법이 또다시 펼쳐지는 순간이다. 『초록은 어디에나』에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놓인 갖은 초록의 장면이 담겼다. 색도 온도도 모두 다른 저마다의 슬픔과 손길과 눈빛과 관계가 무심한 듯 조화를 이루며 ‘이상한 현실’에 안정을 부여한다. 별스러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워지는 임선우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 어떤 모습과 감정도 이해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을 획득한다.
■■■ 출판사 리뷰
비로소 물을 찾은 고래와 사막으로 돌아온 낙타,
상실과 결핍을 메우는 만남과 서로에의 진입
「초록 고래가 있는 방」은 두드림과 응답으로 서로의 넘나듦이 이루어지는 소설이다. 만남과 교감이란 보편적 키워드가 떠오르겠지만 이것이 범상하게 펼쳐질 리 없다. 작가는 아파트 누수로 인해 윗집 문을 두드리는 여자의 앞에 거대한 낙타를 등장시킨다. 말도 하고 곤란해도 하고 협상도 하는 낙타를. 조금은 당황했지만 누수공사를 위해 자연스럽게 낙타를 집에 들이는 여자처럼, 독자는 어느새 단봉낙타 한 마리를 마음속 ‘그럴 수도 있지’ 방에 슬며시 들이게 된다.
“늑대 인간이랑 비슷하게 낙타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 네, 보름달이랑은 상관없지만. (……) 태어날 때부터 낙타 인간이었나요? 아니요. 사 년 전에 처음 변신한 뒤로 가끔 이래요. (……) 처음에는 덩치가 워낙 크고 사족보행이라 힘들었는데, 이제는 하고많은 동물 중 낙타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낙타는 무엇이든 잘 버티는 동물이니까. 낙타가 되면 무엇이든 잘 버티게 되나요? (……)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낙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21쪽)
슬픈 사연으로 모습이 변한 건 낙타만이 아니다. 실패를 겪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를 술독에 빠트리고 타인으로부터 격리한 여자는, 자처해 갇힌 방에 낙타를 들이며 희한한 위로를 받는다. 자신을 미워하던 초록 고래는 그렇게 낙타의 부름으로 느리게 헤엄치기 시작한다. 누수가 생긴 틈은 메워질 것이고, 고래는 아니 여자는 비로소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을 것이다.
뜨겁게 흐르지 못해 차고 단단해진
어느 슬픔이란 물질에 관하여
「사려 깊은 밤, 푸른 돌」에는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대신 돌을 토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점액질로 둘러싸인 동그랗고 푸른 돌멩이엔 불안과 아픔이 응축돼 있고, 그것은 전염성을 지녀 주위의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슬픔을 토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돌멩이를 병에 넣어 밀봉하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복수를 위해 전해진 돌이 예상치 못한 관계의 점액질이 된다.
“우는 동안에는 이상하리만치 속이 시원했다고 했다. 곪았던 게 다 터져 나오는 느낌이랄까. (……) 희조의 슬픔은 희조 내면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뜻밖의 방식으로 분출된 듯했다. 그런 식으로 돌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중 희조가 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내가 지금 느끼는 슬픔은 내 것이 아닌가? 네가 슬퍼지는 순간부터는 네 슬픔이지. 내가 대답했다.” (72쪽)
사실 여자가 돌을 토하게 된 건, 곁에 있던 이의 상실 때문이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헛된 희망을 품던 마음이, 그 고통이 어느새 차고 단단한 돌이 된 것. 그것을 토하면 슬픔은 멀끔하게 사라져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자가 돌을 토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희조의 얘기를 듣다가 돌을 뱉었던 날, 나는 희조의 슬픔에 조금도 가닿을 수 없었다. 희조의 얘기를 들으며 차올랐던 감정은 돌을 토하는 것과 동시에 차게 식어버렸다. (……) 따뜻함이나 눈물, 헤아림 같은 것은 산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돌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것일지도. 이제 와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가능할까?” (90쪽)
슬픔에 가닿고 싶은 마음.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은 차갑게 굳어버린 돌을 아니 여자를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녹아 흘러내리는 푸른 돌을 기다리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여름, 쪽지에 적힌 하얀 기적
갑자기 목도한 비현실적인 현실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는 무려 금괴를 밀수하는 담합에서 시작한다. 썩 은밀하지도 그리 음험하지도 않다. 싱겁게 성공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이상한 불법행위가 순식간에 우리를 오사카 한복판으로 이끈다. 사실 두 여자는 밀수만을 위해 일본으로 온 건 아니었다. 각자 찾고 싶은 게 있었다. 물론 찾지 못한 채, 찾을 수 없음을 확인한 채 발길을 돌리지만 그들에겐 서로가 있다. “남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다며 누군가를 저주하라고 부추기는 영하 언니가, “삶에서 좋은 것은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내게 말을 걸어준” 유일한 그녀를 너무나 좋아하는 주영이.
둘은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상처와 단념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올 뻔하지만 공항에서 짧은 기적이 펼쳐지며 이들의 새로운 게이트를 암시한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지만 어쩐지 행복한 엔딩임을 믿게 한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는 영하 언니와 나를 발견했다.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둘은 멈춰 서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중 그들이 이틀 전의 나와 영하 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나는 지금이야말로 오키나와에서 눈이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우리들의 짧은 기적.” (133~134쪽)
다정한 슬픔들과 무심한 다독임
그 속에서 피어날 작은 기적을 꿈꾸며
『초록은 어디에나』의 해설을 쓴 박혜진 평론가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만남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단순하거나 관습화된 만남이 아닌, “편협한 의미로서의 만남”이 아닌 현실의 벽과 개연성이란 논리에 가로막히지 않는 만남. “우리의 잠긴 생각을 열어젖”히는 이 새로운 형태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변화에 의연해지며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임선우가 주관하는 만남을 연결 짓는 지점마다 기적이 펼쳐질 게이트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어디에나 있는 초록처럼, 기적 역시 어디에나 있을지도 모르니까.
■■■ 지은이
임선우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유령의 마음으로』를 썼다.
■■■ 차례
소설 초록 고래가 있는 방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에세이 초록은 어디에나
해설 이 만남은 꿈이 아니다 ― 박혜진
■■■ 책 속에서
하루하루 잘 살아가다가도 완전한 어둠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고, 어두운 생각에 몰두해서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고, 그런 날들이 길어지다 보면 낙타가 되어버린다고 유미 씨는 말했다. (「초록 고래가 있는 방」, 41쪽)
낙타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물 냄새도 맡을 수 있는 동물이잖아요. 먼 곳에 있는 물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막막해 보이는 사막을 계속해서 걸어나갈 수 있는 거고요. 그런데 몇 킬로미터 내에도 물이 없을 때, 물의 그림자조차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을 때 낙타가 무엇을 하는지 아세요? (……) 똑같이 걷는 겁니다. 한 걸음씩. (「초록 고래가 있는 방」, 43쪽)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상처로부터 훌쩍 멀어져 있을 때가 있어요. 이것은 유미 씨의 말. 그 말이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유미 씨와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가늠해보던 중 유미 씨가 덧붙였다. 적어도 도연 씨 손은 좀 더 부드러워질걸요. 마음이 편안해지면 청소도 덜하게 될 테니까. (「초록 고래가 있는 방」, 44쪽)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의 마음이 그토록 무수히 찢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낱낱이 다른 천 개의 슬픔과 만 개의 슬픔이 생겨났다는 뜻이라고. (「초록 고래가 있는 방」, 46쪽)
평소보다 강하게 목구멍이 조여왔고,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나는 손바닥 위로 돌 한 덩이를 토해냈다. 갓 태어난 슬픔은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도 새파랬다.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52쪽)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을 희조는 부러워했다. 그들의 기다림에는 언제나 끝이 있었으니까.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83쪽)
대체 왜 슬픔을 자처하려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선영이 물었다. 세상에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오백 일 넘게 돌을 뱉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86쪽)
그물무늬비단뱀이 사람 한 명을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보름이야. 보름 동안 연락이 없으면 네가 알던 영하는 비단뱀한테 잡아먹혔다고 생각해.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89쪽)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기적의 다른 말이었다.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110쪽)
어느 순간 지하철 안으로는 초저녁 햇빛이 쏟아졌다. 고개를 들자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유리창이 금빛으로 물든 다정한 건물들. 이상하지, 이럴 때면 도시는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는 농담 같았다.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115쪽)
남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워하게 된대. 말도 안 되는 말 같다가도, 곰곰 생각하다 보면 맞는 말이었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116~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