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60호를 맞는 계간 『자음과모음』봄호에서는 한 해의 시작을 맞아 고민한 미래의 모습을 ‘2050 봄’이란 이름으로 담았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인류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예정된 절망을 바꿀 수 없다고도 한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상승하는 중이며 수확되는 작물과 어종은 자꾸만 한계선을 끌어올린다. 인류가 결국 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시각각 목격되는 전례 없는 사건들은 위기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2020년 봄, 문학의 범주에서 미래를 예측(크리티카 기획 ‘예상 비평―미래의 책’)했다면, 이번엔 기후, 교육, 법 등 여러 분야로 확장시켜 나름의 퓨처링Futuring, 미래 진단법을 시도해보았다. 이외에도 메타비평・시・단편소설・#시소・리뷰를 변함없이 담았으며, 이번 호부터 새로이 실리는 에세이 지면을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 출판사 리뷰
극도로 사악한 문제 앞에서 과감하게 그려보는 친밀한 미래들
‘2024 봄’에 내다본 ‘2050 봄’에 관하여
60호를 맞는 계간 『자음과모음』봄호에서는 한 해의 첫발을 내딛는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봤다. 이른바 ‘2050 봄’. 우리 사회를 이루는 영역마다의 근미래를 그려보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인류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예정된 절망을 바꿀 수 없다고도 한다. 지구의 온도는 점점 상승하는 중이며 수확되는 작물과 어종은 자꾸만 한계선을 끌어올린다. 인류가 결국 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시각각 목격되는 전례 없는 사건들은 위기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현재의 암울함이 짙어질수록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커질 수밖에 없고, 이는 우리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 것이다. 이에 두려움의 실체, 미래를 현재로 데려와 펼쳐보는 건 현시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단 매뉴얼이라고 판단했다. 반드시 2050년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지만 대략 한 세대 뒤쯤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였고 각양각색의 글이 도착했다.
다양한 인문학 담론을 활발하게 개진해나가고 있는 김운하는 기후 위기를 ‘사악한 문제’, 그것도 ‘빌어먹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극도로 사악한 문제’로 언급하면서 지금 우리가 2050년을 전망할 때 어떤 고민들이 필요한지 역설했다. 현직 교사 김진우는 최근 여러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 교육 현장을 전망했다. 짐짓 이상적인 교육의 미래를 그리는 듯도 보이지만 근본적인 것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는 2050년의 풍경이 서늘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전방위적인 평론 활동을 하고 있는 나원영은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문화 미래를 다루었다. 종횡무진 뒤범벅되는 문화적 “혼성 모의”가 익숙하고도 낯선 “기이한 기시감”을 만들어낼 때 미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나 있을지, 글을 읽으며 같이 함께 고민해보길 바란다. 한국 사회에서 미래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구의 문제 그리고 지역, 공동체에 관해서 마을활동가 노영권의 시선을 빌려왔다. 2050년 식량생산지구가 된 전북의 진안에서 카페를 경영하는 ‘우진’이 우리에게 지역 공동체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글 속에 존재하는 우진을 대신해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할 문제들이다. 소설가 문지혁에게 물었다. “앞으로 책은 어떻게 될까요?” 글 속에서 마지막 종이책을 낸 작가가 북 토크에서 몇 안 되는 청중을 향해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지면이 아닌 화면의 책만이 남아도 여전히 그것은 책일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역시 우리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박한희 변호사가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법’의 문제를 다양한 사례로 풀어주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동성혼이 법제화된 시대에 로봇은 어떤 지위와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상상이지만 어쩌면 곧 당도할 현실일지 모를 이야기를 흥미롭게 담고 있다.
한국문학 가이드북을 통한 ‘작품으로서의 희곡 읽기’
각자 흐르면서도 공명하는 메타비평
한국문학 가이드북에서는 소설, 시, 에세이에 이어 ‘희곡’을 다뤘다. 양근애 평론가의 말마따나 앞선 장르들과 달리 “희곡을 읽는 일은 낯설고 때로는 어색하다.” 왜 그럴까. 희곡이 무대 상연을 위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라는 쉬운 대답을 넘어 필자는 희곡 역시 단독적인 ‘작품’임을 강조하면서 희곡 읽기로 향하는 길을 무척이나 자세하게 ‘안내’한다.
메타비평 지면은 강동호·김대성 평론가가 채웠다. 강동호 평론가는 최근 비평장에서 강조되는 ‘대화’에 관해 알 수 없는 ‘분열’을 느꼈다고 고백하면서 그것이 비평의 ‘감정’과 결부되어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진짜’ 비평은 제도 비평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가 결국 심문해야 하는 건 누구일지 지적한다. 김대성 평론가는 지난 호 『자음과모음』의 크리티카 주제였던 ‘안전감’에 관해 이어주었다.
그는 안전감에 대해 “장르에 대한 분석이나 엄밀한 이론 접근보다는 용해된 사회적 감정이 어떠한 궤적을 그려왔는지를 쫓을 때에만 포착할 수 있는 것에 가깝다”고 쓰고 있다. 특히 ‘바깥으로 나아가며 머물기’라고 일컬을 수 있는 그의 문학 모임을 통한 비평 실천은, 앞서 강동호 평론가의 글에 등장하는 ‘어항’의 비유와도 공명하는 듯해서 꼭 함께 놓고 읽어보았으면 한다.
한결 더 친근한 분위기로 다정해진 #시소
책을 초과해 읽는 새삼스러운 즐거움 ‘리뷰’
#시소에서는 지난 계절의 시에 대해 최선교-하혁진 평론가가, 소설에 대해 노태훈-황예인 평론가가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시의 지면에서는 동갑내기 평론가 최선교-하혁진의 편안함과 친근감이 돋보여 해당 지면에 특화된 이야기가 되었다. 이질적 대화에서 오는 긴장감도 흥미롭지만 친근한 대화가 주는 신뢰와 다정함이 독자로 하여금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는 점도 분명해 보인다.
리뷰에서는 김영임・김주원・박다솜・박하빈・진기환 다섯 명의 평론가를 통해 세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소설을 읽을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때로는 그 책을 초과해서 읽는 일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게 한다. 다룬 작품은 황유원의 『하얀 사슴 연못』, 박세미의 『오늘 사회 발코니』,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 장진영의 『치치새가 사는 숲』, 김나현의 『래빗 인 더 홀』이다.
지면을 통해 처음 세상에 나온 시와 소설들
신설된 에세이 코너를 통해 확장할 대화들
시와 단편소설 역시 변함없이 지면에 담겼다. 김보나・김이듬・민구・양안다・차현준・한여진 시인이 두 편씩의 시를 발표하였고, 김혜진・서윤빈・서장원・신조하 소설가가 각 한 편의 소설로 독자들을 만난다.
이번 봄호부터는 에세이가 실린다. 에세이야말로 자신과 나누는 가장 내밀한 대화인 만큼, 대화와 연결을 골자 삼는 우리 새로운 『자음과모음』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소설가 안담의 ‘상황과 이야기’와 작가 임지은의 ‘물건들’을 독자에게 전한다. 앞으로도 더 다양한 대화로서의 에세이를 기대해주시길 바란다.
지은이 | 자음과모음 출판사 |
차례 | 머리글
노태훈
크리티카 │ 2050 봄 김운하 빌어먹을 사악한 문제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 김진우 2050년 김 선생의 하루 나원영 미래는 상대적 개념 2―주인 없는 미래 노영권 2050년 대한민국 4일 문지혁 멸종과 생존 박한희 차별받는 로봇, 평등을 위한 질문
한국문학 가이드북 양근애 ‘구멍 뚫린 텍스트’의 비밀
시 김보나 눈송이를 위한 자장가 외 1편 김이듬 인사하러 왔어 외 1편 민구 오보 외 1편 양안다 백치와 드릴 외 1편 차현준 DDP 외 1편 한여진 터널 지나기 외 1편
단편소설 김혜진 우연의 직조 서윤빈 게 서장원 리틀 프라이드 신조하 노인의 전쟁
메타비평 강동호 비평의 감정―‘조금도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은 어떻게 가능할까 김대성 투명하게 끈질긴 힘―‘안전감’에 머물지 않고 불안으로 나아간 자리
에세이 안담 월드컵공원 못 가는 이야기 임지은 아름다움에는 더 많은 것이 속해 있어
#시소 최선교 하혁진 흔적으로부터 노태훈 황예인 겁쟁이의 모험과 외톨이의 놀이
리뷰 김영임 “눈부신 슬픔” 김주원 발코니 시학의 탄생 박다솜 저성장 시대의 우울과 향기와 유머 박하빈 만약 사랑이 죄라면 진기환 우연과 애도, 그리고 글쓰기 |
책 속에서 | 아미티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코리브르, 2021)에서 상상력의 문제를 제기한바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정서이며, 예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정동의 역학이다. 과학적 사실들이나 불길한 예측들로 경각심과 윤리적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 창작의 근본이 ‘무엇’에 관해서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있듯이, 대중의 역량과 실천, 생태주의적 미래에 관한 정치적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른 방식의 미학적 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_김운하, 「빌어먹을 사악한 문제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
기록되고 보존된 시간을 유동적으로 풀어헤쳐 뒤적이는 이런 실천에는 여전히 선형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대조 행위가 숨어들어 있다. 답답한 체계 안쪽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키우고자 과거 속에 잊히거나 묻힌 가능성을 발굴해 영영 잃어버릴 뻔한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 현재의 땔감으로 사용하고자 곱게 미분한 과거에서 아무 시기나 무작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모사하고 모의한 뒤 그 출력물을 곧바로 레트로로 입력해 돌려대면서 시간은 기어이 구분 불가능할 정도의 곤죽이 되어버렸고, 그 반죽을 두꺼운 막으로 제 안팎에 처바르는 2020년대의 웹 속에서 우리가 겪는 시간 감각은 점차 무뎌진다. _나원영, 「미래는 상대적 개념 2—주인 없는 미래」
사건의 주범들은 체포되어 전 국민의 엄청난 비난 속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았고 주범들의 가족에게 테러가 벌어졌다. 분노는 사그라들었고, 시민들은 안전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는 생존의 문제임을 깨달은 것이다. 시민들은 안전하고 건강한 삶, 자유롭고도 고립되지 않는 개인들의 사회, 사람, 자연, 기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시장경제, 지역사회 공존과 발전을 위한 분권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권에 표를 던졌다. 마침내 2050년 대한민국은 블랙아웃의 날을 교훈 삼아 성숙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_노영권, 「2050년 대한민국 4일」
3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궁금할 것이다. 앞으로 책은 어떻게 될까? 소크라테스는 책을 반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자와 글쓰기는 사람들에게 글로 쓰인 것만이 앎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책은 정보에 불과하고, 진정한 앎은 우리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책도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형식일 뿐일까? 파피루스, 볼루멘, 코덱스. 기원전 4000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유효기간이 조금 길었던 어떤 지식 플랫폼의 황혼을 보고 있는 것일까? _문지혁, 「멸종과 생존」
몇 해 전 로봇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폭력을 금지하고 과태료를 부과하는 로봇기본법이 제정되었음에도, 평등추진연대가 이에 따른 신고를 하지 않고 차별 구제 소송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평등추진 연대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반복되는 로봇에 대한 이번과 같은 차별 사건을 막기 위해서는 평등 개념에 적용되는 대상을 인간을 넘어 확장시키는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한편으로 로봇기본법은 물리적인 폭력만을 금지하고 있을 뿐, 이 사건과 같이 비하적 발언을 통한 부당한 대우는 금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_박한희, 「차별받는 로봇, 평등을 위한 질문」
희곡을 읽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희곡 읽기를 위한 방법은 있다. (……) 그것은 먼저, 머릿속에 ‘상상적인 극장’을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 로날드 헤이먼은 이 작업을 ‘상상적인 극장mental theatre’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갈 수 없는 독자가 희곡을 읽는 방식이 상상적 읽기라는 것이다. 이 방식이 극장에 가는 것보다 불리할 수는 있지만, 독자의 상상은 어떤 훌륭한 극장이나 어떤 뛰어난 배우보다 이상적으로 무대를 그릴 수 있다. _양근애, 「‘구멍 뚫린 텍스트’의 비밀」
때로 아름다움이란 좋은 것의 집합이다. 누구나 가지긴 어려울 정도로 비싸고 세련된 우아한 무언가다. 배제하고 엄선해낸 결과다. 그 사실을 수긍하기까지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 어쩌면 아름다움은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아름다움이란 그리움이다. 별 볼 일 없는 물건이 풍기는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이다. 할머니가 죽은 뒤, 내가 할머니의 탁상스탠드를 아르떼미데 스탠드보다도 갖고 싶어 하듯이. 그런 개인적인 소중함이 스탠드의 허름함을 없애지는 않는다. 의미는 허름함, 열악함을 해결해주지 않고 각자가 가진 의미는 충돌하고야 만다. 다만 그 의미들은 세상에 머무를 때만 생겨나는 것을, 의미에 앞서는 살아 있음의 선명함을 알려준다. _임지은, 「아름다움에는 더 많은 것이 속해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