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1+1+1+1+?=무한대!
다채로운 모습의 아이들이 이뤄 내는
알록달록, 새콤달콤한 조화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20권, 『순일중학교 양푼이 클럽』이 출간되었다. 제14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순일중학교 양푼이 클럽』은 심사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택한 소설로, “청소년 소설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 요소들을 재치 있게 잘 정리한 작품” “개성 있는 문장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십 대의 특징이 한껏 드러나는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예은, 보민, 종희, 시래. 네 단짝은 중학교의 마지막 1년을 다 같이 즐겁게 보내기 위해 별관 다목적실에 몰래 숨어들어 커다란 양푼이에 온갖 재료를 가득 넣은 빙수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찰그랑대는 양푼이 속에 담긴 파파야잼, 아몬드우유, 열무김치와 캔 참치 위에는 어느새 각자의 고민이 토핑처럼 올라가 있다.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 당연했던 아이들은 자신들의 고민에서 이어지는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거리를 두다가도 결국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융합되고, 성장해간다.
그렇게 알차게 뒤섞인 4인 4색 양푼이 클럽은 같은 반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아이, 유리의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 지은이
김지완
1996년 출생.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쓴다. 장편 동화 『아일랜드』로 2023년 제20회 마해송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창작 동인 ‘문어뱅스’ 소속이다.
■■■ 차례
양푼이
예은의 모든 처음
보민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얼룩말
종희의 결심과 노란 파파야
시래는 짭조름한 바닷물을 향해 간다
열여섯과 열일곱 사이에서, 해피 뉴 이어
작가의 말
■■■ 책 속으로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다.
네 고통은 네 고통이고 내 아픔은 내 아픔이라고 딱 잘라 구분 짓는 일. 몸과 마음이 곯은 너를 두고 깊은 밤 혼자 곤히 잠드는 일. 윤예은과 손보민, 전종희와 최시래가 서로의 외로움과 슬픔과 상처를 외면하는 일.
그것은 양푼이 안에서 밥 한 톨까지 세세하게 섹션을 나누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네 거니까 잘 살펴 드세요,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냉정한 일이었다.
_7~8쪽
“울지 마, 예은아. 앞으로 내가 더 잘해 줄게, 응?”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주는 예은과 함께 바다에 빠진 사람이 아니었다. 한주는 모래사장에서 예은을 바라보며 밧줄을 던져 주는 인명 구조 요원에 가까웠다. 함께 저지른 일인데도 한주는 괜찮고 예은은 괜찮지 않았다. 예은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인데 반대로 한주는 예은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 낸 사람처럼, 그래서 예은을 꼭 책임져 주어야 할 것처럼 굴었다. 그 간극을 예은은 이해할 수 없었다.
_28쪽
예은은 테스트기를 검은색 편의점 봉지에 넣고 묶은 뒤 쓰레기통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불안이었다. 그러고는 가붓하게 밖으로 나와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시래에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래.”
허리를 굽혀 손을 씻는 예은의 뒤통수에 시래가 가만히 손바닥을 올렸다. 시래의 손이 무척 차가웠다.
_39쪽
친구들과 함께 양푼이빙수를 만들어 먹는 것은 인생에서 손꼽히게 즐거운 시간이다. 그 시간을 유리 앞에서 이렇게 깎아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양푼이가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것인지 이야기하기보다 유리의 말에 동조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졌고, 보민은 그 흐름을 따랐다.
“늦기 전에 다이어트 해. 나도 다시 시작할 거야.”
“네가 다이어트를 한다고? 너 원래 마른 체질인 줄 알았는데.”
그러자 유리가 서늘한 눈빛을 했다.
“뭐래. 원래 마른 체질이 어디 있어?”
_58쪽
“전부 다 들어 줄래?”
“응? 응, 당연하지.”
다 들어 줄게. 인강 듣는 것처럼 꼼꼼하게 들을게. 나 듣는 거 잘해. 팔을 붕붕 흔들며 약속하는 예은의 모습을 보면서, 보민은 초콜릿 한 조각을 떠올렸다. 앙증맞고 달콤하고 기분 좋은 것.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 자신이 마음 다해 즐기고 사랑했던 것. 다행히도, 아직까지 자신 옆에 있고 가슴 안에도 남아 있는 것.
_76쪽
중학생이 되고 아빠가 감옥에 간 날, 종희는 인정했다. 내가 기다리는 아빠는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럴 거면 차라리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게 나을 텐데, 잊을 만하면 이렇게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반년 동안 머릿속으로 아빠 장례식만 열 번도 넘게 치렀어. 어디서 칼 맞고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경찰일까 봐 가슴이 내려앉았어. 어떻게 변명할 생각조차 안 해?”
“…….”
_88쪽
“고마워.”
보민이 하려던 인사인데, 종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
“뭐가? 덕분에 공항 구경도 하고 재밌었어. 나도 고마워.”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보민이 해사하게 웃었다. 종희도 따라 웃었다. 네가 냉정하지 않아서 좋다는 말, 보민의 말이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더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리라는 걸 종희는 듣는 순간 확신했다.
(……)
“미친. 최시래 진짜 미쳤나 봐!”
그러고는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을 종희에게 보여 주었다.
삭발한 시래의 셀카였다.
_114쪽
고등학교를 안 가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대책 없이 뱉어 버릴 계획은 아니었지만 시래 안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결정된 미래였다.
시래는 노트북 배경 화면을 바라보았다. 항암 치료를 받고 맥없이 잠들어 있는 톰 구이디의 이마에 촉수를 가져다 댄 외계인이 조용히 기도하는 스틸 컷이었다. 시래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 중 하나다. 나의 외계인이시여, 어디 계시나이까. 시래가 중얼거렸다. 시래의 민둥한 두상이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_114쪽
아빠: 남들 다 가는 고등학교를 간다는 걸 이렇게 발표씩이나 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감히 조건까지 다느냐?
엄마: 세상 물정을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매일같이 영화만 보더니 이제는 아예 영화배우를 하겠다고 나서느냐?
시경: 그 바닥이 얼마나 혹독한 곳인데 돈도, 백도 없는 네가 어떻게 살아남겠느냐?
시오: 배우를 하기에는 네 얼굴이 다소 밋밋하지 않느냐?
귓가에 폭격처럼 쏟아지는 말들을 들으면서, 시래는 단전에서부터 차갑게 피어 오르는 화를 다스렸다. 역시 나랑은 장르부터가 달라.
_140쪽
보민과 함께 있다 보면 마음의 끈이 조금씩 느슨해졌고, 그 사이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유리는 무방비해지는 자신이 두려웠다. 두려워서, 보민에게 갑작스레 싸늘해지곤 했다.
눈에 띄게 나쁘거나 아픈 것은 아닌데, 속이 곯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픈 것쯤은 참을 수 있었으나 때때로 마음에 강렬한 허기 비슷한 것이 찾아왔다. 나를 다 보여 줄 수 있고, 다 보여 줬는데도 이해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희한하게도 그럴 때 떠오르는 건 언제나 보민이었지만, 먼저 연락해 볼 용기는 없었다.
_166쪽
“졸업하기 전에 너도 다목적실 한번 와.”
다시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시래가 유리의 등에 대고 말했다.
“다목적실에? 왜?”
“거기에는 양푼이가 있거든.”
보민이 개구진 말투로 답했다. 유리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맞다, 너희 무슨 클럽 만들었지, 했다. 유치하다고 여기려 했지만 실은 내내 부러웠다는 걸 유리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깔끔하게 부러워하면 닮고 싶다는 마음만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_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