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르문학의 독보적인 스토리텔러
듀나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
한국 장르소설의 자존심, 독보적인 스토리텔러 듀나의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가 10주년을 맞아 새롭게 출간되었다. 듀나의 초기 단편부터 중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 열세 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수록작 「안개 바다」는 개정판이 동시 출간되는 『제저벨』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으로, ‘링커 우주’의 시발점이 되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그 외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등 ‘장르소설’의 스펙트럼에 속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입담을 통해 펼쳐진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한 상상력의 소유자 듀나.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떤 과정과 방식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통해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곳에 우리와 닮은 누군가가 있다
‘다른 세계’에 투영된 우리의 ‘미친 현실’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이 어디에 있든 바로 거기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틈새가 열리고, 그렇게 휩쓸려 들어간 다른 세계에서 뜻밖에도 당신은 여러 겹으로 기묘하게 겹쳐 보이는 낯익은 세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듀나가 열어 보이는 이질적이고 환상적인 ‘다른 세계’에서 우리는 항상 현실의 문제들과 마주치게 된다. 인터넷 채팅을 소재로 한 「A, B, C, D, E & F」에서 A와 B가 만든 가상 인물들은 점차 막강한 실제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끼리 커플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한 상황까지 이른다. 그 속에서 실재와 가상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게 된 상황과 무한한 소통을 기대하지만 쉽게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사이버 공간의 실상이 떠오르게 한다. 「죽음과 세금」에 축조된 사회에서도 지구의 모든 인구가 ‘불사신’이 된 상황에서 공정한 살인 임무를 수행하는 불사자들의 비밀 집단이 있다는 설정은 장르적인 상상력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지금 당면한 노인인구 증가에 따른 정부의 부담과 과중한 세금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의 배경이 되는 외계 행성도 마찬가지이다. 군대 가기 싫어서 달아난 청수, 외계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간 선교사역단, 탈북인에 대한 적개심 등 우리 사회의 일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장르소설이 어떤 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그려내는지 인상적으로 예시하는 작품이다.
SF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시스템의 세계
가장 강력한 생태계 시스템, 링커 바이러스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시스템’ 이미지다. 「호텔」, 「소유권」 등에서 보이는 막강한 시스템은 매트릭스적 신경망과 편집증적 감시체계를 넘어 자본주의 시스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작품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안개바다」에 등장하는 링커들의 광대하고 강력한 네트워크 역시 지배적인 시스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브로콜리 행성에서의 끔찍한 혈투가 끝난 ‘다음 세대’에서는 지난 시대의 역겨운 기억들은 모두 지워진다. 지금의 현실을 옥죄는 강박적인 시스템과 문제 상황들도 ‘링커 바이러스’가 구축한 거대한 생태계의 흐름에서 바라본다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시스템 이미지들과 동시에 가장 전복적인 이미지를 함께 빚어내는 상상력. 그런 작가의 상상력을 빌어 전혀 다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재미. 그것이 듀나의 다양한 작품들이 모두 강렬한 흡인력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수록된 개성 넘치는 초기작들은 그러한 듀나의 강점이 두드러지는 작품들로, ‘듀나 월드’에 입문하는 독자는 물론 오랜 독자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듀나
소설가이자 영화비평가. 1990년대 초, 하이텔 과학 소설 동호회에 짧은 단편들을 올리면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로 각종 매체에 소설과 영화평론을 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장편소설 『평형추』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민트의 세계』 , 소설집 『대리전』 『태평양 횡단 특급』 『그 겨울, 손탁 호텔에 서』 , 논픽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가능한 꿈의 공간들』 등을 냈다.
2022년 하반기,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외의 여러 단편과 장편 『제저벨』이 함께 수록된 소설집 『Everything good dies here』이 미국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동전 마술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메리 고 라운드
A, B, C, D, E & F
호텔
죽음과 세금
소유권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여우골
정원사
성녀, 걷다
안개 바다
디북
해설
작가의말
개정판 작가의말
“마법이라니까요. 여기선 저녁 9시 50분부터 10시 4분까지 다른 세계로 가는 틈새가 열려요.”
_12쪽, 「동전마술」 중에서
그녀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현대 문명인들의 고해소인 인터넷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 서비스에 질문을 올렸다. “남자친구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 있어요.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 계신가요? ”
_22쪽,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중에서
처음으로 정화는 은주를 경쟁자로 보기 시작했다. 은주는 정화보다 현아의 세계에 훨씬 가까웠다. 정화와는 달리 생활력도 강해서 대학에 들어오기 전부터 스스로 벌어먹던 아이였다. 정화가 선물이나 용돈처럼 당연하게 받았던 모든 혜택을, 은주는 전쟁하듯 필사적으로 쟁취하며 살았다. 당연히 현아 맘에 들 만했다. 은주는 정화보다 훨씬 단단한 실체였으며 현실 세계에 더 가까웠다.
_36~37쪽, 「메리 고 라운드」 중에서
어느 날 A는 과연 B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한번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료 서비스에 하나 더 등록하고 C라는 친구를 만들었다. 물론 같은 사람이라는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되니까 C에게는 약간 다른 성격을 주고 B가 잘 가는 채팅실에 참여시켰다. 한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C는 자기를 A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_59~60쪽, 「A, B, C, D, E & F 」 중에서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 내 딸 시유는 같은 호텔의 신참 플레이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독창적이지도 않았고 극적으로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로맨틱하다고 생각할 만한 몇몇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_67쪽, 「호텔」 중에서
“혹시 제 증조부를 아십니까? 의사이시고 유명한 거인증 전문가셨는데…… 반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130회 생신 바로 다음 날에요. 자는 동안 돌아가셨죠. 심장마비였다나.”
물론 나는 채승휘 박사에 대해 알고 있다. 직업상 안면이 있었고 심지어 장례식에도 갔었다.
“한동안 그분이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어요.”
_80쪽, 「죽음과 세금」 중에서
그는 로봇을 스타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왜 안 되는가? 저 아이는 예쁘고 재능도 풍부하며 호소력도 있다. 이 정도면 스타가 가져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게다가 로봇은 실제 아이보다 낫다. 결코 나이를 먹지 않으니까.
_112쪽, 「소유권」 중에서
평원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건 청수가 ‘브로콜리’라는 이름을 붙인 동물이다. 초록색 털이 복슬복슬한 그 동그랗고 살찐 초식동물은 평원 어디에나 있다. 멍청하고 느린 동물이라 잡기도 쉽다. 밤만 되면 초록색 개처럼 생긴 육식동물이 서너 마리 몰려와 브로콜리를 한 마리씩 잡아가는데, 낮이 되면 사라진 게 전혀 눈에 뜨이지도 않고 남은 놈들도 사라진 동료들에 대해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은 사냥터보다는 채소밭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수는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
_143쪽,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중에서
“어찌 대장부가 여우 같은 미물에 겁을 내시오? ”
“여우는 그냥 짐승이 아니오. 놈들은 이치를 알고 모습을 바꿀 줄 알며 사람들을 희롱한다오.”
_178쪽, 「여우골」 중에서
두 번째 침입자가 발견된 곳은 올해 초에 그가 중력장 코일 근처에 판 작은 연못이었다. 첫 번째 식물과는 달리 두 번째 식물은 남에게 기생하는 대신 두 종류 수생 식물들의 뿌리를 줄기에 품고 있었다. 어린아이 팔 정도 굵기인 줄기가 잎도 없이 물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 분명히 식물이었지만 그 움직임에는 어딘가 동물적인 요소가 있었다.
_199쪽, 「정원사」 중에서
K시의 성녀는 단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걷고 있다. 그것도 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 한가운데를. 이 자전거 도로는 1977년에 완공되었고 (기록에 따르면) 성녀는 1524년에 제작되었으므로 뭔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
_219~220쪽, 「성녀, 걷다」 중에서
한스카에는 이제 400만이 넘는 개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두 발로 걸었고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들은 볼츠만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진화는 링커 바이러스의 장난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현상이었다. 인척 관계에 있는 두 종이 외계 환경에서 격리되자 유전자들의 교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_231쪽, 「안개 바다」 중에서
‘결국 나는 인공감미료만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수린은 생각했다. ‘조미료만 가지고 파스타에서부터 청국장까지 몽땅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세상. 이 망할 행성에 나만큼 난감한 입장에 빠진 요리사가 또 있을까.’
_285쪽, 「디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