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패망이라는 슬픈 역사에서 캐낸
부여의 아름다움의 극치
부여 사람, 잔아(殘兒) 김용만의 『부여 찾아 90000리』는 백제 패망의 슬픈 역사를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백제의 미학적 탐구라는 주제의식을 멀리 백제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대신 6․25전쟁과 그 이후라는 ‘동시대적’ 이야기를 통해 실현, 체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뜸’이라는 작은 마을에 대립하는 두 집안과, 이 반목을 운명처럼 짊어진 주인공 찬혁과 세영의 슬픈 성장사와 사랑으로 응축된 이야기를 통해 부여의 진정한 ‘비극미’를 선연하게 그려내고 있다.
반목을 운명처럼 짊어진
두 남녀의 사랑
『부여 찾아 90000리』의 주무대는 부여에 속하는 ‘새뜸’(행정구역상 오덕리)이라는 고장으로, 단순히 궁벽한 산골이 아닌 “선조왕의 태실비가 서 있”(26쪽)는 역사적 유물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며 윗마을(위뜸)과 아랫마을(아래뜸) 사이에 해묵은 대립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이 원수 사이가 된 것은 위뜸 김씨와 아래뜸 전씨가 씨족 부락을 이루어 서로 앙숙으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잘되기보다는 상대방이 못되기를 더 바랐다. 그처럼 적대관계로 살아온 두 뜸 사이에 주막이 있는데 짓궂은 사람들은 그 주막을 판문점이라고 부르고, 위뜸과 아래뜸이 합친 새뜸을 통일조국이라고 불렀다. (26쪽)
주인공 찬혁과 세영은 이처럼 대를 이어 대립하는 집안의 자식으로, 서로를 사랑하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숙명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세영의 집안이 좌익분자였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 찬혁의 집안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멸문지화를 당하게 한 ‘원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뜻을 둔 아버지 전덕술의 욕망 때문에 재벌 자제인 배태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세영은, 이 곤란에서 벗어나고자 선거를 핑계로 아버지에게 찬혁의 집안인 ‘위뜸’과의 화해를 제안한다. 전덕술이 소유한 유원지에 위락시설을 만들고, 위뜸과 아래뜸이 공동운영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개업식 전날 위락시설에 원인 모를 화재 사건이 일어나고, 찬혁을 방화범이라고 여긴 세영의 오해로 인해 두 사람은 오랜 이별을 하게 된다.
로망스적 세계관으로 그려낸
비극적 슬픔이라는 아름다움
찬혁이 방화에 관한 어떤 오해도 풀어주지 않은 채 고향을 떠남으로써 완수되지 못한 사랑은, 20여 년이 지나 두 사람이 재회할 때까지 고통스럽게 연장된다. 건축현장에서 일하던 인부 한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고, 그 사람이 바로 찬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세영은 그를 찾아간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기쁨이랄까. 여기에서 기쁨을 아름다움이라 해도 무방하오.”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일한 가치로 여긴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때문에 슬픔이 클수록 아름다움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는 거요. 그 가장 큰 슬픔을 내 몸으로 유발시킬 작정이오.” (155쪽)
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사랑의 합일을 이루려는 순간, 찬혁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세영과의 “사랑을 불멸의 사랑으로 승화”(177쪽)시킨다. “초월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자들은 “현실적 사랑으로는 사랑의 극치를 맛볼 수 없는 존재”(233쪽)들이기 때문에, 찬혁은 세영에게 사랑하는 이의 죽음처럼 “큰 슬픔을 안김으로써 비로소 그녀와 합일의 경지에 다다”(해설, 방민호 문학평론가)르고자 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비극적인 삶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부여는 백제 패망이라고 하는 슬픈 역사에서 아름다움을 캐야 하는 고장인데 부여의 위대성과 영원성은 그 비극미(悲劇美)를 지닌 데에 있다. 비극미는 행복의 원형이다. (7쪽)
이처럼 『부여 찾아 90000리』는 로망스적 세계관을 통해 백제 패망이라는 슬픈 역사를 지닌 부여야말로 진정한 비극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며, 그 비극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입증해 보인다. 이러한 작가의 ‘비극미’에 대한 탐구야말로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캐는 과정이며, 그 힘든 과정을 심리적 거리로 환산하면 90000리의 여정”(7쪽)인 것이다.
잔아(김용만)
충청남도 부여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초빙교수,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외래교수, 독서신문 논설위원, 시사랑문화인협의회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잔아박물관 관장, 잔아창작아카데미 원장이다.
주요 작품 및 수상
소설집 『늰 내 각시더』 _ KBS 단막극 〈은장도〉로 방영
『아내가 칼을 들었다』
장편소설 『칼날과 햇살』
동인문학상 심사작품에 선정
한국문학번역원 지원금으로 일본에서 번역 출간
『능수엄마』 _ 독서신문에 연재 후 출간
KBS 라디오 일일연속극으로 방영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번역 출간
『애나』 _ 『인간의 시간』을 개작하여 문학사상에서 출간
연구서 『세계문학관 기행』 _ 『서정시학』에 3년 연재 후 출간
시평론집 『김용만 소설가의 시읽기』 _ 『미네르바』에 4년 연재 후 현대시에서 출간
산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
그 외 장편소설, 소설집, 산문집 등 16권 출간
한국문학상, 경희문학상, 국제펜문학상, 황순원문학상양평대상, 불교문학상, 동아시아문학상, 만우문학상, 유승규문학상, 농민문학대상 등을 수상
(잔아박물관 홈페이지 ‘잔아 문학세계’ 참조)
프롤로그
찬혁의 자살미수와 허탈한 미소
위자료는 필요 없어요
판문점으로 불려진 주막
세영을 병원에 업고 온 찬혁
형님은 존경받을 강자야
결혼으로 채울 수 없는 비극적인 욕망
너를 죽이고 싶어!
주홍글씨를 가슴에 단 여인
꼭 이렇게 살아야 돼요?
당신은 유치한 여자가 될 수 없는 여자요
당신이 나를 죽여줄 수만 있다면
부여 품에 안긴 찬혁과 세영
너희 둘은 천생연분
위대한 내 왼팔이여!
나한테 진짜 할 일이 생겼어
절대온도와 절대사랑
비극미는 배우는 게 아니라 깨닫는 것
유령의 집을 찾아서
형은 너무 큰 걸 노렸어
실컷 즐겨본 고향 사투리
너희들도 원죄를 지고 있다
유령과의 행복한 부부싸움
저승에서 내려온 유령
해설 비극적 욕망의 로망스 — 방민호
작가의 말 태어나서 미안한 존재
하지만 (……) 자살 동기는 다른 데에 있었다. 세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직접적인 동기였다. 고향을 떠난 후 26년 동안 한 번도 연락을 못한 채 지내왔지만 찬혁은 늘 세영의 체취에 젖어 살아온 셈이었다. 그의 시간은 세영을 홀로 두고 고향을 떠나던 날 새벽에 머물러 있었고, 그의 마음은 떠나지 말라며 품속으로 파고들던 세영의 몸부림에 갇혀 있었다. _9쪽
“또 그 얘기를 하시는 거요? 지겹지도 않으세요? 그게 무슨 자랑예요? 언제나 약자는 당하며 살게 마련인데.”
찬혁이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약해서 당한 게 아니라 착해서 당했니라.”
“착한 것도 약한 거라고요. 못난 거죠.”
(……)
뒤따라 나온 찬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역정을 낸 것이 미안한 모양이었다. 비록 어색한 미소일망정 세영은 찬혁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셈이었다. 그 웃음에 대고 세영이 소리쳤다.
“착한 건 약한 게 아녜요!” _68쪽
매서운 겨울철이나 무더운 여름철을 가리지 않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고란초에서 인고의 미가 느껴졌다. 응달진 암벽에서 질긴 삶을 지탱하는 그 양치식물에서 백제 패망이라고 하는 쓰디쓴 한이 엿보였던 것이다. 난간을 내려온 찬혁이 말했다.
“단독체(單獨體)로 번식이 가능한 그 외롭고도 돌올한 품격이 내게 큰 충격을 주었소.” _156쪽
당신과 재혼? 하지만 당신과 나는 그런 상식적인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체질이오. 그러니 당신에게 가장 큰 슬픔을 안겨주는 게 더 큰 이득이 아니겠소?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기쁨이오! 낙화암에서 “내 몸으로 가장 큰 슬픔을 유발시키겠다”고 한 말은 바로 내 죽음을 의미했던 거요. _178쪽
“찬혁 씨는 그게 두려웠던 거예요. 나를 너무 미화시킨 나머지 그 환상적인 삶을 일상생활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거죠. 찬혁 씨가 시도한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생이었죠. 그가 노린 절대사랑은 환상세계에서나 가능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찬혁을 성공인이라고 말한 겁니다. 절대사랑에 도전한 모험가랄까. 절대온도는 영하 273도인데 절대사랑은 영상 몇 도일지 모르지만.”
“예상해보세요. 영상 몇 도일지.”
세영은 그 온도가 궁금했다.
“이승세계를 녹이고 저승세계를 울릴 만큼 뜨겁겠죠.” _208~209쪽
“나는 지금 저승이 어떤 세계인지를 살펴보는 중이오. 이승에서 상상하던 불안하고 두려웠던 저승세계가 아니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저승세계를 살아가고 있소. 하지만 아직은 잘 알 수 없소. 저승이 꽃밭 속의 생인지, 바람에 날리는 생인지, 구원이 가능한 생인지 잘 알 수 없소.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오. 내가 죽은 자이면서도 살아 있는 자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우리의 사랑을 신앙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오. 당신이 우리의 사랑에서 영원한 비극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말이오.” _224쪽
폭풍의 언덕은 일종의 통곡의 벽이랄 수 있다. 슬픔과 한이 맺힌 사람들은 히스클리프처럼 몸부림치고 싶어 이곳에 온다. 그처럼 실컷 울다 미치는 것이 구원이다. 히스클리프적인 구원이랄까.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의 간절한 사랑을 ‘자기를 죽이는 타살’로 여기듯, 히스클리프도 어떤 초월적인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 사랑으로는 사랑의 극치를 맛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_233쪽
“찬혁아저씨처럼 고통이 뭔지를 깊이 파고들었을 거란 말이죠. 고통이야말로 행복, 사랑, 진리 같은 중심가치의 핵심요소니까요.”
“고통은 학습된 게 아니고 타고난 체질인데?”
“그 체질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는 말이죠.”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아. 불을 지펴보렴.”
(……)
세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눈자위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_256~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