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새소설 12)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새소설 12)

저자1 김종연
저자2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일 2023-05-19
분야  한국소설
정가 15,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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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우리는 모두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이자

조금씩 매몰되는 기억의 생존자였다.”

 

제5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한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이 ‘새소설 시리즈’ 열두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2011년 시인으로 등단해 활발히 활동 중인 김종연 작가가 빚어낸 새로운 세계, 첫 번째 소설이다. 고단한 ‘재난’이란 상황이 명랑한 ‘마트’라는 공간과 만나 묘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 작품은 “전염병의 시대를 은유하며 그 고통과 비극을 기록하고 이해하려는 작가의 진심이 생생하게 돋보인다”(김희선 소설가)는 평가와 “작가의 시선에 믿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이주란 소설가)는 찬사를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지금-여기’를 비추며 그 안 깊숙이 자리한 심상들을 그림처럼 그려낸 이 소설의 힘은,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로 흘러 오늘을 살아내게 할 것이다.

 

■■■ 책 속으로

 

슬픔 가운데의 기쁨은 마약 같았다. 슬픔의 밑바닥에 닿을수록 가끔의 기쁨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높은 자리로 날려 보냈다. (10쪽)

 

비관이 금지되자 낙관은 유행처럼 찾아왔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간명해졌다. 사람들은 아주 조금씩 회복되는 일상이 주는 낙관을 비축했다. 그러다가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와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비관의 증인들을 잘 섞어 희석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10~11쪽)

 

이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데도, 항상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둔 채면서도, 막상 떠나려면 두고 갈 것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기억이었다. 내게 온전히 속하지 않고, 절반쯤은 타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공동의 기억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려면 이전의 차원과는 작별을 해야 했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나눠 쓰면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으며 나만이 그 과거를 알고 있는 존재가 되는 일이었다. (114~115쪽)

 

나만의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은 항상 잔인했다. 그건 모두가 함께 본 걸 나만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가끔은 그런 외로움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었다. 내가 기억의 유일한 생존자라는 믿음만 있으면 견디는 게 가능했다. 내가 본 것이 유일하며, 그것을 반드시 간직해야만 한다는 믿음. 내가 살아 있다면 모두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잔인한 믿음. 그러다 보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마주치게 될 때도 있었다. 그건 보통 감당할 수 없는 위로였고, 너무나 무거운 허무이기도 했다. (115쪽)

 

기억도 오래되면 썩어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 뽑아낼 수도 없이 일상을 통증 속에 놔둘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면 기억을 제거하거나 이식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난 다음일 것이다. (185쪽)

 

피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피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혈육이라는 말의 뜻은 기억을 나눈 사람들이었다. 내 피에는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가족들이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221쪽)

 

한번 새겨진 기억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은 내가 읽을 수도 없이 몸을 내어준 문신과도 같았다. 내가 그 기억을 읽으려면 몸을 떠나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221쪽)

 

우리 개개인은 모두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이자 조금씩 매몰되는 기억의 생존자였다. 살아남았다는 감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미래를 탄생시키는 게 공동의 목표가 되었다. (240쪽)

 

한번 사람됨을 포기하고 나면 그다음은 쉬웠다. 그러면 믿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믿을 만한 것을 찾고, 맹목과 맹신을 찾은 다음에는 안온하고 편향적인 내 피난처에서 함께할 누군가를 찾아내기 위해 어디든 섞이려 드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249쪽)

 

잊을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도 언젠간 잊히고 만다는 건 우리가 우리 삶의 피지배자에 불과하다는 걸 상기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은 시간에 따라 직렬로 구성됐다. 가까운 기억에 스위치를 켜면 먼 기억까지 함께 켜졌다. 먼 기억에 스위치를 켜려면 가까운 기억부터 전류를 흘려보내야 했다. 그러니까 잊는 건 적어도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우리의 다른 이름들은 언제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249쪽)

 

자신이 거대한 관계망 속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이 자신밖에 없었다. 누구에게 화를 내고 누구를 원망하든 그것은 결국 내게 돌아오고 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를 먼저 의심하고, 나를 먼저 벌하고, 나를 먼저 반성하다 보면 살아 있는 것도 잘못이 되곤 했다. (260쪽)

 

나는 자주 암전되었지만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구분될 만큼의 빛이면 충분했다. 너무 많은 빛 안에서는 내가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내가 사라져버린 자리를 사람들은 그림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 서 있는 건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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