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호에 사는 미지의 존재, 몸에서 자라나는 뼈, 죽음이 사라진 세계…
독특하고 기괴한 세상으로 초대하는 일곱 편의 디스토피아
기이하고 기괴하며 기발하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한마디의 감상만을 허락한다면,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
_남유하(소설가)
■■■ 책 소개
끔찍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본질을 꿰뚫다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과감하게 선보이는 기묘한 이야기들
호러, 미스터리, SF, 판타지를 넘나드는 일곱 개의 세상
눈을 뜨니, 안방 침대에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고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정신이 점점 선명해지는 가운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누구든 놀라지 않을 각오로 눈을 부릅 뜨고 있던 찰나,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만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나’였다.
“안녕? 놀라게 해서 미안해. 보시다시피 내가 너고 네가 나야.”
또 다른 나는 나를 협박하여 각종 통장의 비밀번호를 캐려고 했다. 거부하니 돌아오는 것은 전기 충격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 뜬금없이 금융 정보를 캐묻는 걸까?
표제작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는 갑작스러운 도플갱어와의 조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간을 역행하여 서술하며 과거에 있었던 일을 파헤치는 흥미로운 전개를 선보인다. 도플갱어는 어디에서 왔는지, 왜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각종 정보를 캐내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낱낱이 밝혀지는 과정이 기괴하고 섬뜩하다. 빚에 허덕이면서도 집을 구하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영끌’이 존재하는 현실에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박해수 작가는 데뷔작이자 첫 소설집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에서 기괴한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선보인다. 표제작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를 포함하여, 601호에 괴물이 산다는 설정으로 기괴함을 보여주는 「블랙홀 오피스텔 601호」, 끝없는 지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컨드 헤븐, 천삼백하우스」, 사람의 몸에서 갑자기 자라기 시작한 뼈로 인해 정상인과 비정상인으로 나뉜 세계를 그린 「몰락한 나무들의 거리」, 로봇의 오작동으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룬 「범인은 로봇이 분명하다」, 죽음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는 「신의 사자와 사냥꾼」, 코로나 이후 막강한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아비규환이 되어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때 홍대라고 불리던 곳에서」까지 총 일곱 편의 디스토피아가 수록되어 있다.
재미뿐만 아니라 현재를 담아내는 것에도 집중하다
공포 소설에서 엿보는 우리 세상의 현주소
기괴한 이야기지만 절대 허황되고 뜬금없는 내용이 아니다. 박해수 작가는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담아냈다. 「블랙홀 오피스텔 601호」 「세컨드 헤븐, 천삼백하우스」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에서는 ‘집’에 대한 열망과 허망함을, 「범인은 로봇이 분명하다」에서는 로봇이라는 완벽해 보이는 존재의 불완전함을, 「신의 사자와 사냥꾼」에서는 주변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쾌락만을 쫓는 인간 군상을, 「한때 홍대라고 불리던 곳에서」에서는 극한에 몰렸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이기심을 그려내며 어디선가 겪어본 듯한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해원 씨. 현재 정식으로 고용된 직장은 없으시고요?”
“네, 없습니다. 몇 년 전 일자리를 잃고는 제대로 된 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나이가 벌써 40대 중반이다 보니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네요.”
“좋네요. 서류를 보니까 연소득이 500만 원 정도로 잡히셨고요.”
소득 이야기가 나오자 해원은 불안해졌다. 어쩌면 지원자들 중에 500만 원도 못 버는 인간들이 수두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가난했어야 하나?
-P.32, 「세컨드 헤븐, 천삼백하우스」 중에서
“도망치지 마라, 태기야.”
태기는 속으로 움찔했다. 양정은 이상할 정도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다른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난 네 녀석 속을 다 안다고. 그러니까 도망치지 마, 현실로부터 말이야. 넌 항상 내가 마약이나 하면서 현실 도피한다고 조롱했지만 실은 그 반대야.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건 바로 너라고. 우린 이 세상의 꼭대기에 결코 올라갈 수 없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왜냐하면 먹이 사슬은 이미 완성됐으니까. 치고 올라갈 틈이 없다고. 사람들이 왜 마약에 매달리는지 알아? 자신이 누군지 잊고 싶기 때문이야.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거든. 마약에 취해서 모든 걸 잊은 채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거지. 그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죽음이야.”
-P.203, 「신의 사자와 사냥꾼」 중에서
쾅! 쾅! 쾅! 쾅!
드디어 요란스럽게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살려주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안에 계시면 제발요!”
여자가 내 집까지 오고 말았다. 나는 방 한가운데에서 어정쩡하게 선 채로 굳어버렸고 머릿속으로는 양심과 생존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원래는 감염 여부를 생각해 열어주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막상 여자가 문을 두들기며 도움을 청하자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누군가 살기 위해 나에게 매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P.264, 「한때 홍대라고 불리던 곳에서」
박해수 작가는 쓰라린 현실의 모습을 가감없이 녹여내며 이야기에 진정성을 더한다. 현실은 늘 희망적이지만은 않기에 우리는 이야기로부터 위로를 얻고, 그 속에서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우리 곁의 이야기를 날카롭게 그려낸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는 ‘호러·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새롭게 써 내려간 하나의 또 다른 장르가 될 것이다.
무서운 이야기보다 더 무서운 ‘현실’적인 이야기
단순한 공포에서 입체적인 실상으로 진화하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상상으로 만들어낸 그 어떤 공포 이야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현실’이 아닐까. 뉴스를 보면 공포 영화보다 훨씬 잔혹한 이야기가 쏟아지는 세상이다. 단순한 ‘공포’에 열광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공포 소설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제가 그려낸 세계는 오래전 퇴색해버린 슬픈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를 배경으로 했거나 SF적인 부분이 있음에도 더 이상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슬픈 운명의 세계 말입니다. 사람들이 강시, 처키, 프레디, 터미네이터에 열광하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겠지요. 무섭지만 나름의 흥취가 있었던 그 시대는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현실이 더 살기 힘들고 무서우니까요.
-P.277,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무서운데 재밌는’ 이야기.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는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저 기괴하기만 한 플롯에서 벗어나 현재를 고민하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유의미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앞으로 작가의 의무이자 공포 소설의 의무가 될 것이다.
박해수
한때는 미친 듯이 영화에 몰입했지만 지금은 텍스트가 영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좋은 문장을 음미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를, 그 뒤에 작가만의 깊은 세계가 숨겨져 있음을 한창 알아가고 있다. 르 클레지오를 비롯한 프랑스 소설과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 백진스키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거기에 타고난 멜랑콜리가 더해지다 보니 지금과 같은 글을 쓰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재즈와 데스메탈, 카레, 홍차, 울적한 기분으로 산책하기를 사랑한다. 소설을 통해 자신만의 거대하고 괴기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 작가의 말
제가 쓰고 싶고, 또 쓸 수 있는 것은 공포와 괴기뿐이기에 이 시대를 공부하고 느끼려 애쓰는 중입니다. 시대에 뒤쳐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무서운데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추천사
이 책은 인간 생존의 기본 단위인 집이라는 공간을 비틀어 낯설고 으스스한 차원으로 이끄는 작품으로 가득하다. 그 밑바닥에는 오랫동안 공포를 탐닉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상상력이 깔려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들은 단순히 공포심을 자극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메스를 들어 배를 가르고 내장을 낱낱이 보여주듯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때로는 인물의 입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과감하게 고발하기도 한다. 이렇듯 박해수는 여러 장르를 능수능란하게 혼합하면서도 각 작품에 가장 걸맞는 장르에 힘을 실어준다. 힘의 원천은 생생한 묘사다. 상황과 사건의 생생한 묘사로 압도되는 건 소설 속 주인공만이 아니다. 문장만으로 독자에게 비주얼 쇼크를 일으킬 수 있는 작가는 결코 많지 않다. _남유하(소설가)
블랙홀 오피스텔 601호
세컨드 헤븐, 천삼백하우스
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
범인은 로봇이 분명하다
몰락한 나무들의 거리
신의 사자와 사냥꾼
한때 홍대라고 불리던 곳에서
작가의 말
“615호인데요.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쭤보려고요. 601호 말이에요, 혹시 누가 사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러자 아저씨가 넋이 나간 듯 대답했다.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듯 뭔가를 휘갈겨 쓰면서 말이다.
“6층…… 살아. 그렇지, 6층에…… 거기 살지, 601호. 어 그래, 살고 있어.”
“네? 죄송하지만 누가 사나요?”
_「블랙홀 오피스텔 601호」 중에서
“엉터리 같은 믿음이군. 진실은 항상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세상은 자네가 모르는 이해관계가 뱀처럼 얽혀 있다고. 천삼백하우스? 땅굴을 수백 미터씩 파서 방을 만들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모셔놓겠다? 최고의 생활 여건을 보장하겠다? 자네는 지금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가려는 거나 마찬가지야. 수백 미터 지하에 만들어놓은 관 말이야. 가난한 사람들을 다 죽이려는 속셈이라고. 알겠어?”
_「세컨드 헤븐, 천삼백하우스」 중에서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내 돈을 다 털어가겠다는 거야?”
“어, 맞아. 내가 사는 차원으로 돌아가서 은행 빚 싹 다 갚아버리려고. 이 집 살 때 무리한 거 너도 알 거 아냐? 우리 능력으로 이 집은 무리였어.”
“그래서? 생각 없이 대출 받은 거, 내 돈 훔쳐서 갚고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거야?”
그 말에 여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지. 네가 나니까, 네 돈도 내 돈인 거지. 둘 다 불행한 것보다 한쪽이라도 행복한 게 낫지 않겠어?”
_「나의 집이 점잖게 피를 마실 때」 중에서
거실에 있던 운정은 경찰의 빠른 질문에 허둥지둥 대답하면서도 친구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표정이 사라진 친구의 입 속에는 음식물이 쑤셔 넣어져 있었고, 반듯하게 눕혀진 채 배가 꽃처럼 갈라져 있었다. 운정은 위화감이 느껴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도 잘 정렬된, 기묘한 질서의 감각을 느꼈다.
_「범인은 로봇이 분명하다」 중에서
해수는 마지막까지 이 병에 걸리지 않은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최후의 정상 인류’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모두가 뼈를 멋지게 다듬고 과시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진화에 뒤쳐진 도태종 취급을 받고 있었다. 물론 예의와 규범이 존재하는 만큼 소수자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터놓고 지내며 인정해주는 것도 아닌, 반쯤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동료라 생각해주기는 하겠지만 굳이 배려할 필요는 없다는 식이었다.
_「몰락한 나무들의 거리」 중에서
“회개하라! 죽음이 온다!”
태기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여자를 이미 들이받은 후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저 앞에서 나뒹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되살아날 테니 생사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부상이 아무리 깊어도 상처는 마치 시간이 역행하듯 아물었다.
_「신의 사자와 사냥꾼」 중에서
정말 이상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미친듯이 달려가다 문득 다리가 풀려서 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진 사람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온 힘을 다해 내달리던 몸뚱이들이 순식간에 침묵에 빠져드는 것을 보며 나는 삶과 죽음에는 중간이 없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살아 있다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었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극히 단순한 진실이, 인간에게 씌워진 무섭고 잔혹한 굴레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대 거리는 그렇게 아주 조용한 곳이 되어갔다.
_「한때 홍대라고 불리던 곳에서」 중에서